影山ヒロノブ - 光のWILL POWER
카게야마 히로노부 - 빛의 WILL POWER 

歌:影山ヒロノブ
作詞:森由里子
作曲:山本健司
コーラス: KU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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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の宇宙 動かすほどの 心のVibration
코노우츄우 오고카스호도노 코코로노Vibration
이 우주가 움직일 정도인 마음의 Vibration

魂を揺さぶる正義感 
타마시이오유사부루오모이
영혼이 뒤흔들리는 정의감

勇気と呼ぶのさ
유우키토요부노사
용기라고 부르는거야

そう オレの勇気で 
소오 오레노유우키데
그래 나의 용기로

きっと 歴史さえも
킷토 레키시사에모
반드시 역사조차도

Just 塗りかえてやるよ
Just 누리카에테야루요
Just 새로 써주겠어

アキラメや弱気捨てたら 生まれるCelebration
아키라메야요와키스테타라 우마레루Celebration
포기나 나약함을 버린다면 생겨나는 Celebration

走るのさ
하시루노사
달려가보는거야

敵を蹴散らし 新たな時代へ
테키오케치라시 아라타나지다이에
적을 쫓아내고 새로운 시대로

さあ 創ってやる
사아 츠쿳테야루
자아 만들어주마

きっと 新世界を
킷토 신세카이오
반드시 신세계를

Just 決めた瞬間に ひらく奇跡
Just 키메타토키니 히라쿠키세키
Just 마음먹은 순간에 시작되는 기적

力超えた強い力 そいつがWILL POWER
치카라코에타츠요이치카라 소이츠가WILL POWER
힘을 넘어선 강한 힘 이 녀석이 WILL POWER

時空の壁も超えるスピードで
토키노카베모코에루스피-도데시공의 벽조차 뛰어넘는 스피드로

炎よりも燃える炎 光のWILL POWER
호노오요리모모에루호노오 히카리노WILL POWER
불꽃보다도 타오르는 불꽃 빛의 WILL POWER

夢を咲かす熱い情熱
유메오사카스아츠이죠오네츠
꿈을 피워내는 뜨거운 정열

ここにあり!
코코니아리!
여기 있을지니!


いつの世も変わらぬものは 優しいFascination
이츠노요모카와라누모노와 야사시이Fascination
어느 세상에도 변하지 않는건 상냥한 Fascination

かけがえのない人々を
카케가에노나이히토비토오
둘도 없는 사람들을

愛するキモチさ
아이스루키모치사
사랑하는 마음이야

そう 君のために
소오 키미노타메니
그래 그대를 위해서

遠い人のために
토오이히토노타메니
머나먼 사람을 위해서

Just 自分のため 平和守る
Just 지분노타메 헤이와마모루
Just 자신을 위해서 평화를 지킨다

祈りよりも強い祈り こいつがWILL POWER
이노리요리모츠요이이노리 코이츠가WILL POWER
소망보다도 강한 소망 이 녀석이 WILL POWER

きっと 今が跳べるチャンスだよ
킷토 이마가토베루챤스다요
분명 지금이 뛰어갈 찬스야

嵐さえも消せる風さ 光のWILL POWER
아라시사에모케세루카제사 히카리노WILL POWER
폭풍조차도 몰아낼 바람이야 빛의 WILL POWER

まぶしすぎる明日を目指して
마부시스기루아시타오메자시테
눈부신 내일을 향해

突っ走れ!
츳파시레!
달려나가라!


力超えた強い力 そいつがWILL POWER
치카라코에타츠요이치카라 소이츠가WILL POWER
힘을 넘어선 강한 힘 이 녀석이 WILL POWER

時空の壁も超えるスピードで
토키노카베모코에루스피-도데시공의 벽조차 뛰어넘는 스피드로

炎よりも燃える炎 光のWILL POWER
호노오요리모모에루호노오 히카리노WILL POWER
불꽃보다도 타오르는 불꽃 빛의 WILL POWER

夢を咲かす熱い情熱
유메오사카스아츠이죠오네츠
꿈을 피워내는 뜨거운 정열

ここにあり!
코코니아리!
여기 있을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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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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影山ヒロノブ - 運命の日~魂vs魂~
카게야마 히로노부 - 운명의 날 ~혼vs혼~


歌:影山ヒロノブ
作詞:岩室先子
作曲:清岡千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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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は満ちて
토키와미치테
때는 되었다

おお救世主(メシア)
오오메시아
오오 메시아

おお救世主達(メシアら)
오오메시아라
오오 메시아들이여

………

YUDULIYA-VELE YUDULIYA-VELE
YUDULIYA-VELE
YUDULIYA IYALIYA

あぁ、底無しの 恐怖を引き連れ
아아、소코나시노 쿄오후오히키즈레
아아, 끝 모르는 공포를 이끌고

あぁ、迫り来る 邪悪なタ・マ・シ・イ
아아、세마리쿠루 쟈아쿠나타・마・시・이
아아, 엄습해오는 사악한 영혼

負けられない 運命の分かれ目
마케라레나이 운메이노와카레메
질 수없는 운명의 갈림길

やるしかない 夜明けに命をかけて
야루시카나이 요아케니이노치오카케테
싸울 수밖에 없는 새벽에 목숨을 걸고

この手で!!
코노테데!!
이 손으로!!

