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ZY - ROCK ON ME

MUSIC 2021. 6. 22. 20:54

 

LAZY - ROCK ON ME

 

작사: 카게야마 히로노부

작곡: 이노우에 슌지, 카게야마 히로노부

편곡: LA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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んなったって関係無

타반낫탓테칸케이네에

묶음 취급받아도 관계없어

 

マネーんだって関心無

마네-츤닷테칸신네에

돈을 쌓는들 관심없어

 

名前売ったって 快感無

나마에웃탓테 카이칸네에

이름을 팔아봤자 쾌감없어

 

Oh I’m so bad

 

フリースタイルだって いいじゃんねえ

후리-스타이루닷테 이이쟈네에

프리스타일이라도 괜찮지않겠어

 

アメリカンばっか No more でえ

아메리칸밧카 No more 데에

미국인만하는건 No more 인거야

 

流行りもんなんて うんざりでえ

하야리몬난테 운자리데

유행따윈 질려서

 

I’m feeling down


無神論だって問題無

무신론닷테몬다이네에

무신론은 문제없어

 

日本人だって特権無

니혼진닷테톳켄네에

일본인이라고 특권없어

 

アラブだって偏見無

아라푸카이닷테헨켄네에

아랍계라고 편견없어

 

HEYShake your hands

 

波乱万丈40

하란반죠데40

파란만장한 40!

 

Never give up!!

 

まだ けねえ

마다 마케네에

아직 지지않았어!

 

Put yo hands upRaise you hands up

 

Get upStand up

 

あきらめねえ

아키라메네에

포기하지않아!

 

Rock on me

Going on my way

 

ありふれた もう いたくないぜ

아리후레타우타와 모오 우타이타쿠나이제

흔해빠진 노래는 더 이상 부르고 싶지않아

 

世界今日 しみのChain reaction

세카이와쿄오모 니쿠시미노Chain reaction

세상은 오늘도 증오의 Chain reaction

 

連鎖るんだ!!

렌사오타치키룬다!!

연쇄를 끊는거다!!

 

すぐに

이마스구니

지금 당장

 

価値観繰替えろ

카치칸오쿠리카에로

가치관을 바꿔라

 

すぐに

이마스구니

지금 당장

 

Everybody want

Everybody need

Everybody want some love……

 

 

地雷踏んだって Don’t know why

지라이훈닷테 Don’t know why

지뢰를 밟은들 Don’t know why

 

危険いっぱいじゃ Don’t know why

키켄잇바이쟈 Don’t know why

위험이 가득한들 Don’t know why

 

議員さんなんて そんなもんで

기인상난테 손나몬데

위원님들이란 원래 그러니

 

Oh It’s too bad

 

孤軍奮闘40

코군훈토우데40

고군분투한 40!

 

Never say Yes!!

 

まだ やめねえ

마다 야메네에

아직 그만두지않아!

 

Put yo hands upRaise you hands up

 

Say noSay no

 

されねえ

다마사레네에

속지않겠어!

 

Rock on me

Going on my way

 

いラブソングは もう きたくもないぜ

아마이라브송구와 모오 키키타쿠모나이제

달아빠진 러브송따윈 이젠 듣고 싶지도 않아

 

テレビじゃ今日 Genocide

테레비쟈쿄오모 쿠리카에스Genocide

텔레비전에선 오늘도 반복되는 Genocide

 

しみを るんだ

니쿠시미오 타치키룬다

증오를 끊어내는거야

 

すぐに

이마스구니

지금 당장

 

偽善者 あふり

기젠샤오 아후리다세

위선자를 색출하라

 

すぐに

이마스구니

지금 당장

 

Everybody want

Everybody need

Everybody want some love……

 

 

Rock on me

Going on my way

 

末期びは きたくもないぜ!!

마츠고노사케비와 키키타쿠모나이제!!

최후의 울부짖음은 듣고싶지도 않아!!

 

かとともに らぬ かと

다레카토토모니 나모시라누 다레카토

누군가와 함께 이름도 모를 누군가와

 

未来るんだ

미라이오카치토룬다

미래를 쟁취하는거다

 

すぐに

이마스구니

지금 당장

 

エゴイズムをてろ

에고이즈무오누기스테로

이기심을 벗어던져라

 

すぐに

이마스구니

지금 당장

 

Everybody want

Everybody need

Everybody want some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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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컬 - 카게야마 히로노부

기타 - 타카사키 아키라

베이스 - 타나카 히로유키

드럼 - 히구치 무네타카

키보드 - 이노우에 슌지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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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 애니송 열기를 펼치다. 시부야의 성지에서 벌일 마지막 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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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 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최종회 제24회에선 새로운 꿈을 밝힙니다.

