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HEM 내한공연

SUBCULTURE 2024. 4. 2. 14:50

가야겠지.. 가야해..!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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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사카모토 에이조 씨 블로그 들어갔다가 봤어요..

저는 아마 갈 것 같은데, 그래도 많이들 와주셨으면...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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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UvK-D5Td_1E?si=jzcPmXH32I6QPVsJ

 

https://youtu.be/F7OstGf0pCA?si=rPFaQBCDHL7l7pKe

 

https://youtu.be/jZcxSteZL9Y?si=KkoOeEK58tHzW8Ax

 

인터뷰 재팬이란 곳과 인터뷰한 내용 간단히 요약

중구난방이어도 이해좀

 


- 1인 라이브
우선 경비가 크게 들지 않는다. BOWWOW의 야마모토 쿄지, SABER TIGER의 시모야마 타케노리도 이렇게 1인 라이브 순회를 하고 있다.

텅텅 빈 공연장을 보기도 하지만, 해야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

ANTHEM 시절 동료 후쿠다 히로야와 트윗캐스트를 이용한 인터넷 공연도 하고 있다. 코로나 기간 동안 무대에서 공연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에 뮤지션으로써 공포를 느꼈기 때문.

- 1인 매니지먼트
똑같은 장소에서 계속하면 신선미가 떨어진다. 또한 가게 사정상 공연을 하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 때문에 1년 주기로 같은 공연장을 찾고자 한다. 물론, 1년 후엔 공연장 측에서 더욱 잘팔리는 가수를 부르고 싶어할 수도 있다.

ANTHEM은 21세 때 가입했기에 이런 일을 할 일이 없었고 애니메탈 초기에도 매니저가 도맡아 했었다. 스스로 매니지먼트를 하기 시작한 것은 2천년대 이후로, 스스로 움직여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마이스페이스, 페이스북으로 해외와 소통하면서 남미도 다녀왔다.

물론 음악인은 다른 일에 신경쓰지 않고 자기 앞에 놓여진 일을 잘 요리하는게 제일 좋다.
그런 점에서 에이조는 스스로가 운이 좋다고 평한다. 대학 3학년 때 자기 능력을 시험해보기 위해서 ANTHEM의 오디션에 지원했고 합격했다. 완성도는 모리카와 유키오가 더욱 높았으나잠재력을 인정받았다. 마치 비기너즈 럭이었다. 기존 멤버들은 이미 밴드계에 몸담고 있던 이들이기에 그들을 거스르지 않고 따른 것이 성공으로 이어졌다.

사카모토 에이조가 스스로 꼽는 성공은 ANTHEM, 애니메탈, JAM Project 의 세가지.
ANTHEM 시절엔 리더 시바타 나오토,
애니메탈 시절엔 현재 GALNERYUS를 프로듀스하고 있는 히사타케 요리마사 프로듀서.
JAM Project 시절엔 "더욱 샤우팅하라"며 주문했던 란티스의 이노우에 슌지 사장과 리더 카게야마 히로노부가 지금을 자신을 만들어준 핵심인물이다.


- ANTHEM
좋은 걸 만들기 위해선 스스로를 지옥으로 몰아넣어야한다는 마인드가 있는 밴드. 에이조는 대학생 때 오디션에 붙었기 때문에 경력있는 다른 멤버들의 주문을 따라야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못한다고 말하기보단 일단 해보는 식으로 움직였다. 85년도에 앨범을 내고나선 바로 전국투어에 들어갔다. 산소결핍으로 관객이 쓰러지는 사고도 있었다. 하지만 꽉 찬 공연장에서 정신없이 살아가는 삶이 사회 초년생 에이조에겐 보통의 삶이었다.

81년 LOUDNESS를 시작으로, EARTHSHAKER, .44 MAGNUM, MARINO, 블리자드가 나왔고 85년이 ANTHEM, SHOW-YA, 세이키마츠. 에이조가 87년에 그만둘 때에 X와 DEAD END가 등장했다. 이 전성기를 고등 3학년부터 20대 초반에 겪었다. 에이조는 CONCERTO MOON이 10년, 6년 정도만 이르게 나타났어도 정말 대단했을거라 생각하기에 아쉬워했다.

당시는 투어의 연속이기에 판매량 등을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또한 신곡도 생각해야만 한다.

다른 사람과의 접촉도 피했었다. 젊었던 에이조는 ANTHEM이란 이름표를 때버리면 다른 아마추어 밴드들 앞에선 후배의 위치가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메이저 밴드의 보컬리스트란 태도를 갖추기 위해서 타인과의 접촉을 끊는 환경이 마련되었다.