WOW WOW

必ず
카나라즈
반드시

オレはオレを越えてくぜ!
오레와오레오코에테쿠제!
나는 나를 넘어서겠어!

WOW WOW

気を集めて
키오아츠메테
기를 모아서

暗闇を飛ばせ!!
쿠라이야미오토바세!!
깊은 어둠을 날려버려라!!

YUDULIYA-VELE YUDULIYA-VELE
YUDULIYA-VELE
YUDULIYA IYALIYA


あぁ、血に飢えた 獣が微笑む
아아、치니우에타 케모노가호호에무
아아, 피에 굶주린 짐승이 웃는다

あぁ、熱くなる 正義のタ・マ・シ・イ
아아、아츠쿠나루 세이기노타・마・시・이
아아, 뜨거워지는 정의의 영혼

誰もいない 地球なんてイヤだ!
다레모이나이 치큐우난테이야다!
아무도 없는 지구따윈 싫다!

愛見えない 星なんて見たくはない!
아이미에나이 호시난테미타쿠와나이!
사랑이 보이지 않는 별따윈 보고 싶지 않아!

絶対に!!
젯타이니!!
절대로!!

WOW WOW

オマエを
오마에오
네 녀석을

倒さずにはいられない!
타오사즈니와이라레나이!
쓰러트리지 않곤 베길 수 없어!

WOW WOW

その笑いを
소노와라이오
그 웃음소리를

オレが止めてやる!!
오레가토메테야루!!
내가 멈추게 해주마!!


例え今は オマエが上でも
타토에이마와 오마에가우에데모
설령 지금은 네 녀석이 위일지라도

明日になれば 明日の風吹く世界
아스니나레바 아시타노카제후쿠세카이
내일이 되면 내일의 바람이 부는 세상

さあ、行け!!
사아、유케!!
자아, 가자!!

WOW WOW

必ず
카나라즈
반드시

オレはオレを越えてくぜ!
오레와오레오코에테쿠제!
나는 나를 넘어서겠어!

WOW WOW

気を集めて
키오아츠메테
기를 모아서

運命を飛ばせ!!
운메이오토바세!!
운명을 날려버려라!!

WOW WOW

必ず
카나라즈
반드시

オレはオレを越えてくぜ!
오레와오레오코에테쿠제!
나는 나를 넘어서겠어!

WOW WOW

気を集めて
키오아츠메테
기를 모아서

運命を飛ばせ!!
운메이오토바세!!
운명을 날려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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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오반 각성 테마곡이지만 그냥 듣기에도 참 좋은 노래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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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소에서 독립, 별안간 무급이 되어 밴드해체의 위기”

https://style.nikkei.com/article/DGXZZO62701920X10C20A8000000?channel=DF180320167079
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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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12회에선 새로운 밴드의 해체로 인해 힘든 시기로 내몰렸던 시기를 되돌아 봅니다.

네버랜드 해체 후 결성한 휴먼네이처의 멤버들(오른쪽 끝이 본인)

- 1980년대 중반. LAZY 출신의 타카사키 아키라 씨와 히구치 무네타카 씨가 결성한 LOUDNESS는 미국 뉴욕에서 라이브 공연을 열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었다. 한편, 이노우에 씨가 타나카 히데유키 씨와 만든 Neverland는 용두사미로.

온천이나 호텔에서 디너쇼를 열거나 팬미팅을 여는 일이 늘어나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란 상황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무소에서 급료를 받고 있으니까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다’란 결론이 나면서 이시다 신고 씨와 설립했던 I.T.I. 하우스를 떠나기로 했습니다.

별안간 무급이 되었습니다. 네버랜드 보컬과 히데유키까지 셋이서 동거를 했습니다. 활동비를 확보하기 위해서 영상특전이 붙은 팬클럽을 만들고, 500개 정도의 비디오테이프 더빙을 나누어서 맡았습니다. 집에 전화를 걸어서 테이프에 녹음한 팬클럽 안내음성을 자동응답기로 틀었습니다. 테이프 재생 스위치가 눌릴 때 나는 ‘딸깍’소리가 계속 울려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라이브 공연장에도 직접 전화를 걸어서 부킹했습니다. 여섯 명이 탈 수 있는 차를 구입해, 악기를 싣고 전국각지를 돌아다녔습니다. 라이브 중에는 대기실에 아무도 없기 때문에 회계담당인 드러머는 돈을 넣은 가방을 허리에 찬 채로 연주했습니다. 지방 순회공연이 후반부에 다다르자 가방이 무거워져서 부릉부릉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분배하는 생활이었습니다.