회사에서 피아노를 연주 중인 이노우에 씨

- 애니송 해외전개에 힘을 쏟다.

 

7월 로스앤젤레스와 상하이에서 애니송 라이브 애니송 월드 축제를 개최했습니다. 로스앤젤레스는 3일간 마이크로소프트 극장에 17천명을 동원, 상하이 역시 1만장의 티켓이 당일 매진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러브라이브! 굿즈도 인기, 폭염으로 신용카드 리더가기 고장나는 문제도 있었지만, 많은 손님의 기뻐하는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계기는 2014. 노키아 시어터(현 마이크로소프트 극장)에서 보컬로이드 하츠네 미쿠의 라이브 감상회 때 회장의 열기에 압도되어 애니송으로 여기를 만석으로 하고 싶다라고. 그리고 2016년에 제1회를 개최했습니다. 올해 11월에는 뉴욕에서 첫 공연을 할 예정입니다. 경기장은 해머스타인 볼룸. 아레나 같은 대형 공간은 아니지만 노려라, 메디슨 스퀘어 가든의 기분입니다.

 

7월 두 공연에서 놀란 적이 있습니다. 출연자의 절반 이상이 현지어로 MC(연주간 토크)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티스트의 노력에 감동을 받았어요. JAM Project는 영어, 중국어, 포르투갈어, 힌디어와 각국의 언어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 다음 꿈, 시부야에 새로운 성지를 만드는 것

 

업계발전에 이 음악홀이 필요합니다. 한다면 시부야가 아니면 의미가 없습니다”. 2017년 봄 쯤, 술집에서 반다이 남코 홀딩스의 타구치 미츠아키 사장과 직접 담판을 지었습니다. 눈에 띄는 1000평짜리 땅을 보고서 여기밖에 없어요라고. ‘시부야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습니다.

 

마음에 둔 것은 시부야의 밤 풍경이었습니다. 라이브하우스인 시부야 eggman에서 나온 땀투성이의 젊은이들과, NHK홀에서 나와 공원거리를 미소를 띈 채 걸어가고 있는 부인의 모습. 시부야야말로 음악의 심볼이 되는 거리라고 실감했습니다.

 

최근에는 2000명 규모의 홀이 부족합니다. 수천명의 공연장을 만원으로 만드는 애니송 아티스트가 늘었습니다만, 실제로 거기에 다다르기까지가 매우 어렵습니다. 성공을 꿈꾸며 땀흘리는 분들이 노래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고 싶습니다. 레코딩 스튜디오도 설치되어 애니메이션 음악 뿐만 아니라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자립해나갈 장소입니다.

 

인생은 마지막에 결판이 난다고 생각합니다. LAZY가 해산한 1980년대부터 약 10년간, 저는 성과를 내지 못한 채 계속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란티스 창업 후에는 정신없이 일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인생을 돌아보면 그 10년도 포함하여 다양한 국면에서 만났던 사람들과의 인연이, 생각지도 못한 형태로 일로써 이어지고 있습니다. 신기한 느낌입니다.

 

시부야 프로젝트는 자세한 시설 상태를 포함해 검토 중입니다만, 연령적으로 제 마지막 큰일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회사에서 퇴직하면, 공연장에서 악기관리 스태프로 채용해주지 않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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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823)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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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40주년, 동경하던 음악가에게 의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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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 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22회에선 데뷔 40주년 기념 음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보물이라던 데이비드 포스터 씨와의 사진(왼쪽은 1987년 내일당시, 오른쪽은 2016년 산타모니카 스튜디오에서)

- 2017년에 데뷔 40주년을 맞이하는 카게야마 히로노부 씨와 기념앨범 제작을 시작했다.

 

카게야마 군은 이상한 사람으로, 무얼 하고 싶다고 말하지를 않습니다. 예전부터 그래왔기에 둘이서 식사를 하러 가면 맞는 게 없었습니다.

 

그런 카게야마 군한테 “40주년 앨범으로 이루고 싶은 꿈같은 건 있어?”라 물었더니 데이비드 포스터가 참가해주면 최고겠지라고. AOR(어덜트 오리엔티드 록) 장르로 우리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준 뮤지션. 1987년 내일시 찍어준 사진은 몸에서 떼지 않고 갖고 다니는 보물입니다.

 

처음엔 무리려나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20년 전 영어도 제대로 못 하면서 AOR에 대해 동경으로 애니메이션 기동신세기 건담 X’의 주제가를 로스앤젤레스에서 수록했을 당시에 신세를 졌던 분께서 데이비드 포스터 씨로 이어지는 인맥을 갖고 계셨던 겁니다. 그야말로 기적이었습니다.