이렇게 놀러나가지도 못하게 막았음에도 리더 시바타 나오토의 컨트롤은 대단했다. 따라서 에이조는 비즈니스를 생각할 일이 없었고, 당시에 행복하게 활동했었다.

- 현재의 ANTHEM
에이조가 있던 시기가 ANTHEM이라고 말하는 사람에겐 현재의 간판을 짊어지는 사람이 곧 ANTHEM이라고 답하고 싶다. 내가 없으면 안된다? 그럼 ANTHEM은 멈춰있을 것이다. 하지만 ANTHEM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 따라서 모리카와 유키오가 ANTHEM의 보컬이다.

보컬이 바뀐다고 극단적으로 바뀌는 밴드도 있다. 하지만 시바타 나오토는 보컬에 따라 어울리는 곡을 만들고 있다. 그렇게 시바타 나오토가 있는 이상 ANTHEM은 계속될거다.

모리카와 유키오 체제에서 나온 하드록 템포의 곡들은 부를 수 없다. 모리카와 유키오이기에 가능한 곡들.

2014년에 탈퇴했을 땐, 매번 향상을 꾀하는 밴드 속에서 자신이 더욱 대단한 것을 제시할 수 없다면 그만둬야한다고 여겼다.

- 애니메탈
ANTHEM을 그만두고 나선 안경점 사원을 1년을 했고, 이후엔 택시기사로 6년을 일했다.

형 둘이 애니메이션 오타쿠였기에 애니송이 어떤건지는 알고 있었다. ANTHEM을 그만둔 이후에도 영점프나 애니메이션 주제가 쪽으론 일이 있었다. 또한 애니메탈은 택시 드라이버를 하던 와중에 제의가 들어왔기에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막상 스탭들은 20대의 젊은 사람들이었기에 녹음할 때 디렉션도 주지 못했다. 기존에 없던 기획이라 어떻게 해야할 지도 몰랐기에 녹음은 사카모토 에이조가 직접 중심이 되었다.

녹음은 8월에 했지만 이후 말이 없다가 10월이 돼서야 보도자료가 나왔다. 본래는 펀하우스 계약이었으나 갑자기 소니로 옮겨지더니 바로 후속작 제작에 들어갔다.

이후 애니송 장르와 노래방 유행이 겹치면서 크게 성공했다. 정통파 보컬리스트인 사카모토 에이조 입장에선 노래방에서 바보처럼 괴성을 지르는 사람들이 자길 뒷받침해주게 될 지는 꿈에도 몰랐다. ANTHEM의 팬들은 싫어했다.

초기엔 택시 운전수 일을 병행했다,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면 그대로 택시를 몰고 인터뷰 장소로 이동했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해놓고 복장을 갈아입곤 했다.

애니메탈은 엄청 잘팔렸지만 투어의 괴로움은 ANTHEM과는 결이 달랐다. 똑같은 내용의 취재를 아침부터 밤까지 연속했기 때문. 그야말로 연예계 인사였다.
33세의 에이조는 질려했지만, 애니메탈 레이디를 하던 미이는 매번 똑같은 내용을 말해도 다른 식으로 대답을 해주는 등 프로의 모습을 보였다. “애니메이션 주제가 가수를 하고 싶었어!”라며 대중이 갖고 있는 이미지를 절대로 깨트리지 않았다.

다양한 일이 있었다. 금융계 운동회 공연, 공장직원의 가족들을 상대로 하는 공연 등. 메탈러가 맨 앞줄을 차지했기에 반가운 분위기가 되어 열심히 메탈공연에 임하면, 좀 더 ‘가족친화적인 공연을 해달라’는 주문이 들어왔다.

애니메탈은 온 힘을 쏟아붓기에 공연이 끝나면 하얗게 불타고 만다. 하지만 소니 소속이었고, 잘 팔렸기에, 업계인들에게 인사는 당연했으며, 뒷풀이까지 참석해야만 했다.

힘들었지만 잘나가는 연예인을 경험했기에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한번은 소니에서 밤에 방송하는 애니송 방송에 출연해달라는 주문을 받았었다. 막상 스튜디오에 가보니 대본도 없이 프리토크로 30분을 때워야했다. 솔직히 애니메이션에 자세한 사람은 아니기에 좋아하는 캐릭터를 말해달라는 질문에 대충 답했었다. 당시엔 젊고 잘나갔기 때문에 밴드 멤버나 프로듀서에게 건방진 태도를 보이곤 했었다. 지금은 반성하는 부분.

- 네리마 마초맨
87년 ANTHEM을 그만두고 난 뒤에 X JAPAN이 등장하며 이제 정통파 메탈로는 힘들겠다는 무드가 있었다.