당시, (전 LAZY의)카게야마 히로노부 군이 건축현장에서 일꾼 아르바이트를 하고, 경험도 쌓아 현장의 리더에 올랐었습니다. 네버랜드의 수입만으로는 먹고 살 수 없었기에 그에게 부탁해 일꾼으로 들어갔습니다.

아침 다섯시, 카게야마 군이 차로 데리러 와 주었습니다. 키보드를 치는 제 손가락을 배려해, 무거운 물건을 들지 않는 작업장에 배치해 주었습니다. 하루 작업이 끝나면 리더인 카게야마 군으로부터 일당 1만엔이 든 봉투를 받았습니다.

- 결국 네버랜드 해산을 결심한다.

음반사 어디든 사무소에 속해있지 않은 네버랜드와의 계약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든 계약을 해달라고, 음반사 앞에 숨어서 디렉터를 기다렸습니다. 나오자마자 “이 곡 들어봐주세요”라며 테이프를 건넵니다.

“그렇게 CD를 내고 싶다면 해체하면 되잖냐” 예전에 소속되어 있던 음반사 디렉터가 답했습니다. “해체CD”란 명목이 있다면 발매해 준다는 것입니다. 네버랜드의 이름을 버릴지 말지 멤버들과 미팅은 했지만 앞뒤 따질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예산이 없어서 스튜디오 녹음을 할 수 없었기에 요코하마 비브레에서 해체 라이브 공연을 녹음. 1990년, 최후의 CD를 발매하면서 네버랜드는 해체. 하지만 거의 같은 멤버들로 새로운 밴드를 결성했습니다.

(2018년 8월 3일)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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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 해체하는 게 어때?“ 사장의 한마디에 흔쾌히 승낙”

https://style.nikkei.com/article/DGXZZO62029510Z20C20A7000000?channel=DF180320167079
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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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9회에선 레이지가 해체하게 된 경위를 밝힙니다.

1981년 2월 18일에 해체 선언을 하고, 기자회견에 임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이노우에 씨)

- 밴드의 인기도 피크가 지나면서 아이돌 노선에 대한 의심이 커졌다.

“너희들, 사실은 어떤 음악이 하고 싶은거야?” 사무소의 소개로 프로듀서 자리에 앉은 사람은, 후에 작가가 되는 이주인 시즈카 씨였습니다. “하드록이 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대답은 명쾌했습니다. “해보면 되잖아.” 하코네의 록웰 스튜디오에 틀어박혀 하드록으로의 회귀를 노린 앨범 제작에 착수했습니다.

잡지의 취재에도 “록을 하고 싶다.”라 공언했고 아무렇지도 않게 담배도 피워대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 7월부터의 전국 투어에선 “아이돌 노선은 이제 끝”이란 말과 “헤비메탈 선언.” 최연장자이자 리더인 무네타카 히구치 씨와 사무소의 후지타 코이치 사장이 충돌해 해고 소동도 일어났었습니다. 결국은 “맘대로 해!” 앨범 녹음장에 스태프가 아무도 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방치당한겁니다.

- 1980년 12월, LAZY는 앨범 ‘우주선지구호’를 발매. 수록곡의 대부분을 타카사키 아키라 씨부터 각 멤버들이 작곡. 이주인 시즈카 씨도 ‘다테 아유무’ 명의로 작사에 참가했다. 일본 록 팬들이 명반으로 꼽는 한 장이다.

5명이 각자 자신의 음악을 관철하는 경험을 하고보니 멤버 간 방향성의 차이가 확연해졌습니다. 탓칸과 히구치 씨는 한층 더 격렬함을 추구하고 싶어 했습니다. 카게야마 군은 솔로. 저는 ‘어덜트 오리엔티드 록(AOR)’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데이비드 포스터가 소속해있는 미국 밴드 에어플레이의 음반을 듣고 ‘이거다!’라고 직감했죠. ‘그 때’는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냥, 너희들 해체하는 게 어때?” 1981년 정초에 그런 말을 꺼낸건 후지타 사장이었습니다. 멤버 간 음악성의 차이가 확연히 차이나던 우리도 흔쾌히 승낙. 2월 18일에 예정되어 있던 카게야마 군의 버스데이 라이브를 해체발표일로 정했습니다.

데뷔의 기회를 주신 카마야츠 히로시(무슈 카마야츠) 씨에게 보고해야만 했습니다. 해체발표 전날 밤, 오사카에서 카마야츠 씨를 만났습니다. “우리들, 해체합니다.” 카마야츠 씨는 “으음”이라 신음하며 아무 말도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천천히 입을 열고 “디스코장에 갈까?” 어째선지 디스코장에서 미친 듯이 흔들었습니다.

다음날, 도쿄의 조후시 그린홀에서 LAZY는 해체를 발표했습니다.

해체 라스트 라이브는 5월 31일의 나고야 공연이었습니다. 라스트 라이브의 마지막, 드럼이나 기타의 마구 연주하며 곡을 끝내는 ‘휘젓기’가 좀처럼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들 끝내기 싫어서 20분 정도 계속한 게 아닐까요? 라이브 후에는 다섯이서 밤새 마시고 “다들 건강해.” 그것 뿐이었습니다. LOUDNESS를 결성한 탓칸과 히구치 씨 둘이나, 솔로 활동을 시작한 카게야마 군과는 몇 년간 만나는 일이 없었습니다.