 

그를 향한 마음을 전한 카게야마 군의 편지가 주효했을 겁니다. 카게야마 군이 직접 작곡한 데모 음원을 보내자, 자신이 그 곡을 어레인지하고 있는 모습이 동영상으로 보내졌습니다. ‘이건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라며 소름이 돋았습니다. 카게야마 군은 영어 작사에 도전했습니다. 다니고 있던 영어회화 선생님이 감수를 해주셨습니다.

 

녹음은 산타모니카 스튜디오. 개방적으로 맞이해줘서 놀랐습니다. 기계로 음정을 고치지 않는 전통적인 방식. 피치나 영어 발음에도 신경을 써주어 카게야마 군한테 몇 번이나 다시 부를 것을 지시했습니다. 10살이나 연상인 그의 음악제작에 대한 열정에 감동. 그리하여 앨범 ‘A. O. R’은 완성되었습니다.

 

- 레이지도 데뷔 40주년을 맞았다

20173, 카마야츠 히로시(무슈 카마야츠) 씨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사카의 TV 방송에서 데뷔할 기회를 주셨던 은인입니다. 5월의 송별회에서 재회했던 작사가 모리 유키노죠 씨. 40년 전에 우리들의 데뷔곡을 작사해주셨습니다.

 

모리 씨는 카게야마 군의 대표곡인 드래곤볼 Z’의 주제가 ‘CHA-LA HEAD-CHA-LA’를 작사해주셨습니다. 함께 있던 카게야마 군에게 항상 노래해주어 고마워라며 말을 걸어주셨습니다. 이 재회로 인해 40주년 기념 싱글은 모리 씨에게 작사를 부탁하기로 했습니다.

 

201712월에 발매한 싱글에 수록한 ‘Wandering Soul’은 이노우에 씨가 작곡했다.

이 노래는 언제나 영원히라는 구절로 시작됩니다. 이 부분은 제 고집이 들어갔는데, 녹음이 시작된 11월에 란티스와 반다이 비주얼의 통합화가 이미 수면 밑에서 진행되고 있었고, 우리는 20184월에 란티스 법인이 소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을 앞두고 긍정적인 멜로디와 노랫말로 직원들이나 팬들에게 마음을 전하는 노래입니다. ‘란티스의 혼은 언제나 영원. 언제까지라도 계속될 거야라고.

 

(2018821)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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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친구의 죽음에 충격 'LAZY'의 동료들을 떠나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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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 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21회에선 LAZY 멤버들의 잇따른 죽음을 돌아봅니다.

LAZY는 17년 만에 재결성된다

- 1981LAZY 해산 후, 이노우에 씨와 타나카 히데유키 씨는 네버랜드를 결성했다. 타카사키 아키라 씨와 히구치 무네타카 씨의 LOUDNESS는 일본의 하드록 씬을 견인. 카게야마 히로노부는 애니송 가수가 됐다.

 

1997, TV 방송 울트라맨 다이나의 음악 감독을 맡게 되었습니다. LAZY 멤버들은 울트라맨 세대. 재결성해서 엔딩곡을 만들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카게야마 군은 바로 흔쾌히 승낙. 히로유키는 당연히 괜찮아했을 테니 넘어가고, 연장자인 히구치 씨를 설득하러 갔습니다. 그가 단골로 드나들던 도쿄 시모키타자와의 선술집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재밌겠다. 하지만 탓칸(타카사키 아키라)이 뭐라고 말할진 모르겠는걸당시 히구치 씨는 라우드니스를 탈퇴하고 탓칸과 거리를 두던 상태였습니다.

 

다음으로 나선 곳은 롯폰기 프린스호텔의 바. 탓칸에게 사정을 설명하니 히구치는 뭐라던?” 어째선지 반말이었습니다. 떠들썩한 분위기였지만 히구치가 좋다면 좋아” “잘됐다라고 안심하며 히로유키에게 전화했더니 뜻밖에 나는 싫어란 대답. 결국, 처음에는 4명으로 재결성하고 나중에 히로유키가 가세했습니다. 17년 만의 재결성이었습니다.

 

해체 후 계속 만나지 않던 멤버도 있었는데, 다섯 명이 모이고 보니 과거의 레이지가 있었습니다. 나이를 먹어도 그 시절의 기분으로 돌아갈 수 있다니, 학교의 동아리 같아서 신기했습니다.

 

- 20069, 타나카 씨가 급서했다.

 

825일이 그의 생일이라서 축하하자고 모두 함께 이야기하던 참이었습니다. 연락을 준 것은 카게야마 군.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돌연사였습니다.

