“”너희들 해체하는 게 어때?“ 사장의 한마디에 흔쾌히 승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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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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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9회에선 레이지가 해체하게 된 경위를 밝힙니다.

1981년 2월 18일에 해체 선언을 하고, 기자회견에 임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이노우에 씨)

- 밴드의 인기도 피크가 지나면서 아이돌 노선에 대한 의심이 커졌다.

“너희들, 사실은 어떤 음악이 하고 싶은거야?” 사무소의 소개로 프로듀서 자리에 앉은 사람은, 후에 작가가 되는 이주인 시즈카 씨였습니다. “하드록이 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대답은 명쾌했습니다. “해보면 되잖아.” 하코네의 록웰 스튜디오에 틀어박혀 하드록으로의 회귀를 노린 앨범 제작에 착수했습니다.

잡지의 취재에도 “록을 하고 싶다.”라 공언했고 아무렇지도 않게 담배도 피워대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 7월부터의 전국 투어에선 “아이돌 노선은 이제 끝”이란 말과 “헤비메탈 선언.” 최연장자이자 리더인 무네타카 히구치 씨와 사무소의 후지타 코이치 사장이 충돌해 해고 소동도 일어났었습니다. 결국은 “맘대로 해!” 앨범 녹음장에 스태프가 아무도 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방치당한겁니다.

- 1980년 12월, LAZY는 앨범 ‘우주선지구호’를 발매. 수록곡의 대부분을 타카사키 아키라 씨부터 각 멤버들이 작곡. 이주인 시즈카 씨도 ‘다테 아유무’ 명의로 작사에 참가했다. 일본 록 팬들이 명반으로 꼽는 한 장이다.

5명이 각자 자신의 음악을 관철하는 경험을 하고보니 멤버 간 방향성의 차이가 확연해졌습니다. 탓칸과 히구치 씨는 한층 더 격렬함을 추구하고 싶어 했습니다. 카게야마 군은 솔로. 저는 ‘어덜트 오리엔티드 록(AOR)’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데이비드 포스터가 소속해있는 미국 밴드 에어플레이의 음반을 듣고 ‘이거다!’라고 직감했죠. ‘그 때’는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냥, 너희들 해체하는 게 어때?” 1981년 정초에 그런 말을 꺼낸건 후지타 사장이었습니다. 멤버 간 음악성의 차이가 확연히 차이나던 우리도 흔쾌히 승낙. 2월 18일에 예정되어 있던 카게야마 군의 버스데이 라이브를 해체발표일로 정했습니다.

데뷔의 기회를 주신 카마야츠 히로시(무슈 카마야츠) 씨에게 보고해야만 했습니다. 해체발표 전날 밤, 오사카에서 카마야츠 씨를 만났습니다. “우리들, 해체합니다.” 카마야츠 씨는 “으음”이라 신음하며 아무 말도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천천히 입을 열고 “디스코장에 갈까?” 어째선지 디스코장에서 미친 듯이 흔들었습니다.

다음날, 도쿄의 조후시 그린홀에서 LAZY는 해체를 발표했습니다.

해체 라스트 라이브는 5월 31일의 나고야 공연이었습니다. 라스트 라이브의 마지막, 드럼이나 기타의 마구 연주하며 곡을 끝내는 ‘휘젓기’가 좀처럼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들 끝내기 싫어서 20분 정도 계속한 게 아닐까요? 라이브 후에는 다섯이서 밤새 마시고 “다들 건강해.” 그것 뿐이었습니다. LOUDNESS를 결성한 탓칸과 히구치 씨 둘이나, 솔로 활동을 시작한 카게야마 군과는 몇 년간 만나는 일이 없었습니다.

(2018년 7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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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노선으로 인기절정, 일단락되자 싹트기 시작한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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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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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8회에선 아이돌로서 인기절정이던 시기와 음악적으로 ‘빌린 음악’ 상태로 생긴 의문을 이야기합니다.

히비야 야외 음악당에서의 라이브에는 많은 팬들이 몰려들었다. (1978년)

- LAZY는 아이돌 노선에서 인기인이었다.

당시에는 음악 방송의 일이 월요일에 집중되어있었습니다. 니혼테레비의 ‘홍백가 베스트텐’과 ‘밤의 히트 스튜디오’의 생방송과 일본방송협회(NHK) ‘렛츠고 영’의 녹화도 월요일이었습니다. 멤버들은 방송국에서 부르면 언제라도 달려갈 수 있도록 월요일의 예정을 비우고 대기했습니다.