(2018년 7월 31일)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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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노선으로 인기절정, 일단락되자 싹트기 시작한 의문”

style.nikkei.com/article/DGXZZO61710400Q0A720C2000000?channel=DF180320167079
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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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8회에선 아이돌로서 인기절정이던 시기와 음악적으로 ‘빌린 음악’ 상태로 생긴 의문을 이야기합니다.

히비야 야외 음악당에서의 라이브에는 많은 팬들이 몰려들었다. (1978년)

- LAZY는 아이돌 노선에서 인기인이었다.

당시에는 음악 방송의 일이 월요일에 집중되어있었습니다. 니혼테레비의 ‘홍백가 베스트텐’과 ‘밤의 히트 스튜디오’의 생방송과 일본방송협회(NHK) ‘렛츠고 영’의 녹화도 월요일이었습니다. 멤버들은 방송국에서 부르면 언제라도 달려갈 수 있도록 월요일의 예정을 비우고 대기했습니다.

합숙소에는 욕실이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멤버가 한명씩 들어가기 때문에 아침 7시에 버스가 마중 나올 경우, 첫 번째 사람은 새벽 4시 30분 정도부터 들어갔습니다. 전속 스타일리스트를 달지 않는 시대로 복장은 사복이 기본이었습니다. 일이 끝나고 “내일은 흰 바지로”라 전달받으면 한밤중에 황급히 코인빨래방에서 세탁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아이돌월간지에는 ‘묘조(明星)’와 ‘헤이본(平凡)’이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한쪽의 촬영으로 괌에 가서 1박을 하고 오니, 다른 쪽 촬영으로 다시 괌에 가는 일정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괌에서 인기가수 사와다 켄지 씨와 우연히 만나게 되어 밤에 숙박처로 초대받은 적이 있습니다. “연예계에서 지켜야만 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라고 물으니 “알겠냐, 절대 지각만은 하지마라.”고 답하셨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로는 상대에게 할 말이 없잖냐.”라며. 이 가르침은 지금도 지키고 있습니다.

휴일은 없었지만 우리들은 아직 나은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톱아이돌이었던 핑크 레이디 씨와 함께 잡지의 표지를 장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촬영은 새벽 2시부터였습니다. 스튜디오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핑크 레이디 두 분께서 잠든 채로 스태프에게 업혀왔습니다. 의자에 앉혀지고, 카메라맨인 시노야마 키신 씨가 “자 찍습니다.”라고 말을 걸자 방긋 웃으며 찰칵찰칵. 다시 업혀져서 스튜디오를 나가 다음 장소로.

- 인기가 일단락되자, 아이돌노선의 레이지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전성기에는 다음날까지 외워야할 드라마의 대본과 신곡의 연습으로 머리가 꽉 찼습니다. 아무것도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시간의 여유가 생기니 우리들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들과 거의 동시기에 사잔 올스타즈 씨나 ‘록 3인방’의 Char 씨, 하라다 신지 씨, 세라 마치노리 & 트위스트 씨가 데뷔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곡을 만들고, 가사를 써서 활약했습니다.

반면에 LAZY로 세상에 알려진 노래는 누군가로부터 받은 작품투성이. 분장실에서 고다이고 씨나 세라 씨와 함께 있으면 “너희들 연주실력이 그렇게나 좋은데, 언제까지나 그런 걸로 좋은 거야?”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래. 그랬었지.”라며 깨달아갑니다.

그럴 때 사무소에서 한 음악 프로듀서를 소개받습니다. 후에 작가가 되는 이주인 시즈카 씨입니다.

(2018년 7월 30일)

 

アイドル路線で人気絶頂 一段落して芽生え始めた疑問|出世ナビ|NIKKEI STYLE

市場規模が膨らんだ「アニメソング(アニソン)」ビジネスの立役者の一人がバンダイナムコアーツの井上俊次副社長です。1970年代にロックバンド「レイジー」で一世を風靡しました。井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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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의 진으로 대망의 히트, 아이돌 취급에도 익숙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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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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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7회에선 처음으로 히트하던 당시를 돌아봅니다.

안무가 추가되는 등, 아이돌 노선의 히트에는 곤욕도 있었다.

- 음반은 팔리지 않았지만, 멤버들은 조금씩 그 반응을 느끼고 있었다.