에이조는 아마추어 계열을 경험해보지 않았기에 네리마 마초맨을 결성했다.

- 회사원
나이가 들어서 자신을 돌아보면 굉장히 무례했었다. 하지만 음악인인 에이조는 그걸 감수시킬만한 파워가 있었다. 따라서 이걸 고쳐야만 한다고 생각했기에 음악으로 잘 안되는 시기엔 회사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예전엔 TV에 나오지 못하면 연예인으로서 큰일나는 줄 아는 풍토가 있었고 아버지도 그랬다. 애니메탈로 TV에 나와서 아버지 앞에서 그나마 가슴을 펼 수 있었다.

ANTHEM을 그만두었을 당시엔 버블시대였다.
안경점에서 1년을 일했는데, 이걸 천직으로 삼아 10년 후에도 이 일을 계속할 생각은 없었다.
이후에도 트럭 운전, 택시 운전 등으로 먹고살 수 있었다. 2톤 트럭으론 사무용 가구를 옮겼다. 버블시대라 일이 계속 있었다. 이삿짐 센터에서 일할 땐 자기의 팬을 만난 적이 있었다. 고객이 자신을 어려워하니 이건 더는 못하겠다고 생각했었다. 학원강사도 했었는데 이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어뮤즈 종합학원과 요요기 애니메이션 학원에서 일할 수 있었다.

택시 운전수를 선택한 이유는 시간이 널널해서 음악활동을 하기 쉬웠어서. 그리고 멋있어 보였다. 뉴욕의 택시 운전사에 로망이 있었기에. 택시기사는 27세부터 5년간 했었다. 이후 99년에 다시 택시기사를 했었다.

20대 택시기사는 굉장히 젊은 편이었다. 또한 택시기사들 중엔 사연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부분의 회사는 장발 청년을 대부분 거절했으나 에이조가 일한 택시회사는 장발에 상관없이 일할 수 있을 정도로 느슨한 편이었다. 물론 무서워보이는 사람들도 많았다.

승객이 에이조를 알아보기 전에 미리 자신에 대해 밝혔었다. SIAM SHADE의 히데키가 탔던 적도 있었다. 히데키는 어린 시절 비주얼계 밴드들의 로드매니저를 했던 적이 있기에 네리마 마초맨을 알고있었다.

- JAM Project
2년 3개월만에 그만뒀었다. 당시엔 애니메탈, ANTHEM도 하고 있었기에 병행하기 어려웠었다. 그룹의 시작을 끊었기에 나름대로 충분히 할만큼 했다는 기분도 있었다. JAM Projec는 이후에 인기가 생기더니 부도칸(무도관)공연도 성사되었다.

에이조는 여러 분야에 걸친 스타일이지만 JAM Project는 애니송 하나에 전념하는 사람들. 이렇게 하나에만 몰두하는 사람들이 성공하는 걸 보면 부럽다는 기분이 든다. 물론 10주년 공연 땐 함께하기도 했다.

JAM Project 설립시에 카게야마 히로노부, 이노우에 슌지가 가졌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같은 마음으로 응해줄 수 없다는걸 깨닫고 그만두기로 한 것. 그룹단위로 움직이는 것은 개인단위로 움직이는 에이조와 맞지 않았다. 따라서 대형 공연을 성사시켰단 뉴스를 뜨면 보기 싫었었다.

뒤에서 노력하는 스타를 좋아하기에 카게야마 히로노부에게 많이 배웠다. 카게야마 히로노부는 의외로 독설가다. 하지만 그걸 직접 보는게 너무나도 행복했다. 브라운관에서나 보던 동경하던 사람이 갖는 어둠. 스타만이 보여줄 수 있는 어둠. 그걸 볼 수 있다는 점은 꿈이 이뤄진거나 마찬가지다.

- 50대
53, 54세 때에 일했던 회사는 음악활동이 금지되었다. 음악고문으로 오래 있어도 되겠지만 경영이 악화되면 자신이 잘릴 가능성도 적지않다고 생각, 그렇기에 나오기로 했다. 하지만 성대수술도 막 했었던 시기라 노래할 자신도 없었다. 의욕이 있는데도 잘되지 않아 힘들던 시기다. 요요기 학원에 지원했으나 불합격 되고 말았다.

그때 SABER TIGER의 시모야마 타케노리가 지방공연을 권유하여 노래를 하면서 목도 나아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그는 내 은인이기도 하다. 시모야마 타케노리가 공연한 라이브하우스나 가게에 다음 타자로 나를 부킹하는 식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재차 면접을 보곤 요요기 애니메이션 학원의 커리큘림 담당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수업에 맞는 선생의 배치 등을 맡았다. 코로나 시기를 지탱할 수 있어 도움이 되었다. 15세의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많은 걸 배웠다. 학생의 지루해하는 눈이 공부가 된다.