합숙소에는 욕실이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멤버가 한명씩 들어가기 때문에 아침 7시에 버스가 마중 나올 경우, 첫 번째 사람은 새벽 4시 30분 정도부터 들어갔습니다. 전속 스타일리스트를 달지 않는 시대로 복장은 사복이 기본이었습니다. 일이 끝나고 “내일은 흰 바지로”라 전달받으면 한밤중에 황급히 코인빨래방에서 세탁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아이돌월간지에는 ‘묘조(明星)’와 ‘헤이본(平凡)’이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한쪽의 촬영으로 괌에 가서 1박을 하고 오니, 다른 쪽 촬영으로 다시 괌에 가는 일정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괌에서 인기가수 사와다 켄지 씨와 우연히 만나게 되어 밤에 숙박처로 초대받은 적이 있습니다. “연예계에서 지켜야만 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라고 물으니 “알겠냐, 절대 지각만은 하지마라.”고 답하셨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로는 상대에게 할 말이 없잖냐.”라며. 이 가르침은 지금도 지키고 있습니다.

휴일은 없었지만 우리들은 아직 나은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톱아이돌이었던 핑크 레이디 씨와 함께 잡지의 표지를 장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촬영은 새벽 2시부터였습니다. 스튜디오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핑크 레이디 두 분께서 잠든 채로 스태프에게 업혀왔습니다. 의자에 앉혀지고, 카메라맨인 시노야마 키신 씨가 “자 찍습니다.”라고 말을 걸자 방긋 웃으며 찰칵찰칵. 다시 업혀져서 스튜디오를 나가 다음 장소로.

- 인기가 일단락되자, 아이돌노선의 레이지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전성기에는 다음날까지 외워야할 드라마의 대본과 신곡의 연습으로 머리가 꽉 찼습니다. 아무것도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시간의 여유가 생기니 우리들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들과 거의 동시기에 사잔 올스타즈 씨나 ‘록 3인방’의 Char 씨, 하라다 신지 씨, 세라 마치노리 & 트위스트 씨가 데뷔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곡을 만들고, 가사를 써서 활약했습니다.

반면에 LAZY로 세상에 알려진 노래는 누군가로부터 받은 작품투성이. 분장실에서 고다이고 씨나 세라 씨와 함께 있으면 “너희들 연주실력이 그렇게나 좋은데, 언제까지나 그런 걸로 좋은 거야?”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래. 그랬었지.”라며 깨달아갑니다.

그럴 때 사무소에서 한 음악 프로듀서를 소개받습니다. 후에 작가가 되는 이주인 시즈카 씨입니다.

(2018년 7월 30일)

 

アイドル路線で人気絶頂 一段落して芽生え始めた疑問|出世ナビ|NIKKEI STYLE

市場規模が膨らんだ「アニメソング(アニソン)」ビジネスの立役者の一人がバンダイナムコアーツの井上俊次副社長です。1970年代にロックバンド「レイジー」で一世を風靡しました。井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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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의 진으로 대망의 히트, 아이돌 취급에도 익숙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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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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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7회에선 처음으로 히트하던 당시를 돌아봅니다.

안무가 추가되는 등, 아이돌 노선의 히트에는 곤욕도 있었다.

- 음반은 팔리지 않았지만, 멤버들은 조금씩 그 반응을 느끼고 있었다.

백화점 옥상에서 공연을 반복했습니다. 연주 후에는 음반을 직접 팔았습니다. 점차 팬들이 몰려들면서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데뷔하고 반년 정도 지난 1977년 후반에는 1000명 정도의 팬들이 모여들 정도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곡인 ‘카무플라주’도 오리콘 랭킹 60위 정도에 올라 ‘마루쿄’ 마크가 붙었습니다. 지금은 없습니다만 ‘도쿄에서 팔리고 있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신주쿠 아시베 홀’에서도 라이브를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전성기의 그룹사운드들도 이용하던 공연장이었습니다. 우리들은 갖고 있는 곡이 4곡 밖에 없었기에 딥 퍼플 등 좋아하는 악곡을 연주했습니다. 아이돌밴드를 볼 생각에 찾아온 여성팬들은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반응은 있었습니다만 주변의 기대를 넘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카무플라주는 작곡이 토쿠라 슌이치 씨, 작사가 마츠토야 유미 씨였으니까요. 사무소에서는 “다음 곡이 팔리지 않으면 너희들 오사카로 돌아가라”며 최후통첩을 했습니다.