백화점 옥상에서 공연을 반복했습니다. 연주 후에는 음반을 직접 팔았습니다. 점차 팬들이 몰려들면서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데뷔하고 반년 정도 지난 1977년 후반에는 1000명 정도의 팬들이 모여들 정도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곡인 ‘카무플라주’도 오리콘 랭킹 60위 정도에 올라 ‘마루쿄’ 마크가 붙었습니다. 지금은 없습니다만 ‘도쿄에서 팔리고 있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신주쿠 아시베 홀’에서도 라이브를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전성기의 그룹사운드들도 이용하던 공연장이었습니다. 우리들은 갖고 있는 곡이 4곡 밖에 없었기에 딥 퍼플 등 좋아하는 악곡을 연주했습니다. 아이돌밴드를 볼 생각에 찾아온 여성팬들은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반응은 있었습니다만 주변의 기대를 넘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카무플라주는 작곡이 토쿠라 슌이치 씨, 작사가 마츠토야 유미 씨였으니까요. 사무소에서는 “다음 곡이 팔리지 않으면 너희들 오사카로 돌아가라”며 최후통첩을 했습니다.

세 번째 곡은 ‘빨간두건양 조심해’. 스태프가 “이번부턴 안무가 들어갈거야”라 말해 모두가 “에!?”. 춤선생님은 핑크 레이디의 안무가 도이 하지메 씨였습니다. 꼴사나운 춤사위였지만 우리는 거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레슨 후에도 합숙소 앞의 공터에서 안무 연습. 의상도 컬러풀하고 화려해져 갔습니다. 그야말로 일본식 베이 시티 롤러스. 탓칸(타카사키 아키라)는 정말 싫어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최근 카게야마 군과 탓칸 셋이서 “빨간두건이 팔리지 않았다면 어찌되었으려나”라며 대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카게야마 군은 본가의 이발소를 이어받았을 거라고. 탓칸도 역시 본가의 자영업을 이었을 거라고. 저는 본가 신사이바시의 아메리카무라 부근에서 술집이라도 하고 있었겠지요.

- 1978년 2월, 배수의 진으로 발매한 ‘빨간두건양 조심해’가 대히트해 인기 탤런트가 되다.

당시 인기가수는 ‘신춘 숨은 장기자랑 대회’ 등의 버라이어티 방송에서 콩트도 했었습니다. 우리도 까마귀 차림을 하거나 상투를 틀고 시대극을 했습니다. 콩트 연습도 시간을 들여야 했습니다. 적당적당히 해버리면 이카리야 쵸스케 씨한테 혼나고 마니까요. 저는 열여덟살로, 화려한 예능계가 즐겁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은, 머리가 젖은 채로 자버린 탓에 잠꼬대로 인해 머리가 뻗친 채 아침에 일어났습니다. “이거 괜찮네”가 되어서 신문에 ‘포키컷’으로 소개돼 꽤나 유행했었지요.

잡지의 취재로 그라운드에 모이자 눈앞에 끈이 있었습니다. 어째선지 모르겠으나 “오늘은 스모를 하겠습니다.”라며 그 자리에서 끈을 둘러 스모를 했습니다. 이러한 일이 계속되고, 멤버들의 감각도 조금씩 무뎌져, 이런 매일에도 익숙해져 갔습니다.

(2018년 7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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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우미로 참가한 ‘레이지’ 실력파로 인기를 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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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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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3회에선 카게야마 히로노부 씨의 요청으로 레이지에 참가한 경위를 밝힙니다.

도우미로 가입한 레이지 (1977년 데뷔 당시. 왼쪽에서 두번째가 본인)

- 1976년.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노우에 씨는 카게야마 히로노부 씨의 권유로 밴드 ‘LAZY’에 가입한다.

매일매일, 종일토록 카게야마 군과 놀았습니다. 집이 가까웠기에 함께 돌아가거나, 집에서도 전화로 2시간 정도 수다를 떨거나 했습니다. 신기하게도 서로 잘 맞았어요. 앞바구니에 원통 모양의 항아리 도시락을 실은 채 자전거를 타고 있던 카게야마군의 모습이 지금도 떠오릅니다.

학교 경음악부는 수준이 높지 않았기에 길게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카게야마군은 4인조 밴드를 조직해 그는 기타 겸 보컬, 저는 드럼을 맡았습니다. 하굣길엔 포크가수 카가와 료 씨의 노래에 등장하는 테즈카야마의 ‘하얀 집’이라는 이름의 작은 찻집에 틀어박혀서 음반을 들었습니다. 음악은 취미로서 프로가 될 마음은 전혀 없었습니다. 모두가 함께 음악을 하고 있는 고등학생 생활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1학년 여름 쯤, 레이지 멤버들을 데려온 카게야마 군으로부터 “도우미를 해줬으면 해.”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TV에 출연하는 오디션을 받아보고 싶다며. 드럼이 아닌 키보드 역할이었지만 “도우미 역할 뿐이라면.”라면서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레이지는 카게야마 군이 유치원이나 초등학생 시절부터 소꿉친구로 지내던 타카사키 아키라 씨, 타나카 히로유키 씨와 함께 결성한 마을 밴드였습니다. 그때까진 여자아이가 키보드를 담당했었지만 어째선지 도움을 요청받았습니다. 저와 같은 타이밍에 드럼으로 2살 위인 히구치 무네타카 씨가 가입했습니다. 당시엔 자세한 사정을 몰랐습니다만, 최근에서야 카게야마군의 저서에 “프로를 노리기 위해서 키보드와 드럼 멤버를 교체했다.”라고 쓰여 있어 ‘아, 그 때문이었구나’라며 알게 되었습니다.