- 60대의 목표
지금껏 자신의 노래를 듣지 못했던 사람에게 노래를 들려주는 것
스페인어를 공부하는 이유도 남미 무대에서 스페인어로 노래를 불러서 남미에서 가수로 인정받기 위한 것

또한 장애인 지원 사업에도 흥미가 있어 준비하고 있다.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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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月の韓国2Daysの会場が決まりました。 | 『人生 雨奇晴好 Since 2019』坂本英三 (EIZO Sakamoto) Official blog (ameblo.jp)

 

『12月の韓国2Daysの会場が決まりました。』

12月の韓国2Daysの会場が決まりました。 EIZO FANTASIA 2023~2024 12/15 Fri 韓国・安養市 Purple Hall12/1…

ameblo.jp

 

2023년 12월 15일 금요일 안양 Purple Hall

애니메탈, 서양HR커버

 

2023년 12월 16일 토요일 용산 대원 컨텐츠 라이브

애니메탈, 애니송통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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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 애니송 열기를 펼치다. 시부야의 성지에서 벌일 마지막 큰일
style.nikkei.com/article/DGXZZO65988610Z01C20A1000000
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 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최종회 제24회에선 새로운 꿈을 밝힙니다.

회사에서 피아노를 연주 중인 이노우에 씨

- 애니송 해외전개에 힘을 쏟다.

 

7월 로스앤젤레스와 상하이에서 애니송 라이브 애니송 월드 축제를 개최했습니다. 로스앤젤레스는 3일간 마이크로소프트 극장에 17천명을 동원, 상하이 역시 1만장의 티켓이 당일 매진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러브라이브! 굿즈도 인기, 폭염으로 신용카드 리더가기 고장나는 문제도 있었지만, 많은 손님의 기뻐하는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계기는 2014. 노키아 시어터(현 마이크로소프트 극장)에서 보컬로이드 하츠네 미쿠의 라이브 감상회 때 회장의 열기에 압도되어 애니송으로 여기를 만석으로 하고 싶다라고. 그리고 2016년에 제1회를 개최했습니다. 올해 11월에는 뉴욕에서 첫 공연을 할 예정입니다. 경기장은 해머스타인 볼룸. 아레나 같은 대형 공간은 아니지만 노려라, 메디슨 스퀘어 가든의 기분입니다.

 

7월 두 공연에서 놀란 적이 있습니다. 출연자의 절반 이상이 현지어로 MC(연주간 토크)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티스트의 노력에 감동을 받았어요. JAM Project는 영어, 중국어, 포르투갈어, 힌디어와 각국의 언어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 다음 꿈, 시부야에 새로운 성지를 만드는 것

 

업계발전에 이 음악홀이 필요합니다. 한다면 시부야가 아니면 의미가 없습니다”. 2017년 봄 쯤, 술집에서 반다이 남코 홀딩스의 타구치 미츠아키 사장과 직접 담판을 지었습니다. 눈에 띄는 1000평짜리 땅을 보고서 여기밖에 없어요라고. ‘시부야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습니다.

 

마음에 둔 것은 시부야의 밤 풍경이었습니다. 라이브하우스인 시부야 eggman에서 나온 땀투성이의 젊은이들과, NHK홀에서 나와 공원거리를 미소를 띈 채 걸어가고 있는 부인의 모습. 시부야야말로 음악의 심볼이 되는 거리라고 실감했습니다.

 

최근에는 2000명 규모의 홀이 부족합니다. 수천명의 공연장을 만원으로 만드는 애니송 아티스트가 늘었습니다만, 실제로 거기에 다다르기까지가 매우 어렵습니다. 성공을 꿈꾸며 땀흘리는 분들이 노래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고 싶습니다. 레코딩 스튜디오도 설치되어 애니메이션 음악 뿐만 아니라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자립해나갈 장소입니다.

 

인생은 마지막에 결판이 난다고 생각합니다. LAZY가 해산한 1980년대부터 약 10년간, 저는 성과를 내지 못한 채 계속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란티스 창업 후에는 정신없이 일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인생을 돌아보면 그 10년도 포함하여 다양한 국면에서 만났던 사람들과의 인연이, 생각지도 못한 형태로 일로써 이어지고 있습니다. 신기한 느낌입니다.