 

히로유키는 상냥한 사람이었습니다. 레이지 시절부터 합숙소에서 함께 살았고, 후에도 아파트에서 이웃사촌. 가장 돈이 없던 네버랜드 시대에도 함께 살았습니다. 침대에 휴대용 TV를 갖고 와, 보는 것은 언제나 영화 ET. 항상 울어버리니까 ET만 몇 번이나 보는 건데라며 태클을 걸기도 했던 정말로 순수한 남자였습니다.

 

- 2년 후, 히구치 씨가 간세포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등이 아프다라면서 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바로 입원. 고베의 큰 병원으로 갔어요. 투병 중에도 호쾌해서 문병하러 가면 신고베역에서 스테이크 도시락을 사줘치료로 머리가 빠지고, 몸이 야위어가도 평소의 쾌활한 히구치 씨였습니다. 침대 옆에는 자동차 잡지. 그때까진 스포츠카 밖에 타질 않았는데, “이제부턴 친환경이다. 퇴원하면 친환경 차량을 살까 생각해긍정적이었습니다.

 

떠나기 두, 세 달전, 둘이서 도쿄에 식사를 하러 갔습니다. 술도 담배도 끊었지만, 식욕은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조금 더 먹고 싶다라고 하여 세타가야 거리의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가게로. 한 손에 켄터키 치킨이 쥐어진 채 슌지, 고마워!”. 이게 마지막 모습이었어요.

 

(2018820)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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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고 노래하는 성우라이브, 애니송이벤트의 저변이 넓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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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19회에선 애니송라이브가 저변을 넓혀가던 시기를 돌아봅니다.

등장인물을 맡은 9명의 성우가 실제 라이브에서도 노래하고 춤추는 프로젝트 러브라이브!

- 2010, 애니메이션과 음악을 융합한 러브라이브!’시리즈가 시작된다. 9명의 여고생이 아이돌 활동에 힘쓰는 내용으로, 출연 성우가 애니메이션과 똑같이 춤을 추고 노래를 하는 라이브로 도쿄돔 만원에 성공할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처음 프로젝트에 대해 들었던 것은 애니메이션 제작을 맡은 선라이즈의 히라야마 사토시 프로듀서로부터입니다. 인기 아이돌에, 애니메이션과 게임 요소를 하나로 묶는다. 그리고 애니메이션 뮤직비디오를 CD와 함께 전개하는 아이디어였습니다. ‘기동전사 건담시리즈 등을 다루던 선라이즈가 모에계열에 자신 있는 란티스와 조합한다는 것에 재미를 느꼈습니다.

 

하지만, 당초엔 CD를 발매해도 팔리는 건 1000장 정도. 그런데도 관계자는 정열을 쏟았기에 회사 측에서도 좋은 의미에서 방치를 했습니다. 거기서 누군가가 영감을 떠올렸죠. “캐스트에게 애니메이션과 똑같은 댄스를 추게하는건 어떨까요?” 요코하마 블릿츠에서의 라이브를 계획 중에 매력적인 제안이었습니다. 노래만큼은 만들어 낼 수 있었으므로, 공연을 결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요코하마에서의 공연을 거쳐 캐스트가 애니메이션과 싱크로하여 춤추고 노래한다는 라이브 스타일이 정착해갔습니다.

 

- 대규모 애니송 라이브 개최도 늘어갔다. 2005년에 애니멜로 섬머 라이브’, 2009년에 애니맥스 뮤직스’, 2010년에 리스아니! 라이브가 시작. 애니송은 음악 장르의 하나로서 정착한다.

 

혼자 즐기는 이벤트였던 애니송 라이브가 친구들과 함께 즐기는 이벤트가 되어갔습니다. 애니송의 이미지가 바뀌어서 친구를 끌어들이기 쉬워졌고, 인터넷의 보급으로 팬들간의 교류가 생겨났기 때문일까요.

 

4명의 여성그룹 스피어의 라이브 공연장에서 앙케이트로 그 외에 좋아하는 아티스트는?’라는 답변으로 제일 많았던 것이 카게야마 군이 결성했던 하드 계열 ‘JAM Project’. 타입이 정반대인 그룹입니다. 의외의 결과였지만 애니송의 인기란 이런거려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애니송은 모두가 응원하는 문화. 아티스트가 달라도 고객층까지 다른 건 아니죠.

 

- 창업 10주년을 맞은 2009, 소속 아티스트가 한자리에 모이는 란티스 마츠리를 열었다.