- 오사카 현지에서 LAZY는 실력파로 알려져 있었다.

레이지에서 연주할 오르간을 좀처럼 찾지 못하고 있어 곤란해 하고 있을 때, 지인이 오사카 니혼바시에서 팔고 있다고 가르쳐주었습니다. ‘콤보 오르간’이라는 기종이 중고로 10만엔 정도. 오락실에서 라이브 연주하는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았습니다. 리어카 짐칸에 싣고 돌아왔습니다.

레이지는 엄청 뛰어났습니다. 해외 아티스트의 카피도 완벽. 같은 악곡이라도 유럽판이나 해적판 등의 버전도 연주해냈었습니다. 기타인 탓칸은(타카사키 아키라)의 자택에는 테이프를 재생하는 오픈릴이 있었습니다. 그의 집에 모여서 테이프에 녹음되어있는 악곡을 절반 정도의 속도로 재생하여 철저하게 카피했습니다.

딥 퍼플, 레인보우, 유라이어 힙. 브리티시 록의 음반을 닥치는 대로 사서 구석까지 카피했습니다. 딥 퍼플을 연주할 줄 알다니 대단하다는 평판이 퍼져서 단독라이브 때는 유료임에도 수백명 정도를 모을 수 있었습니다. 연주를 잘하는 것만을 생각했었습니다. 되돌아보면 이것이 후에 오리지널 곡을 만들지 못해 활동이 정체되는 요인 중 하나가 됩니다.

(닛케이산업신문 2018년 7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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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퍼플의 충격, 카게야마 히로노부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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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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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2회에서는 중학시절 경음악과의 만남을 되돌아봅니다.

중학생 야구부 시절

- 중학2학년 때 경음악과 만나다.

“이노우에 군, 피아노 치잖아? 키보드 좀 쳐줘.” 문화제에서 연주하기 위해서 동급생들이 말을 걸어준 것이 경음악과의 만남이었습니다.

그 동급생이 들려준 것이 영국의 록밴드인 딥 퍼플. 오르간이라면 보통 일렉톤(전자 오르간) 같은 맑은 소리가 연상되지만, 딥 퍼플의 키보디스트였던 존 로드는 뒤틀린 소리로 와앗!하며 연주. 세상에 이런 음악도 있었냐며 크게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이게 제 인생 첫 밴드활동입니다. 문화제니까 스테이지는 학교의 체육관. 밴드명도 없이 “다음은 2학년의 누구누구가 부릅니다.”하는 세계였어요. 피아노 발표회를 제외하곤 사람 앞에서 연주하는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연주한 것은 딥 퍼플의 ‘하이웨이 스타’였을까요. 문화제가 끝나고서 그대로 경음악 동호회에 가입했습니다. 연습은 가정학과실에서 했습니다. 가정과 선생님께서 흥미를 가져주셔서 “써도 된단다.”라며 허락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같은 시기에 야구부는 그만뒀습니다. 문화제에서 연주하니 야구부 선생님께서 “그런 짓하려면 그만둬라.”라며 야단치셨거든요. 당시의 록음악은 담배 냄새가 진하고, 좀 불량한 이미지였어요. 입부당시엔 기대받은 신인 투수였습니디만, 신장이 전혀 자라지 않아 “차라리 아래서부터 언더 스로로 던져라.”라고 지시받았었습니다. “좀 싫네. 꼴불견이야.”라고 생각해 퇴부했었습니다. 그때부터 음악 일직선으로 집중했습니다.

- 경음악을 시작할 당시엔 드럼지망이었다.

TV의 음악 프로그램에서 더 스파이더스라든지 더 타이거스라든지 그룹 사운드를 꽤나 시청했었습니다. 드럼을 정말 좋아했습니다. 잡지를 허벅지에 감고, 긴 젓가락을 두드리며 연습을 하곤 했습니다.

경음악 동호회에서도 키보드와 드럼 양 쪽을 담당했었습니다. 동호회의 멤버와 떨어져 고등학교에 통학하던 때도 밴드를 계속했었습니다. 그 외에도 두 개, 세 개씩 밴드를 겸임하고 있었고, 거기에선 드럼을 치고 있었습니다.

- 1976년 4월, 야마토가와 고등학교에 입학.

입학하자 친구들로부터 “경음악부에 들어가보자.”라는 권유를 받았어요. 저는 중학교 때부터 밴드를 해왔으니까 자신만만하게 처들어갔죠.

경음악부실에 들어가니 구석진 곳에 같은 신입생의 남자아이가 드럼을 치며 놀고있었습니다. 그걸 본 제가 다가서며 “비켜. 내가 쳐보게.”라고. 일어선 남자아이는 컬리 헤어 스타일에 새하얀 몸을 해 얌전한 분위기를 풍겼습니다.