세 번째 곡은 ‘빨간두건양 조심해’. 스태프가 “이번부턴 안무가 들어갈거야”라 말해 모두가 “에!?”. 춤선생님은 핑크 레이디의 안무가 도이 하지메 씨였습니다. 꼴사나운 춤사위였지만 우리는 거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레슨 후에도 합숙소 앞의 공터에서 안무 연습. 의상도 컬러풀하고 화려해져 갔습니다. 그야말로 일본식 베이 시티 롤러스. 탓칸(타카사키 아키라)는 정말 싫어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최근 카게야마 군과 탓칸 셋이서 “빨간두건이 팔리지 않았다면 어찌되었으려나”라며 대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카게야마 군은 본가의 이발소를 이어받았을 거라고. 탓칸도 역시 본가의 자영업을 이었을 거라고. 저는 본가 신사이바시의 아메리카무라 부근에서 술집이라도 하고 있었겠지요.

- 1978년 2월, 배수의 진으로 발매한 ‘빨간두건양 조심해’가 대히트해 인기 탤런트가 되다.

당시 인기가수는 ‘신춘 숨은 장기자랑 대회’ 등의 버라이어티 방송에서 콩트도 했었습니다. 우리도 까마귀 차림을 하거나 상투를 틀고 시대극을 했습니다. 콩트 연습도 시간을 들여야 했습니다. 적당적당히 해버리면 이카리야 쵸스케 씨한테 혼나고 마니까요. 저는 열여덟살로, 화려한 예능계가 즐겁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은, 머리가 젖은 채로 자버린 탓에 잠꼬대로 인해 머리가 뻗친 채 아침에 일어났습니다. “이거 괜찮네”가 되어서 신문에 ‘포키컷’으로 소개돼 꽤나 유행했었지요.

잡지의 취재로 그라운드에 모이자 눈앞에 끈이 있었습니다. 어째선지 모르겠으나 “오늘은 스모를 하겠습니다.”라며 그 자리에서 끈을 둘러 스모를 했습니다. 이러한 일이 계속되고, 멤버들의 감각도 조금씩 무뎌져, 이런 매일에도 익숙해져 갔습니다.

(2018년 7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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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함 투성이의 데뷔곡, 저조한 판매량에 침울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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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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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6회에선 실패가 거듭되던 데뷔당시의 일화를 밝힙니다.

'Hey! I Love You!'는 마카이노 코우지 작곡, 모리 유키노죠 작사의 곡이었다.


- 1977년 7월, 레이지는 데뷔곡 ‘Hey! I Love You!’를 발매했다.

데뷔 전부터 정보 프로그램인 ‘긴자 NOW!’에 출연하고 있었습니다. ‘오사카에 엄청난 밴드가 있다’란 분위기를 연출하는 영상도 제작했습니다. 우리가 무대에서 연주하고 있으면 관객들이 “와~” “꺄~”하며 열광하는 영상이었습니다.

이것엔 내막이 있는데, 소속사가 인기 아이돌 그룹 베이 시티 롤러스의 영상을 상영하는 필름 콘서트를 개최했습니다. 레이지는 스크린 반대편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콘서트의 마지막, 스크린을 올리며 레이지가 베이 시티 롤러스의 노래를 연주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이내 “무명 밴드가 멋대로 연주하지마!”라며 팬들이 격노합니다만, 앞부분만 찍으면 크게 환호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TV 출연 효과로 레이지는 나름대로 화제의 신인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리고 7월 24일, 유원지 ‘토시마엔’에서 데뷔 라이브 공연을 했습니다. 의기양양하게 무대에 올라섰습니다만 관중은 100명도 모이지 않았습니다. 음반도 통 팔리지 않았습니다. 그전까지 분위기가 좋았던 만큼 다들 실망하여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습니다.

데뷔곡이 전혀 팔리지 않았기에 두 번째 곡인 카무플라주는 조금 방향을 틀었습니다. 당시에 잘나가던 핑크 레이디의 히트곡을 쓰던 토쿠라 슌이치 씨에서 작곡을 부탁하고, 카마야츠 히로시(무슈 카마야츠) 씨의 세팅으로 작사는 마츠토야 유미 씨로 정해졌습니다. “이걸로도 안되면 어쩌지”라고 할 정도로 최고의 조합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대대로 흘러가진 않았습니다.

- 익숙지 않은 팝 곡조에 록밴드 지향이던 레이지는 당황했다.

