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노선으로 인기절정, 일단락되자 싹트기 시작한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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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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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8회에선 아이돌로서 인기절정이던 시기와 음악적으로 ‘빌린 음악’ 상태로 생긴 의문을 이야기합니다.

히비야 야외 음악당에서의 라이브에는 많은 팬들이 몰려들었다. (1978년)

- LAZY는 아이돌 노선에서 인기인이었다.

당시에는 음악 방송의 일이 월요일에 집중되어있었습니다. 니혼테레비의 ‘홍백가 베스트텐’과 ‘밤의 히트 스튜디오’의 생방송과 일본방송협회(NHK) ‘렛츠고 영’의 녹화도 월요일이었습니다. 멤버들은 방송국에서 부르면 언제라도 달려갈 수 있도록 월요일의 예정을 비우고 대기했습니다.

합숙소에는 욕실이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멤버가 한명씩 들어가기 때문에 아침 7시에 버스가 마중 나올 경우, 첫 번째 사람은 새벽 4시 30분 정도부터 들어갔습니다. 전속 스타일리스트를 달지 않는 시대로 복장은 사복이 기본이었습니다. 일이 끝나고 “내일은 흰 바지로”라 전달받으면 한밤중에 황급히 코인빨래방에서 세탁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아이돌월간지에는 ‘묘조(明星)’와 ‘헤이본(平凡)’이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한쪽의 촬영으로 괌에 가서 1박을 하고 오니, 다른 쪽 촬영으로 다시 괌에 가는 일정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괌에서 인기가수 사와다 켄지 씨와 우연히 만나게 되어 밤에 숙박처로 초대받은 적이 있습니다. “연예계에서 지켜야만 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라고 물으니 “알겠냐, 절대 지각만은 하지마라.”고 답하셨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로는 상대에게 할 말이 없잖냐.”라며. 이 가르침은 지금도 지키고 있습니다.

휴일은 없었지만 우리들은 아직 나은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톱아이돌이었던 핑크 레이디 씨와 함께 잡지의 표지를 장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촬영은 새벽 2시부터였습니다. 스튜디오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핑크 레이디 두 분께서 잠든 채로 스태프에게 업혀왔습니다. 의자에 앉혀지고, 카메라맨인 시노야마 키신 씨가 “자 찍습니다.”라고 말을 걸자 방긋 웃으며 찰칵찰칵. 다시 업혀져서 스튜디오를 나가 다음 장소로.

- 인기가 일단락되자, 아이돌노선의 레이지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전성기에는 다음날까지 외워야할 드라마의 대본과 신곡의 연습으로 머리가 꽉 찼습니다. 아무것도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시간의 여유가 생기니 우리들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들과 거의 동시기에 사잔 올스타즈 씨나 ‘록 3인방’의 Char 씨, 하라다 신지 씨, 세라 마치노리 & 트위스트 씨가 데뷔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곡을 만들고, 가사를 써서 활약했습니다.

반면에 LAZY로 세상에 알려진 노래는 누군가로부터 받은 작품투성이. 분장실에서 고다이고 씨나 세라 씨와 함께 있으면 “너희들 연주실력이 그렇게나 좋은데, 언제까지나 그런 걸로 좋은 거야?”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래. 그랬었지.”라며 깨달아갑니다.

그럴 때 사무소에서 한 음악 프로듀서를 소개받습니다. 후에 작가가 되는 이주인 시즈카 씨입니다.

(2018년 7월 30일)

 

アイドル路線で人気絶頂 一段落して芽生え始めた疑問|出世ナビ|NIKKEI STYLE

市場規模が膨らんだ「アニメソング(アニソン)」ビジネスの立役者の一人がバンダイナムコアーツの井上俊次副社長です。1970年代にロックバンド「レイジー」で一世を風靡しました。井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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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의 진으로 대망의 히트, 아이돌 취급에도 익숙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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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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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7회에선 처음으로 히트하던 당시를 돌아봅니다.

안무가 추가되는 등, 아이돌 노선의 히트에는 곤욕도 있었다.

- 음반은 팔리지 않았지만, 멤버들은 조금씩 그 반응을 느끼고 있었다.