이름은 카게야마 히로노부(景山浩宣)군.

후에 밴드 ‘LAZY’에서 동고동락하고, 인기 애니메이션 ‘드래곤볼Z’ 등의 테마송을 불러 인기 애니송 가수로 발돋움하는 ‘카게야마 히로노부’였습니다.

(닛케이산업신문 2018년 7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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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송은 붐을 넘어. 그 주도는 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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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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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이노우에 씨는 ‘직장인비록’의 제1회에서 스스로의 성장 동력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어린시절 집앞에서

- 1960년 5월 15일, 오사카에서 태어나다.

남부 스미요시구에서 태어났습니다. 스미요시대사라는 큰 신사 근처로, 정말로 주택뿐인 변두리였습니다. 아버지는 중소기업의 경리부에서 일하는 샐러리맨. 어머니는 뜨개질이 특기로, 어디한테서 부탁을 받아 돈벌이를 하셨습니다. 제 스웨터도 만들어주셨네요. 집에 욕실이 없었기에 가까운 목욕탕에 다녔습니다. 3살 위인 형은 대범한 타입. 둘째인 저는 할머니만 찾는 아이였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가정으로, 음악적인 요소는 전혀 없었습니다.

유치원 때는 자동차를 좋아해서 양철 미니카를 갖고 놀았습니다. 주무시고 계신 할머니의 등에 미니카를 달렸어요. 항상 할머니 방에 틀어박혀 느긋하게 살았죠. 이웃 친구들이 현관 앞에서 “슌짱 놀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조모께선 “슌지는 자고 있단다~”라며 멋대로 내쫓아버리시곤 하셨어요.

초등학생이 되면서 활발한 성격이 되었습니다. 집 앞 광장에서 야구를 하곤 했어요. 꽤나 몸집이 큰 아이로, 정렬하면 뒤에서 두 번째. 초등학생 6학년 때 신장이 162센티미터가 되었습니다. 믿지 못할 이야기지만 지금의 신장은 161.5센티미터로 당시의 키가 더 컸어요. 그래서 중학교 야구부에 들어가자마자 기대 받는 대형 루키 취급. 포지션은 투수였습니다.

당시, 매월 2000엔씩 돈을 모금하여 오르간을 사는 것이 근처의 어머님들 사이에서 유행했습니다. 어머니도 적립하고 계셨었습니다. 저는 음악은 완전 꽝으로 남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것도 잘 못했습니다. 통지표에선 다섯 등급 중 2. “얘야, 음악은 2등급이잖니”라며 혼났었습니다. 그때 마침 적립금이 만기가 되어 사게 된 오르간이 음악과의 만남이었습니다.

“피아노도 배우렴.”이라는 말을 들어 근처의 ‘야마구치 피아노교실’에 다녔습니다. 남자아이가 적었기에 부끄럽기도 했지만 피아노 교실엔 만화책이 있었기에 일주일에 한번, 만화를 보기위해서 다녔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선생님의 교육방식이 능숙하셨던 거였네요. “슌짱은 제대로 연습했구나”라며 칭찬하고 치켜세워주셨었습니다.

때로는 아버지의 지인께서 집에 오셔서 “슌짱 한곡 연주해줘”라며. 당시에 인기 있던 엔카 등을 외워서 연주하면 “고맙구나!”라며 1000엔도 받았었습니다. 그렇게 TV에서 들리는 곡을 연습해 연주하는 것을 즐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스즈키 신이치씨가 개발한 ‘스즈키 메서드’라는 교육법으로 연습했었습니다. ‘초등과’나 ‘연구과’ 등 여러 단계의 시험이 있었고 과제곡은 클래식 명곡이었습니다. 과제 클리어를 위해 불태웠네요. 중학 1학년까지 계속해 ‘고등과’까진 땄습니다만 ‘연구과’에 들어갈 무렵엔 피아노에서 경음악으로 흥미가 옮겨갔습니다. 음악 성적은 ‘5등급’이 되었네요.

(닛케이산업신문 2018년 7월 19일)


- 이노우에 슌지.
1976년 록밴드 ‘LAZY’ 가입. 1977년 17세의 나이로 프로데뷔. 해체 후에도 음악활동을 계속해 90년대엔 프로듀서로서의 활약이 본격화. 1999년 애니메이션 음악을 중심으로 하는 레코드회사 란티스를 창업. 오사카 출신.