 

후지큐 하이랜드 코니퍼 포레스트에서 이틀간 야외 라이브를 했습니다. 아키하바라에서 야마나시까지 임시 직행열차를 달리게 했습니다. 이틀째는 억수같이 퍼붓는 비. 레이지도 청춘의 한곡인 ‘BURN’을 연주한 후, 마지막엔 불꽃놀이를 했습니다. 온몸이 흙투성이였지만 야외 괜찮네. 즐거워라고 사원들과 함께 분위기가 고조되었습니다.

 

(2018816)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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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한 애니메이션에 어울리는 애니송을- 창업을 결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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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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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14회에선 애니송 음반회사 설립에 대해 밝힙니다.

'기동신세기 건담 X'의 엔딩곡 '휴먼터치'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녹음되었다

- 1995년, 식스티 뮤직 네트워크가 경영 부진으로.

“이노우에 군도 함께 하자” 식스티가 해산할 무렵, 반다이와 아뮤즈가 공동으로 신설한 음반 회사 에어즈에 권유 받았습니다. 그 밖에도 대형 오퍼들이 왔기에 망설였었습니다. 결정타는 식스티에서 친한 사이였던 경리 담당의 키카와 히토미 씨. 그녀가 에어즈로 입사하기로 정했다는 이야길 듣고 “키카와 씨가 간다면, 나도 가볼까”

- 에어즈는 ‘울트라맨 티가’ 등의 울트라맨 시리즈나 TV 애니메이션 ‘신기동세기 건담 X’의 엔딩곡을 담당헀다.

애니메이션 제작 담당인 선라이즈에서 프로듀서인 우에다 마스오 씨(애니플렉스 전 사장)을 만났습니다. “테마는 사랑. 외국인이 부르도록 합시다. 이노우에 군이 미국에서 녹음해와주세요” 동행한 사장의 지원도 있었기에 로스앤젤레스에서 녹음하기로 정해졌습니다.

‘작사, 작곡, 뮤지션까지 전부 외국인으로 구성해서 본격 서양음악을 만들어주지’ 레이지 시절 에어플레이의 음반을 들은 이래, 어덜트 오리엔티드 락(AOR) 장르를 항상 꿈꿔왔습니다. 키카와 씨한테서 건네받은 현금을 움켜쥔 채 단신으로 미국행. 영어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기에 고생했지만, 이 경험이 약 20년 후에 기적을 일으킵니다.

“반드시 하게 해주세요” 그렇게 부탁한 것은 만화 ‘사일런트 뫼비우스’의 TV 애니메이션이었습니다. 과거 이미지 송을 제작한 인연으로 ‘나 밖에 할 수 없잖아’라고 생각했습니다. 애니메이션의 기획제작을 맡은 반다이 비주얼을 방문하여 이미지 송의 실적이나 아사미야 키아 선생님과의 신뢰관계를 주장하여 음악 프로듀서를 맡았습니다.

- 1999년, 에어즈는 사업을 중지한다.

당시에는 아티스트와의 타이업이 급증하여, ‘진정한 애니송’이라 부를만한 작품은 적어지고 있었습니다. 세간에선 애니노래라면 ‘우주전함 야마토’의 사사키 이사오 씨 등의 베테랑 가수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드래곤볼Z’ 주제가를 부른 카게야마 군조차 라이브에선 충분한 관객을 모으지 못했습니다.

TV 애니메이션의 심야방송이 시작되면서, 제작현장에서도 박력과 스피드감 있는 영상표현이 실현되었습니다. 이러한 애니메이션의 진화에 애니송은 따라가지 못하는 인상이었습니다. 애니송 장르가 충분히 스며들지 못한 채, 재능 있는 뮤지션이나 크리에이터가 모이기 어려웠습니다.

‘지금 시대에 맞는 애니송을 만들고 싶다’-. 에어즈 퇴사 후, 애니메이션 음악을 중심으로 한 음반 회사를 차리기로 결심했습니다. 찬동하고 있던 것은 에어즈의 동료였던 이토 요시유키 씨와 마츠무라 키요코, 그리고 경리 담당의 키카와 씨까지 세 명. 드디어, 란티스의 창업입니다.

(2018년 8월 7일)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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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소에서 독립, 별안간 무급이 되어 밴드해체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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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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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12회에선 새로운 밴드의 해체로 인해 힘든 시기로 내몰렸던 시기를 되돌아 봅니다.

네버랜드 해체 후 결성한 휴먼네이처의 멤버들(오른쪽 끝이 본인)

- 1980년대 중반. LAZY 출신의 타카사키 아키라 씨와 히구치 무네타카 씨가 결성한 LOUDNESS는 미국 뉴욕에서 라이브 공연을 열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었다. 한편, 이노우에 씨가 타나카 히데유키 씨와 만든 Neverland는 용두사미로.