백화점 옥상에서 공연을 반복했습니다. 연주 후에는 음반을 직접 팔았습니다. 점차 팬들이 몰려들면서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데뷔하고 반년 정도 지난 1977년 후반에는 1000명 정도의 팬들이 모여들 정도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곡인 ‘카무플라주’도 오리콘 랭킹 60위 정도에 올라 ‘마루쿄’ 마크가 붙었습니다. 지금은 없습니다만 ‘도쿄에서 팔리고 있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신주쿠 아시베 홀’에서도 라이브를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전성기의 그룹사운드들도 이용하던 공연장이었습니다. 우리들은 갖고 있는 곡이 4곡 밖에 없었기에 딥 퍼플 등 좋아하는 악곡을 연주했습니다. 아이돌밴드를 볼 생각에 찾아온 여성팬들은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반응은 있었습니다만 주변의 기대를 넘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카무플라주는 작곡이 토쿠라 슌이치 씨, 작사가 마츠토야 유미 씨였으니까요. 사무소에서는 “다음 곡이 팔리지 않으면 너희들 오사카로 돌아가라”며 최후통첩을 했습니다.

세 번째 곡은 ‘빨간두건양 조심해’. 스태프가 “이번부턴 안무가 들어갈거야”라 말해 모두가 “에!?”. 춤선생님은 핑크 레이디의 안무가 도이 하지메 씨였습니다. 꼴사나운 춤사위였지만 우리는 거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레슨 후에도 합숙소 앞의 공터에서 안무 연습. 의상도 컬러풀하고 화려해져 갔습니다. 그야말로 일본식 베이 시티 롤러스. 탓칸(타카사키 아키라)는 정말 싫어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최근 카게야마 군과 탓칸 셋이서 “빨간두건이 팔리지 않았다면 어찌되었으려나”라며 대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카게야마 군은 본가의 이발소를 이어받았을 거라고. 탓칸도 역시 본가의 자영업을 이었을 거라고. 저는 본가 신사이바시의 아메리카무라 부근에서 술집이라도 하고 있었겠지요.

- 1978년 2월, 배수의 진으로 발매한 ‘빨간두건양 조심해’가 대히트해 인기 탤런트가 되다.

당시 인기가수는 ‘신춘 숨은 장기자랑 대회’ 등의 버라이어티 방송에서 콩트도 했었습니다. 우리도 까마귀 차림을 하거나 상투를 틀고 시대극을 했습니다. 콩트 연습도 시간을 들여야 했습니다. 적당적당히 해버리면 이카리야 쵸스케 씨한테 혼나고 마니까요. 저는 열여덟살로, 화려한 예능계가 즐겁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은, 머리가 젖은 채로 자버린 탓에 잠꼬대로 인해 머리가 뻗친 채 아침에 일어났습니다. “이거 괜찮네”가 되어서 신문에 ‘포키컷’으로 소개돼 꽤나 유행했었지요.

잡지의 취재로 그라운드에 모이자 눈앞에 끈이 있었습니다. 어째선지 모르겠으나 “오늘은 스모를 하겠습니다.”라며 그 자리에서 끈을 둘러 스모를 했습니다. 이러한 일이 계속되고, 멤버들의 감각도 조금씩 무뎌져, 이런 매일에도 익숙해져 갔습니다.

(2018년 7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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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함 투성이의 데뷔곡, 저조한 판매량에 침울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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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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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6회에선 실패가 거듭되던 데뷔당시의 일화를 밝힙니다.

'Hey! I Love You!'는 마카이노 코우지 작곡, 모리 유키노죠 작사의 곡이었다.


- 1977년 7월, 레이지는 데뷔곡 ‘Hey! I Love You!’를 발매했다.

데뷔 전부터 정보 프로그램인 ‘긴자 NOW!’에 출연하고 있었습니다. ‘오사카에 엄청난 밴드가 있다’란 분위기를 연출하는 영상도 제작했습니다. 우리가 무대에서 연주하고 있으면 관객들이 “와~” “꺄~”하며 열광하는 영상이었습니다.

이것엔 내막이 있는데, 소속사가 인기 아이돌 그룹 베이 시티 롤러스의 영상을 상영하는 필름 콘서트를 개최했습니다. 레이지는 스크린 반대편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콘서트의 마지막, 스크린을 올리며 레이지가 베이 시티 롤러스의 노래를 연주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이내 “무명 밴드가 멋대로 연주하지마!”라며 팬들이 격노합니다만, 앞부분만 찍으면 크게 환호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TV 출연 효과로 레이지는 나름대로 화제의 신인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리고 7월 24일, 유원지 ‘토시마엔’에서 데뷔 라이브 공연을 했습니다. 의기양양하게 무대에 올라섰습니다만 관중은 100명도 모이지 않았습니다. 음반도 통 팔리지 않았습니다. 그전까지 분위기가 좋았던 만큼 다들 실망하여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습니다.