 

시부야 프로젝트는 자세한 시설 상태를 포함해 검토 중입니다만, 연령적으로 제 마지막 큰일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회사에서 퇴직하면, 공연장에서 악기관리 스태프로 채용해주지 않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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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823)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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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에 애니송 문화를 발신, 정액제 청취 방송시동
style.nikkei.com/article/DGXZZO65751200S0A101C2000000?
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 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23회에선 정액제 청취 서비스 시작에 회상합니다.

7월, 중국에서 개최한 라이브 '애니송 월드 축제'에서도 JAM Project가 등장(중국 상하이)

- 란티스 창업 후 얼마되지않았던 2000, 실력파 애니송 가수들이 모인 JAM Project의 프로듀서를 맡게된다.

 

애니송 타이업 곡이 늘어나면서 미즈키 이치로 씨나 카게아마 히로노부 씨는 다음 세대에 진정한 애니송을 전하고 싶다라는 마음이 피어납니다. “포켓몬은 해외에서 대인기에요”. 기쁜 듯이 이야기하던 것은 포켓몬스터의 주제가를 부른 마츠모토 리카 씨. 해외에 먼저 가서, 문을 여는 유닛이 있어도 괜찮겠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닛명은 재팬 애니메이션송 메이커즈의 약자. 슬로건은 “150킬로의 공을 던지는 선수들을 모으자였습니다. 초기멤버는 미즈키 씨, 카게아마 씨, 마츠모토 씨, 엔도 마사아키 씨, 사카모토 에이조 씨. 지금과 다르게 주목도는 낮았고, 발족 기자회견에 모였던 기자는 10명 정도였습니다.

 

마침 로봇계의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이 많던 시기. 카게야마 씨가 지명된 일이 몇 개 있었습니다만, 발족 초기엔 죄송스럽게도 전부 JAM으로 돌렸습니다. 당시 작업했던 일 중 하나인 슈퍼로봇대전시리즈의 주제가는, 20년이 넘도록 계속하고 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애니송 쪽의 일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각자의 경위가 있어, 애니송에 구원받아 지금의 생활을 할수 있었습니다. JAM의 활동은 그러한 애니송에 대한 보은의 마음이 담겨있기에 그 열량이 대단합니다. 멤버들은 평균 50세를 넘었습니다만 귀찮을 정도로 파워풀합니다. 개런티는 등분이 되기에 N분의 1이 되어버립니다만.

 

애니메이션은 따뜻한 사람들의 모임이야”. 카게야마 씨와 자주 이야기합니다. 둘 다 제2의 음악 인생을 애니송한테 구원받았습니다. 우리가 뛰어들었던 연예계는 20세의 젊은이가 은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세계. 반면에 TV 애니메이션은 1쿨이 3개월. 실패해도 차례차례 기회가 돌아옵니다. 거기에 실패경험을 쌓지 않으면 히트곡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 2017, 전문 애니메이션송 정액제 서비스 아뉴타출범을 주도했다.

 

회사의 경계를 넘어 애니송 업계에 공헌합시다”. 2015, 애니메이션 마크로스시리즈에서 프로듀서를 맡은 플라잉 독의 사사키 시로 사장과 시부야의 선술집에서 의기투합했습니다. 스포티파이 등 자유로운 청취의 파도가 일본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아뉴타 구상의 시작입니다.

 

플라잉 독의 작은 회의실. 거기가 아뉴타의 사무실이 되었습니다. 20172월 첫 임원회의를 열어 신회사를 설립. KADOKAWA , 토호 씨, 포니캐넌 씨 등 업계의 10개사가 단결했습니다.

 

중국에서도 송신을 시작했습니다. 영상전달 서비스 비리비리와의 제휴입니다. 비리비리는 일본보다 싼 월 6위안(100)을 주장했습니다. 고민했지만 “6위안의 너머엔 많은 중국인 팬들이 있습니다”. 이 말로 납득을 하게 됩니다.

 

(2018822)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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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40주년, 동경하던 음악가에게 의뢰하다

style.nikkei.com/article/DGXZZO65455330W0A021C2000000?channel=DF180320167079

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 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22회에선 데뷔 40주년 기념 음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보물이라던 데이비드 포스터 씨와의 사진(왼쪽은 1987년 내일당시, 오른쪽은 2016년 산타모니카 스튜디오에서)

- 2017년에 데뷔 40주년을 맞이하는 카게야마 히로노부 씨와 기념앨범 제작을 시작했다.

 

카게야마 군은 이상한 사람으로, 무얼 하고 싶다고 말하지를 않습니다. 예전부터 그래왔기에 둘이서 식사를 하러 가면 맞는 게 없었습니다.