당시에는 신곡을 연습해도 데모 테이프가 없었기에 손에는 악보만이 들려있었습니다. 악보를 보면 코드는 알 수 있다지만 팝의 ‘셔플’이란 리듬이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이제는 간단히 칠 수 있지만 록밴드로 활동해온 레이지가 연주하기엔 익숙하지 않은 리듬. 스튜디오에서 필사적으로 연습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데뷔곡은 레코딩을 하지 않았습니다. 녹음일 스튜디오에 가니 어째선지 스튜디오 뮤지션들도 불려왔더군요. 디렉터는 “너희들도 그들과 똑같은 곡을 녹음할거야”라며.

녹음 후에 곡을 비교해 들어보곤 “어느 쪽에 잘해보여?”라며 고르란 듯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셔플 리듬이 서툴렀기에 어쩔 수 없이 스튜디오 뮤지션의 녹음판을 쓰기로 했습니다.

악기는 겉모습뿐이고, 제대로 연주하지 않는 사례는 결코 드물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연주도 못하고, 레코딩도 못하며, 라이브를 열어도 팬이 오지 않았던 데뷔곡엔 억울한 추억만이 남아있습니다.

(2018년 7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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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록을 싫어하는 사장, 아이돌 노선으로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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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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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5회에선 아이돌 노선으로 데뷔하며 기대를 배신당한 꼴이 되어버린 뒷사정을 들어봅니다.

본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레이지는 아이돌 노선으로 진행된다 (우측에서 두번째가 본인)


- 1977년 봄, 7월에 프로데뷔를 앞둔 레이지는 상경하여 사무소가 준비한 시로카네다이의 외딴집에서 공동생활을 시작한다. 낮에는 음악 스튜디오에서 연습하고, 밤에는 메이지대학 부속 나카노 고등학교의 야간학교로 통학했다. 사무소는 레이지가 아이돌 노선으로 데뷔하기로 결정하고 있었다.

(60년대를 풍미한) 그룹사운드 장르의 분들이 스태프로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우리들의 머리는 더욱 짧아져 있었습니다. “록을 하자”라며 권유했던 카마야츠 히로시(무슈 카마야츠) 씨조차도 처음엔 함께 미팅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만, 어느 샌가 참여자들은 바뀌어 있었습니다.

닉네임도 정했습니다. 과거 그룹사운드에서도 더 타이거즈라면 줄리, 샐리 등의 이름이 있었기에 ‘이노우에’라면 어떨까했었습니다. 어느 밤, 공동생활 중이던 합숙소의 전화가 울렸습니다. 수화기의 너머엔 호텔 뉴저팬에서 회의 중이던 사무소의 높은 분들이었습니다. 대뜸 “‘밀키’와 ‘포키’ 중에 어떤가 좋아요?” 어느 쪽도 싫었습니다만 “포키로 부탁합니다.”라고 답해 저는 포키가 되었습니다.

저를 시작으로 한명씩 전화를 바꿔줬습니다. 카게야마 군은 프랑스어로 ‘미셸’로 결정. 탓칸은 ‘수지’라 불려 “그거 여자 이름 아니에요?” 히로유키의 ‘퍼니’는 이름조차 아니었습니다. 히구치 씨는 ‘데이비’였습니다. “싫어요. 12월 24일(크리스마스 이브) 출생이니 ‘이브’로 해줘요.”라고 반론하였습니다만 받아들여지진 않았습니다.

- 소속사 트라이앵글 프로덕션의 후지타 코이치 사장은 60년대 그룹사운드 밴드인 아웃캐스트에서 기타를 담당했다.

“이야기가 다르잖아요.” 멤버들은 후지타 사장에게 몇 번이나 호소했습니다. 하지만 “딥 퍼플도 사실은 재즈를 하고 싶었을 수도 있잖아. 하지만 지금은 록을 해야 할 수밖에 없는 걸지도 몰라.” 등 영문 모를 소리만 했습니다. 그리곤 “너희들은 베이 시티 롤러스 노선이다.”라고.

당시엔 영국 아이돌 그룹 베이 시티 롤러스가 일본에서 대인기였습니다. 후지타 사장은 그들의 영상 필름을 현지에서 구입해 일본 전국에서 필름 콘서트를 개최하여 거기서 번 돈으로 무언가를 하려던 찰나 레이지와 만났습니다. 그즈음부터 ‘일본판 베이 시티 롤러스’의 컨셉을 생각했겠지요.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후지타 사장은 하드록을 싫어했어요. 역시 그룹사운드 쪽 사람이었어요. 록을 싫어하니까 80년대 팝 스타일의 여름 노래인 스기야마 키요타카 & 오메가트라이브를 프로듀싱해서 대성공한 것이겠죠.