데뷔곡이 전혀 팔리지 않았기에 두 번째 곡인 카무플라주는 조금 방향을 틀었습니다. 당시에 잘나가던 핑크 레이디의 히트곡을 쓰던 토쿠라 슌이치 씨에서 작곡을 부탁하고, 카마야츠 히로시(무슈 카마야츠) 씨의 세팅으로 작사는 마츠토야 유미 씨로 정해졌습니다. “이걸로도 안되면 어쩌지”라고 할 정도로 최고의 조합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대대로 흘러가진 않았습니다.

- 익숙지 않은 팝 곡조에 록밴드 지향이던 레이지는 당황했다.

당시에는 신곡을 연습해도 데모 테이프가 없었기에 손에는 악보만이 들려있었습니다. 악보를 보면 코드는 알 수 있다지만 팝의 ‘셔플’이란 리듬이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이제는 간단히 칠 수 있지만 록밴드로 활동해온 레이지가 연주하기엔 익숙하지 않은 리듬. 스튜디오에서 필사적으로 연습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데뷔곡은 레코딩을 하지 않았습니다. 녹음일 스튜디오에 가니 어째선지 스튜디오 뮤지션들도 불려왔더군요. 디렉터는 “너희들도 그들과 똑같은 곡을 녹음할거야”라며.

녹음 후에 곡을 비교해 들어보곤 “어느 쪽에 잘해보여?”라며 고르란 듯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셔플 리듬이 서툴렀기에 어쩔 수 없이 스튜디오 뮤지션의 녹음판을 쓰기로 했습니다.

악기는 겉모습뿐이고, 제대로 연주하지 않는 사례는 결코 드물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연주도 못하고, 레코딩도 못하며, 라이브를 열어도 팬이 오지 않았던 데뷔곡엔 억울한 추억만이 남아있습니다.

(2018년 7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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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록을 싫어하는 사장, 아이돌 노선으로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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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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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5회에선 아이돌 노선으로 데뷔하며 기대를 배신당한 꼴이 되어버린 뒷사정을 들어봅니다.

본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레이지는 아이돌 노선으로 진행된다 (우측에서 두번째가 본인)


- 1977년 봄, 7월에 프로데뷔를 앞둔 레이지는 상경하여 사무소가 준비한 시로카네다이의 외딴집에서 공동생활을 시작한다. 낮에는 음악 스튜디오에서 연습하고, 밤에는 메이지대학 부속 나카노 고등학교의 야간학교로 통학했다. 사무소는 레이지가 아이돌 노선으로 데뷔하기로 결정하고 있었다.

(60년대를 풍미한) 그룹사운드 장르의 분들이 스태프로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우리들의 머리는 더욱 짧아져 있었습니다. “록을 하자”라며 권유했던 카마야츠 히로시(무슈 카마야츠) 씨조차도 처음엔 함께 미팅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만, 어느 샌가 참여자들은 바뀌어 있었습니다.

닉네임도 정했습니다. 과거 그룹사운드에서도 더 타이거즈라면 줄리, 샐리 등의 이름이 있었기에 ‘이노우에’라면 어떨까했었습니다. 어느 밤, 공동생활 중이던 합숙소의 전화가 울렸습니다. 수화기의 너머엔 호텔 뉴저팬에서 회의 중이던 사무소의 높은 분들이었습니다. 대뜸 “‘밀키’와 ‘포키’ 중에 어떤가 좋아요?” 어느 쪽도 싫었습니다만 “포키로 부탁합니다.”라고 답해 저는 포키가 되었습니다.

저를 시작으로 한명씩 전화를 바꿔줬습니다. 카게야마 군은 프랑스어로 ‘미셸’로 결정. 탓칸은 ‘수지’라 불려 “그거 여자 이름 아니에요?” 히로유키의 ‘퍼니’는 이름조차 아니었습니다. 히구치 씨는 ‘데이비’였습니다. “싫어요. 12월 24일(크리스마스 이브) 출생이니 ‘이브’로 해줘요.”라고 반론하였습니다만 받아들여지진 않았습니다.

- 소속사 트라이앵글 프로덕션의 후지타 코이치 사장은 60년대 그룹사운드 밴드인 아웃캐스트에서 기타를 담당했다.

“이야기가 다르잖아요.” 멤버들은 후지타 사장에게 몇 번이나 호소했습니다. 하지만 “딥 퍼플도 사실은 재즈를 하고 싶었을 수도 있잖아. 하지만 지금은 록을 해야 할 수밖에 없는 걸지도 몰라.” 등 영문 모를 소리만 했습니다. 그리곤 “너희들은 베이 시티 롤러스 노선이다.”라고.