 

그런 카게야마 군한테 “40주년 앨범으로 이루고 싶은 꿈같은 건 있어?”라 물었더니 데이비드 포스터가 참가해주면 최고겠지라고. AOR(어덜트 오리엔티드 록) 장르로 우리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준 뮤지션. 1987년 내일시 찍어준 사진은 몸에서 떼지 않고 갖고 다니는 보물입니다.

 

처음엔 무리려나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20년 전 영어도 제대로 못 하면서 AOR에 대해 동경으로 애니메이션 기동신세기 건담 X’의 주제가를 로스앤젤레스에서 수록했을 당시에 신세를 졌던 분께서 데이비드 포스터 씨로 이어지는 인맥을 갖고 계셨던 겁니다. 그야말로 기적이었습니다.

 

그를 향한 마음을 전한 카게야마 군의 편지가 주효했을 겁니다. 카게야마 군이 직접 작곡한 데모 음원을 보내자, 자신이 그 곡을 어레인지하고 있는 모습이 동영상으로 보내졌습니다. ‘이건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라며 소름이 돋았습니다. 카게야마 군은 영어 작사에 도전했습니다. 다니고 있던 영어회화 선생님이 감수를 해주셨습니다.

 

녹음은 산타모니카 스튜디오. 개방적으로 맞이해줘서 놀랐습니다. 기계로 음정을 고치지 않는 전통적인 방식. 피치나 영어 발음에도 신경을 써주어 카게야마 군한테 몇 번이나 다시 부를 것을 지시했습니다. 10살이나 연상인 그의 음악제작에 대한 열정에 감동. 그리하여 앨범 ‘A. O. R’은 완성되었습니다.

 

- 레이지도 데뷔 40주년을 맞았다

20173, 카마야츠 히로시(무슈 카마야츠) 씨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사카의 TV 방송에서 데뷔할 기회를 주셨던 은인입니다. 5월의 송별회에서 재회했던 작사가 모리 유키노죠 씨. 40년 전에 우리들의 데뷔곡을 작사해주셨습니다.

 

모리 씨는 카게야마 군의 대표곡인 드래곤볼 Z’의 주제가 ‘CHA-LA HEAD-CHA-LA’를 작사해주셨습니다. 함께 있던 카게야마 군에게 항상 노래해주어 고마워라며 말을 걸어주셨습니다. 이 재회로 인해 40주년 기념 싱글은 모리 씨에게 작사를 부탁하기로 했습니다.

 

201712월에 발매한 싱글에 수록한 ‘Wandering Soul’은 이노우에 씨가 작곡했다.

이 노래는 언제나 영원히라는 구절로 시작됩니다. 이 부분은 제 고집이 들어갔는데, 녹음이 시작된 11월에 란티스와 반다이 비주얼의 통합화가 이미 수면 밑에서 진행되고 있었고, 우리는 20184월에 란티스 법인이 소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을 앞두고 긍정적인 멜로디와 노랫말로 직원들이나 팬들에게 마음을 전하는 노래입니다. ‘란티스의 혼은 언제나 영원. 언제까지라도 계속될 거야라고.

 

(2018821)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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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친구의 죽음에 충격 'LAZY'의 동료들을 떠나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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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 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21회에선 LAZY 멤버들의 잇따른 죽음을 돌아봅니다.

LAZY는 17년 만에 재결성된다

- 1981LAZY 해산 후, 이노우에 씨와 타나카 히데유키 씨는 네버랜드를 결성했다. 타카사키 아키라 씨와 히구치 무네타카 씨의 LOUDNESS는 일본의 하드록 씬을 견인. 카게야마 히로노부는 애니송 가수가 됐다.

 

1997, TV 방송 울트라맨 다이나의 음악 감독을 맡게 되었습니다. LAZY 멤버들은 울트라맨 세대. 재결성해서 엔딩곡을 만들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카게야마 군은 바로 흔쾌히 승낙. 히로유키는 당연히 괜찮아했을 테니 넘어가고, 연장자인 히구치 씨를 설득하러 갔습니다. 그가 단골로 드나들던 도쿄 시모키타자와의 선술집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재밌겠다. 하지만 탓칸(타카사키 아키라)이 뭐라고 말할진 모르겠는걸당시 히구치 씨는 라우드니스를 탈퇴하고 탓칸과 거리를 두던 상태였습니다.

 

다음으로 나선 곳은 롯폰기 프린스호텔의 바. 탓칸에게 사정을 설명하니 히구치는 뭐라던?” 어째선지 반말이었습니다. 떠들썩한 분위기였지만 히구치가 좋다면 좋아” “잘됐다라고 안심하며 히로유키에게 전화했더니 뜻밖에 나는 싫어란 대답. 결국, 처음에는 4명으로 재결성하고 나중에 히로유키가 가세했습니다. 17년 만의 재결성이었습니다.