(2018년 7월 25일)

 

アイドル路線で売り出し 社長はハードロック嫌い|出世ナビ|NIKKEI STYLE

市場規模が膨らんだ「アニメソング(アニソン)」ビジネスの立役者の一人がバンダイナムコアーツの井上俊次副社長です。1970年代にロックバンド「レイジー」で一世を風靡しました。井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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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슈 카마야츠가 부모를 설득, 레이지로서 도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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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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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4회에선 레이지가 데뷔에 이르는 경위를 되돌아 봅니다.

이노우에 슌지 씨가 참가한 레이지는 1977년에 데뷔했다


- 도우미로서 가입한 레이지는 TV출연을 목표로 오디션에 응시한다.

1976년 11월, 칸사이 지방의 심야방송 ‘헬로 영’의 오디션을 받았습니다. 매주 오디션을 뚫은 아마추어 밴드가 연주할 수 있는 코너가 있었습니다.

오디션장은 오사카 히가시스미요시의 슈퍼마켓 앞이었습니다. 결과는 기쁘게도 합격. 저는 도우미였습니다. 오디션 후에는 레이지에서 빠질 생각이었습니다만 방송엔 같은 멤버로 나와야만 한다는 룰이 있어서 녹화가 있을 3~4개월 동안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방송 녹화장은 오사카 쥬소 인근의 스튜디오. 고등학교 친구들도 응원해주러 달려와 줬습니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당일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프로의 악기를 보고 ‘역시 대단하구나~’라고 감탄했었습니다.

연주는 한판승부로, 시험을 보는 기분이었습니다. 연주한건 딥 퍼플의 ‘BURN’. 가장 연주가 어렵기로 소문이 난 곡에 일부러 도전했었습니다. 연주 후, 사회자 중 한명이었던 카마야츠 히로시(무슈 카마야츠) 씨의 대기실에 불려갔습니다. 그리고 한마디. “너희들 도쿄에서 프로 활동하지 않겠니?”

- 카마야츠 씨가 오사카에서 가족들을 설득했다.

가족회의가 시작되었습니다. 다들 탓칸(타카사키 아키라)의 집에 집합했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부모님들은 대반대. 예능통이라는 소문이 있던 근처 아저씨한테 상담했습니다. 제 어머님은 “아들이 도쿄에 팔려간다.” 비슷한 기분이 들으셨다고 합니다. 그래도 카마야츠 씨께서 오사카로 와 설득해주신 것이 결정타가 되었습니다.

카마야츠 씨는 레이지를 하드록 밴드로 만들고 싶어 하셨습니다. “(영국 배드 컴퍼니의 보컬)폴 로저스에게 작곡받도록 하자. 작사는 폴의 일본인 부인에게 써달라고 하면 괜찮잖아. 록으로 하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해냈다. 우리들 록을 할 수 있어.”라며 모두들 아주 기뻐했습니다. 카마야츠 씨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긴 머리를 휘날리며, 다리에는 런던부츠를 신고 있었습니다.

데뷔가 정해지면서 도쿄 키타아오야마에 있던 소속사 트라이앵글 프로덕션에 인사하러 갔습니다. 그랬더니 “머리카락 좀 말끔하게 하고 와라.”라며 ‘PEEK-A-BOO’라는 유명한 미용실로 끌려갔습니다. 어떤 헤어스타일인지 조차도 알지 못한 채 싹둑. 우리들은 ‘아앗...’. 하드록도 런던부츠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일단 오사카로 돌아왔지만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면 부모님께서 깜짝 놀라실 것이기에 고민했습니다. 고향 JR 나가이 역에 도착해, 홈에서 마음을 진정시킨 후에야 귀가했던 기억이 납니다. ‘카마야츠 씨의 이야기랑 다르잖아‘. 불안하긴 했지만 이미 상경 날짜는 정해져 있었습니다.

(닛케이산업신문 2018년 7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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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우미로 참가한 ‘레이지’ 실력파로 인기를 얻다"

https://style.nikkei.com/article/DGXZZO60249180R10C20A6000000?channel=DF180320167079

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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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3회에선 카게야마 히로노부 씨의 요청으로 레이지에 참가한 경위를 밝힙니다.