당시엔 영국 아이돌 그룹 베이 시티 롤러스가 일본에서 대인기였습니다. 후지타 사장은 그들의 영상 필름을 현지에서 구입해 일본 전국에서 필름 콘서트를 개최하여 거기서 번 돈으로 무언가를 하려던 찰나 레이지와 만났습니다. 그즈음부터 ‘일본판 베이 시티 롤러스’의 컨셉을 생각했겠지요.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후지타 사장은 하드록을 싫어했어요. 역시 그룹사운드 쪽 사람이었어요. 록을 싫어하니까 80년대 팝 스타일의 여름 노래인 스기야마 키요타카 & 오메가트라이브를 프로듀싱해서 대성공한 것이겠죠.

(2018년 7월 25일)

 

アイドル路線で売り出し 社長はハードロック嫌い|出世ナビ|NIKKEI STYLE

市場規模が膨らんだ「アニメソング(アニソン)」ビジネスの立役者の一人がバンダイナムコアーツの井上俊次副社長です。1970年代にロックバンド「レイジー」で一世を風靡しました。井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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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슈 카마야츠가 부모를 설득, 레이지로서 도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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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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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4회에선 레이지가 데뷔에 이르는 경위를 되돌아 봅니다.

이노우에 슌지 씨가 참가한 레이지는 1977년에 데뷔했다


- 도우미로서 가입한 레이지는 TV출연을 목표로 오디션에 응시한다.

1976년 11월, 칸사이 지방의 심야방송 ‘헬로 영’의 오디션을 받았습니다. 매주 오디션을 뚫은 아마추어 밴드가 연주할 수 있는 코너가 있었습니다.

오디션장은 오사카 히가시스미요시의 슈퍼마켓 앞이었습니다. 결과는 기쁘게도 합격. 저는 도우미였습니다. 오디션 후에는 레이지에서 빠질 생각이었습니다만 방송엔 같은 멤버로 나와야만 한다는 룰이 있어서 녹화가 있을 3~4개월 동안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방송 녹화장은 오사카 쥬소 인근의 스튜디오. 고등학교 친구들도 응원해주러 달려와 줬습니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당일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프로의 악기를 보고 ‘역시 대단하구나~’라고 감탄했었습니다.

연주는 한판승부로, 시험을 보는 기분이었습니다. 연주한건 딥 퍼플의 ‘BURN’. 가장 연주가 어렵기로 소문이 난 곡에 일부러 도전했었습니다. 연주 후, 사회자 중 한명이었던 카마야츠 히로시(무슈 카마야츠) 씨의 대기실에 불려갔습니다. 그리고 한마디. “너희들 도쿄에서 프로 활동하지 않겠니?”

- 카마야츠 씨가 오사카에서 가족들을 설득했다.

가족회의가 시작되었습니다. 다들 탓칸(타카사키 아키라)의 집에 집합했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부모님들은 대반대. 예능통이라는 소문이 있던 근처 아저씨한테 상담했습니다. 제 어머님은 “아들이 도쿄에 팔려간다.” 비슷한 기분이 들으셨다고 합니다. 그래도 카마야츠 씨께서 오사카로 와 설득해주신 것이 결정타가 되었습니다.

카마야츠 씨는 레이지를 하드록 밴드로 만들고 싶어 하셨습니다. “(영국 배드 컴퍼니의 보컬)폴 로저스에게 작곡받도록 하자. 작사는 폴의 일본인 부인에게 써달라고 하면 괜찮잖아. 록으로 하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해냈다. 우리들 록을 할 수 있어.”라며 모두들 아주 기뻐했습니다. 카마야츠 씨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긴 머리를 휘날리며, 다리에는 런던부츠를 신고 있었습니다.

데뷔가 정해지면서 도쿄 키타아오야마에 있던 소속사 트라이앵글 프로덕션에 인사하러 갔습니다. 그랬더니 “머리카락 좀 말끔하게 하고 와라.”라며 ‘PEEK-A-BOO’라는 유명한 미용실로 끌려갔습니다. 어떤 헤어스타일인지 조차도 알지 못한 채 싹둑. 우리들은 ‘아앗...’. 하드록도 런던부츠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일단 오사카로 돌아왔지만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면 부모님께서 깜짝 놀라실 것이기에 고민했습니다. 고향 JR 나가이 역에 도착해, 홈에서 마음을 진정시킨 후에야 귀가했던 기억이 납니다. ‘카마야츠 씨의 이야기랑 다르잖아‘. 불안하긴 했지만 이미 상경 날짜는 정해져 있었습니다.

(닛케이산업신문 2018년 7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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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퍼플의 충격, 카게야마 히로노부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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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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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2회에서는 중학시절 경음악과의 만남을 되돌아봅니다.

중학생 야구부 시절

- 중학2학년 때 경음악과 만나다.