 

해체 후 계속 만나지 않던 멤버도 있었는데, 다섯 명이 모이고 보니 과거의 레이지가 있었습니다. 나이를 먹어도 그 시절의 기분으로 돌아갈 수 있다니, 학교의 동아리 같아서 신기했습니다.

 

- 20069, 타나카 씨가 급서했다.

 

825일이 그의 생일이라서 축하하자고 모두 함께 이야기하던 참이었습니다. 연락을 준 것은 카게야마 군.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돌연사였습니다.

 

히로유키는 상냥한 사람이었습니다. 레이지 시절부터 합숙소에서 함께 살았고, 후에도 아파트에서 이웃사촌. 가장 돈이 없던 네버랜드 시대에도 함께 살았습니다. 침대에 휴대용 TV를 갖고 와, 보는 것은 언제나 영화 ET. 항상 울어버리니까 ET만 몇 번이나 보는 건데라며 태클을 걸기도 했던 정말로 순수한 남자였습니다.

 

- 2년 후, 히구치 씨가 간세포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등이 아프다라면서 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바로 입원. 고베의 큰 병원으로 갔어요. 투병 중에도 호쾌해서 문병하러 가면 신고베역에서 스테이크 도시락을 사줘치료로 머리가 빠지고, 몸이 야위어가도 평소의 쾌활한 히구치 씨였습니다. 침대 옆에는 자동차 잡지. 그때까진 스포츠카 밖에 타질 않았는데, “이제부턴 친환경이다. 퇴원하면 친환경 차량을 살까 생각해긍정적이었습니다.

 

떠나기 두, 세 달전, 둘이서 도쿄에 식사를 하러 갔습니다. 술도 담배도 끊었지만, 식욕은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조금 더 먹고 싶다라고 하여 세타가야 거리의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가게로. 한 손에 켄터키 치킨이 쥐어진 채 슌지, 고마워!”. 이게 마지막 모습이었어요.

 

(2018820)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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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다이 그룹에서 출자, 소속 아티스트도 40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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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20회에선 반다이 비주얼(현 반다이 남코 아츠)으로부터의 출자를 이야기합니다.

카와시로 씨(사진 왼쪽)의 말이, 반다이 남코 그룹 입성의 계기가 되었다

- 창업 2년째에 자본참가의 타진을 받았다.

 

다음에 사무실 가도 될까?” 전화의 상대방은 캐릭터 굿즈 등을 다루는 회사의 사장님이었습니다. 방문은 토요일. 창업 직후의 좁은 사무실을 둘러보며 아직 여섯자리 늘릴 수 있겠네. 우리가 출자할 테니 같이 해봄세

 

회사 멤버들에게 의견을 물었습니다. 당시의 란티스는 갓만들어진 벤처기업이었습니다. 산하에 들어감에 따라 회사가 어떻게 되어버릴지 잘 몰랐기에 불안이 앞섰습니다. 정말 고마우신 제안이셨습니다만 혼자만의 힘으로 자본금을 1000만엔에서 3000만엔으로 늘리는 길을 택했습니다.

 

이걸 어쩌지또 다른 불안도 있었습니다. 당시, 그 회사는 반다이 비주얼과 공동으로 사업에 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거절하면 반다이 비주얼과의 관계가 나빠지지 않을까하고 걱정했습니다.

 

불안을 불식하기 위해 반다이 비주얼을 방문했습니다. 그 자리에 나타난 것이 후에 사장으로 취임하는 카와시로 카즈미 씨.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라고 사정을 설명하자 카와시로 씨는 미소. “그건 말이죠, 이노우에 씨의 뜻을 제일 중요시 해도 괜찮습니다

 

몇 년 후, 란티스도 사업 확대의 전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자사의 레코딩 스튜디오를 만들기 위해 약 1억엔을 차입했습니다만, 사원들은 더 많은 애니메이션 작품에 투자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대로 단독 노선을 계속해도 자금 부족에 빠지는 것은 분명합니다. 상장도 선택지에 있었습니다만 주식공개로 고생하고 있는 회사도 알고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반다이 비주얼 카와시로 씨에게 물었습니다. “뜻을 소중히라는 말이 마음에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다이 비주얼도 음악 사업으로의 진출을 모색하고 있던 무렵이었습니다. 이때는 회사 멤버들의 의견도 일치했습니다. 2006, 51%의 출자를 받았습니다.