도우미로 가입한 레이지 (1977년 데뷔 당시. 왼쪽에서 두번째가 본인)

- 1976년.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노우에 씨는 카게야마 히로노부 씨의 권유로 밴드 ‘LAZY’에 가입한다.

매일매일, 종일토록 카게야마 군과 놀았습니다. 집이 가까웠기에 함께 돌아가거나, 집에서도 전화로 2시간 정도 수다를 떨거나 했습니다. 신기하게도 서로 잘 맞았어요. 앞바구니에 원통 모양의 항아리 도시락을 실은 채 자전거를 타고 있던 카게야마군의 모습이 지금도 떠오릅니다.

학교 경음악부는 수준이 높지 않았기에 길게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카게야마군은 4인조 밴드를 조직해 그는 기타 겸 보컬, 저는 드럼을 맡았습니다. 하굣길엔 포크가수 카가와 료 씨의 노래에 등장하는 테즈카야마의 ‘하얀 집’이라는 이름의 작은 찻집에 틀어박혀서 음반을 들었습니다. 음악은 취미로서 프로가 될 마음은 전혀 없었습니다. 모두가 함께 음악을 하고 있는 고등학생 생활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1학년 여름 쯤, 레이지 멤버들을 데려온 카게야마 군으로부터 “도우미를 해줬으면 해.”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TV에 출연하는 오디션을 받아보고 싶다며. 드럼이 아닌 키보드 역할이었지만 “도우미 역할 뿐이라면.”라면서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레이지는 카게야마 군이 유치원이나 초등학생 시절부터 소꿉친구로 지내던 타카사키 아키라 씨, 타나카 히로유키 씨와 함께 결성한 마을 밴드였습니다. 그때까진 여자아이가 키보드를 담당했었지만 어째선지 도움을 요청받았습니다. 저와 같은 타이밍에 드럼으로 2살 위인 히구치 무네타카 씨가 가입했습니다. 당시엔 자세한 사정을 몰랐습니다만, 최근에서야 카게야마군의 저서에 “프로를 노리기 위해서 키보드와 드럼 멤버를 교체했다.”라고 쓰여 있어 ‘아, 그 때문이었구나’라며 알게 되었습니다.

- 오사카 현지에서 LAZY는 실력파로 알려져 있었다.

레이지에서 연주할 오르간을 좀처럼 찾지 못하고 있어 곤란해 하고 있을 때, 지인이 오사카 니혼바시에서 팔고 있다고 가르쳐주었습니다. ‘콤보 오르간’이라는 기종이 중고로 10만엔 정도. 오락실에서 라이브 연주하는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았습니다. 리어카 짐칸에 싣고 돌아왔습니다.

레이지는 엄청 뛰어났습니다. 해외 아티스트의 카피도 완벽. 같은 악곡이라도 유럽판이나 해적판 등의 버전도 연주해냈었습니다. 기타인 탓칸은(타카사키 아키라)의 자택에는 테이프를 재생하는 오픈릴이 있었습니다. 그의 집에 모여서 테이프에 녹음되어있는 악곡을 절반 정도의 속도로 재생하여 철저하게 카피했습니다.

딥 퍼플, 레인보우, 유라이어 힙. 브리티시 록의 음반을 닥치는 대로 사서 구석까지 카피했습니다. 딥 퍼플을 연주할 줄 알다니 대단하다는 평판이 퍼져서 단독라이브 때는 유료임에도 수백명 정도를 모을 수 있었습니다. 연주를 잘하는 것만을 생각했었습니다. 되돌아보면 이것이 후에 오리지널 곡을 만들지 못해 활동이 정체되는 요인 중 하나가 됩니다.

(닛케이산업신문 2018년 7월 23일)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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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HEM – Raging Twitster

작곡: 시바타 나오토
작사: 시바타 나오토, 사카모토 에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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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 star on the ground

浮かれきった街に その瞳をギラつかせ
우카레킷타 마치니 소노히토미오기라츠카세
들떠있는 거리에 그 눈동자를 번뜩여라

Dead cage ghetto son

にやけたアイツを この力でねじ伏せろ!
니야케타아이츠오 코노치카라데네지후세로
얼빠져있는 녀석을 그 힘으로 굴복시켜라

We're the voice you destinate

お前だけの Eternity
오마에다케노 Eternity
네 녀석만의 Eternity

We're the sound you activate

待ち焦がれた Infinity
마치코가레타 Infinity
애타게 기다린 Infinity

Souls cry on the hill

確かな気配を 身体に感じて走れ
타시카나케하이오 카라다니칸지테하시레
확실한 기척을 온몸에 느끼며 달려라

Dead lock spinning wheel

死にゆく時代に 誕生れた凱歌を 歌え!
시니유쿠지다이니 우마레타가이카오 우타에!
죽어가는 시대에 태어난 개선가를 불러라!