“이노우에 군, 피아노 치잖아? 키보드 좀 쳐줘.” 문화제에서 연주하기 위해서 동급생들이 말을 걸어준 것이 경음악과의 만남이었습니다.

그 동급생이 들려준 것이 영국의 록밴드인 딥 퍼플. 오르간이라면 보통 일렉톤(전자 오르간) 같은 맑은 소리가 연상되지만, 딥 퍼플의 키보디스트였던 존 로드는 뒤틀린 소리로 와앗!하며 연주. 세상에 이런 음악도 있었냐며 크게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이게 제 인생 첫 밴드활동입니다. 문화제니까 스테이지는 학교의 체육관. 밴드명도 없이 “다음은 2학년의 누구누구가 부릅니다.”하는 세계였어요. 피아노 발표회를 제외하곤 사람 앞에서 연주하는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연주한 것은 딥 퍼플의 ‘하이웨이 스타’였을까요. 문화제가 끝나고서 그대로 경음악 동호회에 가입했습니다. 연습은 가정학과실에서 했습니다. 가정과 선생님께서 흥미를 가져주셔서 “써도 된단다.”라며 허락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같은 시기에 야구부는 그만뒀습니다. 문화제에서 연주하니 야구부 선생님께서 “그런 짓하려면 그만둬라.”라며 야단치셨거든요. 당시의 록음악은 담배 냄새가 진하고, 좀 불량한 이미지였어요. 입부당시엔 기대받은 신인 투수였습니디만, 신장이 전혀 자라지 않아 “차라리 아래서부터 언더 스로로 던져라.”라고 지시받았었습니다. “좀 싫네. 꼴불견이야.”라고 생각해 퇴부했었습니다. 그때부터 음악 일직선으로 집중했습니다.

- 경음악을 시작할 당시엔 드럼지망이었다.

TV의 음악 프로그램에서 더 스파이더스라든지 더 타이거스라든지 그룹 사운드를 꽤나 시청했었습니다. 드럼을 정말 좋아했습니다. 잡지를 허벅지에 감고, 긴 젓가락을 두드리며 연습을 하곤 했습니다.

경음악 동호회에서도 키보드와 드럼 양 쪽을 담당했었습니다. 동호회의 멤버와 떨어져 고등학교에 통학하던 때도 밴드를 계속했었습니다. 그 외에도 두 개, 세 개씩 밴드를 겸임하고 있었고, 거기에선 드럼을 치고 있었습니다.

- 1976년 4월, 야마토가와 고등학교에 입학.

입학하자 친구들로부터 “경음악부에 들어가보자.”라는 권유를 받았어요. 저는 중학교 때부터 밴드를 해왔으니까 자신만만하게 처들어갔죠.

경음악부실에 들어가니 구석진 곳에 같은 신입생의 남자아이가 드럼을 치며 놀고있었습니다. 그걸 본 제가 다가서며 “비켜. 내가 쳐보게.”라고. 일어선 남자아이는 컬리 헤어 스타일에 새하얀 몸을 해 얌전한 분위기를 풍겼습니다.

이름은 카게야마 히로노부(景山浩宣)군.

후에 밴드 ‘LAZY’에서 동고동락하고, 인기 애니메이션 ‘드래곤볼Z’ 등의 테마송을 불러 인기 애니송 가수로 발돋움하는 ‘카게야마 히로노부’였습니다.

(닛케이산업신문 2018년 7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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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송은 붐을 넘어. 그 주도는 레이지"

https://style.nikkei.com/article/DGXZZO59810050R00C20A6000000

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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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이노우에 씨는 ‘직장인비록’의 제1회에서 스스로의 성장 동력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어린시절 집앞에서

- 1960년 5월 15일, 오사카에서 태어나다.

남부 스미요시구에서 태어났습니다. 스미요시대사라는 큰 신사 근처로, 정말로 주택뿐인 변두리였습니다. 아버지는 중소기업의 경리부에서 일하는 샐러리맨. 어머니는 뜨개질이 특기로, 어디한테서 부탁을 받아 돈벌이를 하셨습니다. 제 스웨터도 만들어주셨네요. 집에 욕실이 없었기에 가까운 목욕탕에 다녔습니다. 3살 위인 형은 대범한 타입. 둘째인 저는 할머니만 찾는 아이였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가정으로, 음악적인 요소는 전혀 없었습니다.

유치원 때는 자동차를 좋아해서 양철 미니카를 갖고 놀았습니다. 주무시고 계신 할머니의 등에 미니카를 달렸어요. 항상 할머니 방에 틀어박혀 느긋하게 살았죠. 이웃 친구들이 현관 앞에서 “슌짱 놀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조모께선 “슌지는 자고 있단다~”라며 멋대로 내쫓아버리시곤 하셨어요.