온천이나 호텔에서 디너쇼를 열거나 팬미팅을 여는 일이 늘어나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란 상황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무소에서 급료를 받고 있으니까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다’란 결론이 나면서 이시다 신고 씨와 설립했던 I.T.I. 하우스를 떠나기로 했습니다.

별안간 무급이 되었습니다. 네버랜드 보컬과 히데유키까지 셋이서 동거를 했습니다. 활동비를 확보하기 위해서 영상특전이 붙은 팬클럽을 만들고, 500개 정도의 비디오테이프 더빙을 나누어서 맡았습니다. 집에 전화를 걸어서 테이프에 녹음한 팬클럽 안내음성을 자동응답기로 틀었습니다. 테이프 재생 스위치가 눌릴 때 나는 ‘딸깍’소리가 계속 울려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라이브 공연장에도 직접 전화를 걸어서 부킹했습니다. 여섯 명이 탈 수 있는 차를 구입해, 악기를 싣고 전국각지를 돌아다녔습니다. 라이브 중에는 대기실에 아무도 없기 때문에 회계담당인 드러머는 돈을 넣은 가방을 허리에 찬 채로 연주했습니다. 지방 순회공연이 후반부에 다다르자 가방이 무거워져서 부릉부릉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분배하는 생활이었습니다.

당시, (전 LAZY의)카게야마 히로노부 군이 건축현장에서 일꾼 아르바이트를 하고, 경험도 쌓아 현장의 리더에 올랐었습니다. 네버랜드의 수입만으로는 먹고 살 수 없었기에 그에게 부탁해 일꾼으로 들어갔습니다.

아침 다섯시, 카게야마 군이 차로 데리러 와 주었습니다. 키보드를 치는 제 손가락을 배려해, 무거운 물건을 들지 않는 작업장에 배치해 주었습니다. 하루 작업이 끝나면 리더인 카게야마 군으로부터 일당 1만엔이 든 봉투를 받았습니다.

- 결국 네버랜드 해산을 결심한다.

음반사 어디든 사무소에 속해있지 않은 네버랜드와의 계약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든 계약을 해달라고, 음반사 앞에 숨어서 디렉터를 기다렸습니다. 나오자마자 “이 곡 들어봐주세요”라며 테이프를 건넵니다.

“그렇게 CD를 내고 싶다면 해체하면 되잖냐” 예전에 소속되어 있던 음반사 디렉터가 답했습니다. “해체CD”란 명목이 있다면 발매해 준다는 것입니다. 네버랜드의 이름을 버릴지 말지 멤버들과 미팅은 했지만 앞뒤 따질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예산이 없어서 스튜디오 녹음을 할 수 없었기에 요코하마 비브레에서 해체 라이브 공연을 녹음. 1990년, 최후의 CD를 발매하면서 네버랜드는 해체. 하지만 거의 같은 멤버들로 새로운 밴드를 결성했습니다.

(2018년 8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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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유 가사를 "싫습니다"며 거부, 애니송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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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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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11회에선 독립 후 처음으로 애니송에 손을 대게 된 경위를 돌아봅니다.

아이돌 시절과는 달리 네버랜드에서는 음악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앞줄 왼쪽이 본인)

- 1981년, 사무소에서 독립하여 전 LAZY의 베이시스트인 타나카 히데유키 씨와 Neverland를 결성하다.

킹레코드의 시게마츠 히데토시 디렉터의 발안으로 아쿠유 씨가 가사를 써 주셨습니다. 완성된 가사는 “우리덜 오사카에서 왔어서예~” 같은. “절대로 싫습니다.”라며 퇴짜를 놓았지만 상대는 대선생님. “어떻게 거절하겠냐!”라며 혼이 났습니다.

당시 히트하던 여성 3인조 그룹 슈가의 프로듀서와 짜보는 아이디어도 나왔었습니다. 그러나 맞추러 온 프로듀서하고 맞지 않아 “이것도 싫습니다.”라며 거절. “그냥 네 맘대로 해라!”라며 내팽개쳐졌습니다.

네버랜드는 스스로 라이브하우스를 찾거나 연습장소를 확보하는 등 마치 밑바닥 시절로 돌아간 활동이었습니다. 라이브 공지 포스터는 멤버들과 렌터카를 타고 붙이러 나갔습니다. 500~600장 정도 붙였습니다. 괴한으로 오인당해 경찰관한테 불려 멈추는 일도 있었습니다.