We're the voice you destinate

胸に掲げた Probity
무네니카카게타 Probity
가슴에 내걸은 Probity

We're the sound you activate

求め続けた Tensity
모토메츠즈케타 Tensity
계속 갈구해오던 Tensity

Come with me to the end

Raging twister howling your name
Higher power rising again
Gather under tower of fame
Raging twister blowing again


We're the voice you destinate

お前だけの Eternity
오마에다케노 Eternity
네 녀석만의 Eternity

We're the sound you activate

待ち焦がれた Infinity
마치코가레타 Infinity
애타게 기다린 Infinity

We're the voice you destinate

胸に掲げた Probity
무네니카카게타 Probity
가슴에 내걸은 Probity

We're the sound you activate

求め続けた Tensity
모토메츠즈케타 Tensity
계속 갈구해오던 Tensity

Come with me to the end

Raging twister howling your name
Higher power

Raging twister howling your name
Higher power rising again
Gather under tower of fame
Raging twister blowing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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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컬: 사카모토 에이조
베이스: 시바타 나오토
기타: 시미즈 아키오
드럼: 혼마 히로츠구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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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ZY – Young & Innocent

MUSIC 2020. 4. 16. 19:16

Young & Innocent

작사: 카게야마 히로노부
작곡: 카게야마 히로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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どれだけ 空を見上げても 輝く星は遠すぎる
도레다케 소라오미아게테모 카가야쿠호시와토오스기루
수없이 하늘을 올려다봐도, 반짝이는 별은 멀기만 하고

どれだけ 君に伝えても 心は癒えない
도레다케 키미니츠타에테모 코코로와이에나이
수없이 너에게 전해보아도, 마음은 나아지질 않아

この時代に 僕等は 何をすればいいんだろう
코노지다이니 보쿠라와 나니오스레바이인다로오
이 시대에 우리들은 무엇을 해야하는걸까

ただ 無機質で しらけた
타다 무키시츠데 시라케타
그저 무기질로 바래버린

手ごたえのない日々を 見つめてる
테고타에노나이히비오 미츠메테루
대답 없는 시절들을 바라보고있어

忘れたんじゃない 無くしてない
와스레탄쟈나이 나쿠시테나이
잊은 게 아니야 잃지 않아

無視してない だって そうだよ
무시시테나이 다앗테 소오다요
무시하지 않아 하지만 그렇잖아

いつも 僕等はここにいる
이츠모 보쿠라와코코니이루
언제나 우리는 여기에 있는걸

I wanna be with you
Be with you

ただ 君だけを 守りたいよ
타다 키미다케오 마모리타이요
그저 그대만을 지켜주고 싶어

Ai Ai Ai Ai Ai

愛を 愛だけを
아이오 아이다케오
사랑을 사랑만을

We are Young & Innocent


どれだけ 明日を祈っても 重ねた 罪は重すぎる
도레다케 아스오이노옷테모 카사네타 츠미와오모스기루
수없이 내일을 기도한들, 겹쳐진 죄는 무겁기만 해

どれだけ 君を愛しても 誰も救えない
도레다케 키미오아이시테모 다레모스쿠에나이
수없이 널 사랑한들, 아무도 구할 수 없어

今 世界は 僕等に 何を求めて いるんだろう
이마 세카이와 보쿠라니 나니오모토메테 이룬다로오
지금 이 세상은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걸까

ただ 一人で 遠くで なす術もない若さ 憎んでる
타다 히토리데 토오쿠데 나스베모나이와카사 니쿤데루
그저 혼자서 아득하며 어쩔 수 없는 젊음을 증오하고 있어

見えないんじゃない しらけてない
미에나인쟈나이 시라케테나이
안보이는게 아니야 방치한건 아니야

笑ってなんかないんだ
와랏테난카나이인다
비웃거나한건 아니야

今日も 僕等はここにいる
쿄오모 보쿠라와코코니이루
오늘도 우린 여기에 있는걸

I wanna be with you
Be with you

ただ 君のそばにいたいよ
타다 키미노소바니이타이요
그저 그대 옆에 있고 싶을 뿐이야

Ai Ai Ai Ai Ai

いつも いつまでも
이츠모 이츠마데모
언제나 언제까지나

We are Young & Innocent


そうだよ 僕等はけして 完成された人間じゃないから
소오다요 보쿠라와케시테 칸세이사레타닌겐쟈나이카라
맞아 우린 결코 완성된 인간이 아니니까

まだ 受け入れられないものがある
마다 우케이레라레나이모노가아루
아직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 있는거야