초등학생이 되면서 활발한 성격이 되었습니다. 집 앞 광장에서 야구를 하곤 했어요. 꽤나 몸집이 큰 아이로, 정렬하면 뒤에서 두 번째. 초등학생 6학년 때 신장이 162센티미터가 되었습니다. 믿지 못할 이야기지만 지금의 신장은 161.5센티미터로 당시의 키가 더 컸어요. 그래서 중학교 야구부에 들어가자마자 기대 받는 대형 루키 취급. 포지션은 투수였습니다.

당시, 매월 2000엔씩 돈을 모금하여 오르간을 사는 것이 근처의 어머님들 사이에서 유행했습니다. 어머니도 적립하고 계셨었습니다. 저는 음악은 완전 꽝으로 남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것도 잘 못했습니다. 통지표에선 다섯 등급 중 2. “얘야, 음악은 2등급이잖니”라며 혼났었습니다. 그때 마침 적립금이 만기가 되어 사게 된 오르간이 음악과의 만남이었습니다.

“피아노도 배우렴.”이라는 말을 들어 근처의 ‘야마구치 피아노교실’에 다녔습니다. 남자아이가 적었기에 부끄럽기도 했지만 피아노 교실엔 만화책이 있었기에 일주일에 한번, 만화를 보기위해서 다녔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선생님의 교육방식이 능숙하셨던 거였네요. “슌짱은 제대로 연습했구나”라며 칭찬하고 치켜세워주셨었습니다.

때로는 아버지의 지인께서 집에 오셔서 “슌짱 한곡 연주해줘”라며. 당시에 인기 있던 엔카 등을 외워서 연주하면 “고맙구나!”라며 1000엔도 받았었습니다. 그렇게 TV에서 들리는 곡을 연습해 연주하는 것을 즐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스즈키 신이치씨가 개발한 ‘스즈키 메서드’라는 교육법으로 연습했었습니다. ‘초등과’나 ‘연구과’ 등 여러 단계의 시험이 있었고 과제곡은 클래식 명곡이었습니다. 과제 클리어를 위해 불태웠네요. 중학 1학년까지 계속해 ‘고등과’까진 땄습니다만 ‘연구과’에 들어갈 무렵엔 피아노에서 경음악으로 흥미가 옮겨갔습니다. 음악 성적은 ‘5등급’이 되었네요.

(닛케이산업신문 2018년 7월 19일)


- 이노우에 슌지.
1976년 록밴드 ‘LAZY’ 가입. 1977년 17세의 나이로 프로데뷔. 해체 후에도 음악활동을 계속해 90년대엔 프로듀서로서의 활약이 본격화. 1999년 애니메이션 음악을 중심으로 하는 레코드회사 란티스를 창업. 오사카 출신.

 

アニソンはブームを越えて 仕掛け人は元レイジー|出世ナビ|NIKKEI STYLE

市場規模が膨らんだ「アニメソング(アニソン)」ビジネスの立役者の一人がバンダイナムコアーツの井上俊次副社長です。1970年代にロックバンド「レイジー」で一世を風靡しました。井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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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오유키 은퇴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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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9일 열리는 『みみめめMIMI LIVE2017~Bon! Voyage!~』를 끝내고 미미메메MIMI가 해산, 그리고 타카오 유키는 예능계 졸업을 발표했다. 팬들에게는 충격적인 발표가 되었지만 앞으로는 새로운 자신을 찾아 인생의 큰 항해에 나선다고 한다. 모든 활동을 끝내고 나서 휴식 대신 해산, 졸업을 한 것에서부터 타카오 유키의 결의는 상당했다고 생각했다. 발표 후의 솔직한 마음을 들어보았다.


이것이 긍정적인 길로 가길 바란다고


예능계 졸업이라는 건 계속 맘먹었던 일인가요?

이렇게 메이저에 데뷔하고 노래할 수 있었던 걸로 12세부터의 꿈이 실현되었습니다. 지난 4년간 응원해주시는 많은 분들의 지원 속에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활동을 계속 하는 가운데에도 언제나 자신을 연마해 여러분에게 감동을 전하고 싶다고 매일 추구해왔습니다만 갑자기 멈춰서는 일이 있었고……. 모두에게 감동을 전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한편, 자신의 가능성, 자신과 맞대면하였을 때, 자신을 한번 멈춰 세웠을 때, 자신을 갈고닦아 앞으로의 긴 인생에서 더욱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전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연예계를 그만두는 결론에?