매일을 음악 연습에 몰두했습니다. 보컬은 가입 당시 17세. 아버님으로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이노우에 씨와 동거할 것”이라는 조건으로 허가를 받아내어 참가했습니다. 문외한이었기에 마이크스탠드의 사용법부터 철저히 교육시켰습니다. 카와구치호에 있던 합숙 스튜디오의 오너로부터 “제일 많이 연습한 것은 네버랜드”라는 보증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네버랜드 활동은 즐거웠습니다. 악기를 유지보수하거나, 악곡을 연구하거나. 하고싶은 일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충실감이 있었습니다. 레이지 시절에는 음악 이외의 일이 많아 스튜디오에 1개월간 틀어박혀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시간 같은 건 없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레이지에서 버라이어티 방송의 콩트를 극한까지 끌어올려보는 것도 괜찮았을 거란 생각도 들긴 합니다만.

- 1983년, Neverland는 애니송에 처음으로 얽힌다.

“이노우에 군, 애니메이션과 타이업해보지 않을래?” 킹레코드 씨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 이쪽은 “하?”였습니다. 킹레코드 안에서도 업무 상대가 애니메이션 관계 부서였기에 항상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 분위기도 달랐습니다.

TV 애니메이션 ‘사이코아머 고바리안’의 오프닝곡과 엔딩곡을 담당했습니다. “인트로를 더 화려하게”라던가 “1코러스를 90초에“라는 등의 주문을 받아 ‘리퀘스트가 많아서 귀찮은 업계구나’라고. 이게 첫인상이었습니다. 아직 ‘애니송’이란 단어도 없이 ‘티비 만화 주제가’라고 불렸습니다.

솔직히 어릴 때 TV 애니메이션은 ‘타이거마스크’를 본 정도로, 만화나 애니메이션엔 흥미가 없었습니다. 카게야마 군은 만화를 엄청 좋아해서 LAZY 시절에도 합숙소엔 만화책이 가득했습니다. 고바리안이 인연이 되어 프로레슬링의 입장 테마곡을 작곡하는 일도 맡게 되었습니다.

(2018년 8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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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ZY 해체 후, ‘포키’에서 이노우에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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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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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10회에선 레이지 해체 후에 참여한 새로운 그룹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트라이앵글 프로덕션을 떠나고 새로운 사무소 I.T.I. House를 설립하다.

- 1981년, LAZY 해체 후에도 이노우에 씨는 트라이앵글 프로덕션에 잔류했다.

후지타 코이치 사장은 퀸시 존스가 프로듀싱해 히트했던 ‘아이노코리다(사랑의 코리다)’의 일본어판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거기서 3인조 그룹 트로와 합류해 새로운 유닛인 ‘빅뱅’을 결성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노코리다를 일본어로 부른다는 건 솔직히, 촌스러웠죠. 빅뱅에서의 활동은 그 한곡뿐이 되었습니다.

저와 함께할 보컬을 발굴하기 위해서 후지타 사장과 저는 많은 데모 테이프들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한사람, 빛나는 원석이 있었습니다. “그룹 짜기 전에 함께 생활해봐” 후지타 사장의 제안으로 도쿄 아오야마의 저택에서 1주일 정도 함께 살았습니다. 동갑인 그는 대학생. (닛산의) 빨간 블루버드를 탄 채 “포키(이노우에), 바다에 가자”. 음악에 대한 이야기보다 놀러가자고 하다니. 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밤, 롯폰기의 야키토리 가게에 있던 후지타 사장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와는 못하겠습니다.” 그렇게 호소한 바로 다음 순간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주먹으로 크게 맞고 만화 속 한 장면처럼 카운터에서 굴러 떨어졌습니다. 이젠 인내의 한계입니다. “때려치겠어!” 입에서 곧장 튀어나왔습니다.

이후 후지타 사장은 스기야마 키요타카 & 오메가 트라이브를 프로듀스. 유닛 결성을 포기한 대학생 카도마츠 토시키는 이후 싱어송라이터로 대성공했습니다. 분명 저와 짰으면 그리 팔리지 않았겠죠. 제가 사무소를 뛰쳐나온 탓에 서로가 행복해진거라 생각합니다.

- 레이지의 베이시스트 타나카 히데유키 씨와 합류하다.

레이지 해체 후, 히로유키(타나카 히로유키), 탓칸(타카사키 아키라), 그리고 히구치(히구치 무네타카) 씨와 함께 ‘LOUDNESS’에 참가할 예정이었습니다만 음악성의 차이로 탈퇴하고 맙니다. 그래서 알고 지내던 기타리스트나 히구치 씨의 제자였던 드러머를 불러 미국발 ‘어덜트 오리엔티드 록(AOR)’을 지향하는 ‘Neverland’를 결성합니다.