憎しみの雨に打たれ 水のない川をうつろにただ見つめて
니쿠시미노아메니우타레 미즈노나이카와오우츠로니타다미츠메테
증오의 비를 맞으며 물이 마른 강을 하염없이 바라봐

猛毒の陽射しの中
모도쿠노히자시노나카
맹독의 햇살 속에서

いったい 何ができるんだ……
잇타이 나니가데키룬다……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 거야……


忘れたんじゃない 無くしてない
와스레탄쟈나이 나쿠시테나이
잊은 게 아니야 잃진 않아

無視してない だってそうだよ
무시시테나이 다앗테소오다요
무시하지 않아 하지만 그렇잖아

いつも 僕等はここにいる
이츠모 보쿠라와코코니이루
언제나 우린 여기에 있는걸

見えないんじゃない しらけてない
미에나인쟈나이 시라케테나이
안보이는게 아니야 방치한건 아니야

笑ってなんかないんだ
와랏테난카나이인다
비웃거나한건 아니야

ずっと 僕等はここにいる
즈읏토 보쿠라와코코니이루
여전히 우린 여기에 있는걸

I wanna be with you
Be with you
Be with you

だって そうだよ 今日も僕等はここにいる
다앗테 소오다요 쿄오모보쿠라와코코니이루
하지만 그렇잖아 오늘도 우린 여기에 있는걸

I wanna be with you
Be with you

ただ君だけを守りたいよ
타다키미다케오마모리타이요
그저 그대만을 지켜주고 싶은걸

Ai Ai Ai Ai Ai

愛を 愛だけを
아이오 아이다케오
사랑을 사랑만을

We are Young & Innocent

We are Young & Innoc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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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컬 - 카게야마 히로노부
기타 - 다카사키 아키라
베이스 - 다나카 히로유키
드럼 - 히구치 무네타카
키보드 - 이노우에 슌지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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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곡

리메이크

Concerto Moon – Unstill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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闇の中に閉ざされた 明日を知らぬ勇者よ
야미노나카니토자사레타 아스오시라누유우샤요
어둠 속에 갇혀 버린 내일을 모르는 용사여

傷つくこの身体 もう止められない
키즈츠쿠코노카라다 모오토메라레나이
상처 입은 그 몸은 이제 멈출 수 없어

かりそめの幸せと 叶わぬこの願いを
카리소메노시아와세토 카나와누코노네가이오
잠시의 행복과 이뤄질 수 없는 그 소원을

Nothing could change my mind

僅かな記憶の片隅 宿命感じてる
와즈카나키오쿠노카타스미 슈쿠메이칸지테루
희미한 기억의 저편에서 숙명을 느끼고 있어

最後の叫びさえ 届くはずはない
사이고노사케비사에 토도쿠하즈와나이
최후의 외침조차 닿을 리가 없네

華やかなその未来が 必ず来るとしても
하나야카나소노미라이가 카나라즈쿠루토시테모
화려한 미래가 반드시 찾아온다한들

目の前に迫る暗闇の中には 映る物など何もない
메노마에니세마루쿠라야미노나카니와 우츠루모노나도나니모나이
눈앞에 다가오는 어둠속엔 비춰지는 건 아무것도 없네

Nothing could change my mind

I love you with all my life
Love is stronger than death
I'm fighting for you and me
The calm before the storm

I love you with all my life
Love is stronger than death
I'm fighting for you and me
The calm before the storm

Unstill night


Nothing doing! Now is time for action


Nothing could change my mind

華やかなその未来が 必ず来るとしても
하나야카나소노미라이가 카나라즈쿠루토시테모
화려한 미래가 반드시 찾아온다한들

目の前に迫る暗闇の中には 映る物など何もない
메노마에니세마루쿠라야미노나카니와 우츠루모노나도나니모나이
눈앞에 다가오는 어둠속엔 비춰지는 건 아무것도 없네

I love you with all my life
Love is stronger than death
I'm fighting for you and me
The calm before the storm

I love you with all my life
Love is stronger than death
I'm fighting for you and me
The calm before the storm

Unstill night

Nothing could change my mind

Now is time for a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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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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