지금 미미메메MIMI의 보컬의 타카오 유키로서, 연예계활동을 졸업하고 한명의 인간으로서 자신을 갈고 닦아야 한다고 26세에서 27세의 사이에서 굉장히 많이 생각했었기에……. 사실은 많이 고민했었고 모두의 존재가 정말로 소중했기에 어중간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졸업을 결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인간으로서 더욱 성장하고 싶은 마음인가요?

자신의 가능성을 제한 없이 펼쳐보고 싶다.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큰 자신이 되어서 더욱 큰 소망을 전하고 싶다고 목표를 정했습니다.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 때가 많았나요?

많은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풍족한 환경에서 많은 스태프 분들에게 지원을 받으며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팬 여러분의 상냥한 응원을 받았습니다. 저는 지금의 환경에서 응석을 부리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해 홀로 자립할 수 있는 인간이 되고 싶었습니다. 이대로는 더 이상 위로 올라가는 것이 어렵다고 여겼습니다. 이 4년간의 마음을 헛수고로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일단 멈추기로 결단을 내렸습니다.


앞으로 구체적인 행보는?

라이브 공연 타이틀이 Bon! Voyage!로 여행을 떠날 때의 말로 “좋은 여행을!”이란 뜻으로 마치 항해에 나서는 마음입니다. 바다에선 어디가 남쪽이고 북쪽인지 알 수 없잖아요. 저도 마찬가지로 “이 길을 걷겠다!”라고 정해진 길을 걷기보다 지금 과감하게 뛰어나와 풍족한 환경에 있던 저를 그대로 내꺼내 갈고 닦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여기에 도전하며 “이런 모습의 저도 있었어요!”라며 여러분께 설명할 수 있을 진 모르겠습니다만.


홀로 여행을 떠나도 괜찮겠네요.

생각 중입니다.(웃음)


결정을 내릴 때 누구와 상담도 했었나요?

항상 여러 사람에게 상담합니다. 부모님이나 친구, 물론 제일 처음은 파트너인 챠모이입니다만 굉장히 많은 사람에게 상담하기 때문에 여러 사람의 의견에 흔들리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중요한 결정이므로 스스로 결정하려고 생각하고 가능한 상담하지 않기로 했었습니다만 챠모이에겐 꽤나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그러네요……. 마음속에서 결정을 내린 이후에도 이야기는 나눴습니다.


챠모이 씨는 어떤 역할을 하셨나요?

어떤 선택을 하던 제가 결정한 길을 응원하고 싶다고 이야기해줬습니다. 후회할 수도 있지만 어떤 선택도 자신의 노력여하에 따라 행복한 길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위해선 자신을 믿는 수밖에 없습니다. 챠모이는 제가 선택한 길을 함께 걸어가고 싶다고. 함께 응원한다는 생각으로 있어주었습니다.


우리 입장에선 무책임하지만 그만두지 말아 달라 이야기하고 싶기도 한데요.

감사합니다. 그래도 은퇴발표로 (twitter 등에서) 답글들을 정말 많이 읽어보았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전해질 정도로 여러분에게 미미메메MIMI가 들려졌음을 깨닫고 정말 기뻤습니다. 그래도 기쁜 반면에 이 결정이 헛일이 되지 않도록 은퇴 후에도 한명의 인간으로서 반드시 무언가를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반응이 기대이상이었나요?

그렇습니다. 꽤나 놀랐다고요.(웃음) 예상 이상으로 반응이 왔고, 뉴스에도 보도되어 설마 내 발표가 이런 식의 기사로 보도 되었다니!라며 놀랐습니다.


예상이지만 미미메메MIMI를 듣고 있는 사람은 실제론 꽤나 많았다고 생각이 됩니다. 애니메이션 주제가로서 꽤나 임팩트가 있었잖아요. 그래서 그런 반응을 보고서 지금까지의 활동을 다시 평가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되는데요.

평가는 모르겠지만 제가 이렇게 걸어온 길은 여러분에게 확실히 전해졌던 것이었을까, 여러분의 마음에 무언가를 새길 수 있었던 걸까란 생각을 굉장히 실감하고 있습니다.

미미메메MIMI를 좋아하고, 따라 와주시고, 라이브 공연이나 음악에 추억이 있으셨던 분, 공연에 가본 적은 없지만 애니메이션을 봐주셨던 분 등, 정말 많은 분들께서, 여러 장소에서 들어주셨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 음악이 누군가에게 확실히 전해졌단 걸 알게 되어서 감사의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누군가를 위해 곡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였다


4년간의 활동 중 기억에 남아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기뻤던 일도, 즐거웠던 광경도 너무 많아 고를 수 없지만 2016년 12월에 있었던 원맨라이브 『너의 히로인』의 아카사카 블리츠 단독공연은 저한테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퍼스트 라이브였던 아카사카 블리츠에서 다시 하는 라이브였고 세컨드 앨범 『きみのヒロインになりたくて』를 중심으로 하는 라이브였기에 가장 기합을 넣었던 소중한 공연이었습니다.