“너희들 같이 할래?”라며 말을 걸어준 사람은 트라이앵글 프로덕션에서 레이지의 라이브 담당이던 이시다 신고 씨였습니다. 후지타 사장에게 맞은 사건이 사무실에 널리 퍼졌기에 배려해준 것이겠죠. 이시다 씨를 사장으로 사무소를 차리게 됩니다. 이름은 ‘이노우에’ ‘타나카’ ‘이시다’의 앞글자를 딴 I.T.I. House입니다.

네버랜드에선 레이지의 영광에 기댈 생각이 없었습니다. 자기소개도 “키보드의 이노우에입니다.” 본명으로 승부했고, 포키란 이름은 쓰지 않았습니다. ‘빨간두건양 조심해’ 같은 레이지 시절의 히트곡도 연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강한척했어도 레이지의 ‘잔향’으로서 활동했다는 측면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걸 증명하듯이 네버랜드의 활동은 조금씩 시들어가고 있었습니다.

(2018년 8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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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 해체하는 게 어때?“ 사장의 한마디에 흔쾌히 승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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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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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9회에선 레이지가 해체하게 된 경위를 밝힙니다.

1981년 2월 18일에 해체 선언을 하고, 기자회견에 임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이노우에 씨)

- 밴드의 인기도 피크가 지나면서 아이돌 노선에 대한 의심이 커졌다.

“너희들, 사실은 어떤 음악이 하고 싶은거야?” 사무소의 소개로 프로듀서 자리에 앉은 사람은, 후에 작가가 되는 이주인 시즈카 씨였습니다. “하드록이 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대답은 명쾌했습니다. “해보면 되잖아.” 하코네의 록웰 스튜디오에 틀어박혀 하드록으로의 회귀를 노린 앨범 제작에 착수했습니다.

잡지의 취재에도 “록을 하고 싶다.”라 공언했고 아무렇지도 않게 담배도 피워대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 7월부터의 전국 투어에선 “아이돌 노선은 이제 끝”이란 말과 “헤비메탈 선언.” 최연장자이자 리더인 무네타카 히구치 씨와 사무소의 후지타 코이치 사장이 충돌해 해고 소동도 일어났었습니다. 결국은 “맘대로 해!” 앨범 녹음장에 스태프가 아무도 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방치당한겁니다.

- 1980년 12월, LAZY는 앨범 ‘우주선지구호’를 발매. 수록곡의 대부분을 타카사키 아키라 씨부터 각 멤버들이 작곡. 이주인 시즈카 씨도 ‘다테 아유무’ 명의로 작사에 참가했다. 일본 록 팬들이 명반으로 꼽는 한 장이다.

5명이 각자 자신의 음악을 관철하는 경험을 하고보니 멤버 간 방향성의 차이가 확연해졌습니다. 탓칸과 히구치 씨는 한층 더 격렬함을 추구하고 싶어 했습니다. 카게야마 군은 솔로. 저는 ‘어덜트 오리엔티드 록(AOR)’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데이비드 포스터가 소속해있는 미국 밴드 에어플레이의 음반을 듣고 ‘이거다!’라고 직감했죠. ‘그 때’는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냥, 너희들 해체하는 게 어때?” 1981년 정초에 그런 말을 꺼낸건 후지타 사장이었습니다. 멤버 간 음악성의 차이가 확연히 차이나던 우리도 흔쾌히 승낙. 2월 18일에 예정되어 있던 카게야마 군의 버스데이 라이브를 해체발표일로 정했습니다.

데뷔의 기회를 주신 카마야츠 히로시(무슈 카마야츠) 씨에게 보고해야만 했습니다. 해체발표 전날 밤, 오사카에서 카마야츠 씨를 만났습니다. “우리들, 해체합니다.” 카마야츠 씨는 “으음”이라 신음하며 아무 말도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천천히 입을 열고 “디스코장에 갈까?” 어째선지 디스코장에서 미친 듯이 흔들었습니다.

다음날, 도쿄의 조후시 그린홀에서 LAZY는 해체를 발표했습니다.

해체 라스트 라이브는 5월 31일의 나고야 공연이었습니다. 라스트 라이브의 마지막, 드럼이나 기타의 마구 연주하며 곡을 끝내는 ‘휘젓기’가 좀처럼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들 끝내기 싫어서 20분 정도 계속한 게 아닐까요? 라이브 후에는 다섯이서 밤새 마시고 “다들 건강해.” 그것 뿐이었습니다. LOUDNESS를 결성한 탓칸과 히구치 씨 둘이나, 솔로 활동을 시작한 카게야마 군과는 몇 년간 만나는 일이 없었습니다.

(2018년 7월 31일)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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