 

반다이 비주얼 산하에서, 란티스는 어른의 계단을 올랐습니다. 확실한 룰 아래 사원을 존중하는 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까진 규칙이 없는 상태였으니까요. 직원들한텐 좋은 결단이 아니었을까요.

 

- 출자를 받은 뒤에도 은 변하지 않았다.

 

2009년에 10년 동안 계속되어왔던 킹레코드와의 판매계약이 종료해, 반다이 비주얼로 계약처를 바꾸었습니다. 그때 건방지게도 우리는 새로운 레이블을 만들어 애니플렉스와 제네온 엔터테인먼트(당시)에 각각 판매 계약을 맺었습니다.

 

란티스에는 40팀의 아티스트가 있었습니다. 반다이 비주얼이 1쿨에 만드는 애니메이션은 2, 3. 그것만으로는 겨우 8팀 밖에 못 부릅니다. 아티스트가 노래할 장소를 확보하려면 자본 관계에 얽메이지 않고 애니메이션과의 접점을 가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아티스트가 노력해서 앨범을 만들고 라이브를 연다.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2018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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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고 노래하는 성우라이브, 애니송이벤트의 저변이 넓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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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19회에선 애니송라이브가 저변을 넓혀가던 시기를 돌아봅니다.

등장인물을 맡은 9명의 성우가 실제 라이브에서도 노래하고 춤추는 프로젝트 러브라이브!

- 2010, 애니메이션과 음악을 융합한 러브라이브!’시리즈가 시작된다. 9명의 여고생이 아이돌 활동에 힘쓰는 내용으로, 출연 성우가 애니메이션과 똑같이 춤을 추고 노래를 하는 라이브로 도쿄돔 만원에 성공할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처음 프로젝트에 대해 들었던 것은 애니메이션 제작을 맡은 선라이즈의 히라야마 사토시 프로듀서로부터입니다. 인기 아이돌에, 애니메이션과 게임 요소를 하나로 묶는다. 그리고 애니메이션 뮤직비디오를 CD와 함께 전개하는 아이디어였습니다. ‘기동전사 건담시리즈 등을 다루던 선라이즈가 모에계열에 자신 있는 란티스와 조합한다는 것에 재미를 느꼈습니다.

 

하지만, 당초엔 CD를 발매해도 팔리는 건 1000장 정도. 그런데도 관계자는 정열을 쏟았기에 회사 측에서도 좋은 의미에서 방치를 했습니다. 거기서 누군가가 영감을 떠올렸죠. “캐스트에게 애니메이션과 똑같은 댄스를 추게하는건 어떨까요?” 요코하마 블릿츠에서의 라이브를 계획 중에 매력적인 제안이었습니다. 노래만큼은 만들어 낼 수 있었으므로, 공연을 결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요코하마에서의 공연을 거쳐 캐스트가 애니메이션과 싱크로하여 춤추고 노래한다는 라이브 스타일이 정착해갔습니다.

 

- 대규모 애니송 라이브 개최도 늘어갔다. 2005년에 애니멜로 섬머 라이브’, 2009년에 애니맥스 뮤직스’, 2010년에 리스아니! 라이브가 시작. 애니송은 음악 장르의 하나로서 정착한다.

 

혼자 즐기는 이벤트였던 애니송 라이브가 친구들과 함께 즐기는 이벤트가 되어갔습니다. 애니송의 이미지가 바뀌어서 친구를 끌어들이기 쉬워졌고, 인터넷의 보급으로 팬들간의 교류가 생겨났기 때문일까요.

 

4명의 여성그룹 스피어의 라이브 공연장에서 앙케이트로 그 외에 좋아하는 아티스트는?’라는 답변으로 제일 많았던 것이 카게야마 군이 결성했던 하드 계열 ‘JAM Project’. 타입이 정반대인 그룹입니다. 의외의 결과였지만 애니송의 인기란 이런거려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애니송은 모두가 응원하는 문화. 아티스트가 달라도 고객층까지 다른 건 아니죠.

 

- 창업 10주년을 맞은 2009, 소속 아티스트가 한자리에 모이는 란티스 마츠리를 열었다.

 

후지큐 하이랜드 코니퍼 포레스트에서 이틀간 야외 라이브를 했습니다. 아키하바라에서 야마나시까지 임시 직행열차를 달리게 했습니다. 이틀째는 억수같이 퍼붓는 비. 레이지도 청춘의 한곡인 ‘BURN’을 연주한 후, 마지막엔 불꽃놀이를 했습니다. 온몸이 흙투성이였지만 야외 괜찮네. 즐거워라고 사원들과 함께 분위기가 고조되었습니다.

 

(2018816)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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