 

アニソンはブームを越えて 仕掛け人は元レイジー|出世ナビ|NIKKEI STYLE

市場規模が膨らんだ「アニメソング(アニソン)」ビジネスの立役者の一人がバンダイナムコアーツの井上俊次副社長です。1970年代にロックバンド「レイジー」で一世を風靡しました。井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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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ZY – Young & Innocent

MUSIC 2020. 4. 16. 19:16

Young & Innocent

작사: 카게야마 히로노부
작곡: 카게야마 히로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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どれだけ 空を見上げても 輝く星は遠すぎる
도레다케 소라오미아게테모 카가야쿠호시와토오스기루
수없이 하늘을 올려다봐도, 반짝이는 별은 멀기만 하고

どれだけ 君に伝えても 心は癒えない
도레다케 키미니츠타에테모 코코로와이에나이
수없이 너에게 전해보아도, 마음은 나아지질 않아

この時代に 僕等は 何をすればいいんだろう
코노지다이니 보쿠라와 나니오스레바이인다로오
이 시대에 우리들은 무엇을 해야하는걸까

ただ 無機質で しらけた
타다 무키시츠데 시라케타
그저 무기질로 바래버린

手ごたえのない日々を 見つめてる
테고타에노나이히비오 미츠메테루
대답 없는 시절들을 바라보고있어

忘れたんじゃない 無くしてない
와스레탄쟈나이 나쿠시테나이
잊은 게 아니야 잃지 않아

無視してない だって そうだよ
무시시테나이 다앗테 소오다요
무시하지 않아 하지만 그렇잖아

いつも 僕等はここにいる
이츠모 보쿠라와코코니이루
언제나 우리는 여기에 있는걸

I wanna be with you
Be with you

ただ 君だけを 守りたいよ
타다 키미다케오 마모리타이요
그저 그대만을 지켜주고 싶어

Ai Ai Ai Ai Ai

愛を 愛だけを
아이오 아이다케오
사랑을 사랑만을

We are Young & Innocent


どれだけ 明日を祈っても 重ねた 罪は重すぎる
도레다케 아스오이노옷테모 카사네타 츠미와오모스기루
수없이 내일을 기도한들, 겹쳐진 죄는 무겁기만 해

どれだけ 君を愛しても 誰も救えない
도레다케 키미오아이시테모 다레모스쿠에나이
수없이 널 사랑한들, 아무도 구할 수 없어

今 世界は 僕等に 何を求めて いるんだろう
이마 세카이와 보쿠라니 나니오모토메테 이룬다로오
지금 이 세상은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걸까

ただ 一人で 遠くで なす術もない若さ 憎んでる
타다 히토리데 토오쿠데 나스베모나이와카사 니쿤데루
그저 혼자서 아득하며 어쩔 수 없는 젊음을 증오하고 있어

見えないんじゃない しらけてない
미에나인쟈나이 시라케테나이
안보이는게 아니야 방치한건 아니야

笑ってなんかないんだ
와랏테난카나이인다
비웃거나한건 아니야

今日も 僕等はここにいる
쿄오모 보쿠라와코코니이루
오늘도 우린 여기에 있는걸

I wanna be with you
Be with you

ただ 君のそばにいたいよ
타다 키미노소바니이타이요
그저 그대 옆에 있고 싶을 뿐이야

Ai Ai Ai Ai Ai

いつも いつまでも
이츠모 이츠마데모
언제나 언제까지나

We are Young & Innocent


そうだよ 僕等はけして 完成された人間じゃないから
소오다요 보쿠라와케시테 칸세이사레타닌겐쟈나이카라
맞아 우린 결코 완성된 인간이 아니니까

まだ 受け入れられないものがある
마다 우케이레라레나이모노가아루
아직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 있는거야

憎しみの雨に打たれ 水のない川をうつろにただ見つめて
니쿠시미노아메니우타레 미즈노나이카와오우츠로니타다미츠메테
증오의 비를 맞으며 물이 마른 강을 하염없이 바라봐

猛毒の陽射しの中
모도쿠노히자시노나카
맹독의 햇살 속에서

いったい 何ができるんだ……
잇타이 나니가데키룬다……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 거야……


忘れたんじゃない 無くしてない
와스레탄쟈나이 나쿠시테나이
잊은 게 아니야 잃진 않아

無視してない だってそうだよ
무시시테나이 다앗테소오다요
무시하지 않아 하지만 그렇잖아

いつも 僕等はここにいる
이츠모 보쿠라와코코니이루
언제나 우린 여기에 있는걸

見えないんじゃない しらけてない
미에나인쟈나이 시라케테나이
안보이는게 아니야 방치한건 아니야

笑ってなんかないんだ
와랏테난카나이인다
비웃거나한건 아니야

ずっと 僕等はここにいる
즈읏토 보쿠라와코코니이루
여전히 우린 여기에 있는걸

I wanna be with you
Be with you
Be with you

だって そうだよ 今日も僕等はここにいる
다앗테 소오다요 쿄오모보쿠라와코코니이루
하지만 그렇잖아 오늘도 우린 여기에 있는걸

I wanna be with you
Be with you

ただ君だけを守りたいよ
타다키미다케오마모리타이요
그저 그대만을 지켜주고 싶은걸

Ai Ai Ai Ai Ai

愛を 愛だけを
아이오 아이다케오
사랑을 사랑만을

We are Young & Innocent

We are Young & Innoc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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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컬 - 카게야마 히로노부
기타 - 다카사키 아키라
베이스 - 다나카 히로유키
드럼 - 히구치 무네타카
키보드 - 이노우에 슌지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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