굉장히 만족스런 무대를 만들었다는 것도 그렇고, 무대 위에서 관객 분들과 마음속에서 많이 통하고 있구나! 라 느꼈던 순간이었습니다. 아마, 분명히 살면서 가장 기뻤던 때가 아닐까 할 정도로 크게 감동했었기에 절대 잊을 수 없는 추억입니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통하는 곳이 라이브 공연의 즐거움이지요.

데뷔 이래 가장 많이 변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누구를 위해 곡을 쓰는가란 것입니다. 중학생 때부터 작곡을 했었지만 스스로를 위해서 작사, 작곡을 했었습니다. 스스로가 쓰고 싶은 곡을 쓰고, 좋아하는 음악을 표현하는 것. 꽤나 스스로를 위해서 쓰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데뷔 이후 팬 여러분과 만나고 나서는 스스로를 위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서 곡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걸 시작으로 정말 좋은 팬 여러분을 만나고 싶다고, 데뷔하고 시간이 지나고, 공연을 하고, 어느 샌가 공연장의 얼굴을 떠올리며 곡을 쓰는 스스로가 있어서……. 그건 미미메메MIMI로서 데뷔하고 나서야 만나게 된 스스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위해서 감동을 전하는 스스로가 아니면 이 세상에 있는 의미가 없다고 해야 할까. 누군가에게 감동을 전하는, 그걸 계속해왔더니 주변 스태프들도 그렇고 관객 여러분도 그렇고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아티스트로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응석부려선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현재가 소중하고, 지금밖에 없다고 생각하기에 모험에 나서야 한다고. 기나긴 인생을 생각한다면 다시 태어날 필요가 있다고. 지금이 그 순간이겠죠.


그러네요. 확실히 이런 활동 외에도 지금 밖에 할 수 없는 일이 있는 순간도 있기 마련이죠.

20대에만 할 수 있는 것. 갈고 닦을 수만 있는 건. 정말 많다고 생각해요.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재밌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간다면 라이브 공연 말고도 제작 쪽에서의 추억이 있습니까?

‘1, 2, 소녀’라는 곡이 있는데 그 곡은 공연장에서 여러분의 분위기를 띄우기위해서 모두가 깃을 흔드는 이미지로 쓴 곡입니다. 그리고 ‘CANDY MAGIC’은 스스로가 성장할 수 있었던 곡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진 스스로의 체험이나 나만의 필터가 씐 망상으로 곡을 썼지만 역시 애니메이션 주제가를 맡은 것이라면 그 애니메이션이 진정으로 전하고자 하는 것이 무언인가하며 진짜로 생각하며 쓴 곡입니다.

『야마다군과 7인의 마녀』는 학원물이기도 하지만 무엇이 테마인지 깊게 파고 들어가면 한정된 시간이란 것이 떠오르기에 그 한정된 순간을 사탕으로 여기며 곡을 썼습니다. 그렇게 애니메이션의 테마를 생각하며 나만의 단어로 표현합니다. 그것이 전부 드러난 노래로 몇 번이나 가사를 다시 쓰며 시간을 들였습니다. 스스로의 껍질을 하나 벗어던진 곡이라고 생각합니다.


데뷔했었을 때는 어땠나요?

데뷔했을 땐 서있는 것만으로도 힘들었습니다. (웃음) 그야말로 초기인데요, 공식 홈페이지의 사진 촬영을 해야겠다고. 타카오유키로서의 첫 촬영으로 처음으로 프로에게 화장을 받아 마법에 걸린 기분이었습니다. 녹음 하나를 하는데 에도 엄청나게 많은 스태프 분들이 참여해주셨습니다.

언제나 피아노를 치면서 만들어졌던 제 노래가 편곡으로 인해 이렇게나 변하는 구나라던가. 녹음 뿐 아니라 믹스나 마스터링을 전부 거치면서 하나하나가 음악인으로서 공부가 되는 것들뿐이었기에 모든 게 신선했습니다.


‘센티멘털 러브’에서 처음으로 들었을 때는 목소리에서 굉장한 매력을 느꼈기에 그때는 성우가 아니라 J-POP 아티스트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네요. 처음엔 정체를 밝히지 않았으니까요.


덧붙여서 성우로서의 추억은?

이것도 굉장히 많습니다만 애프터 레코딩 장소에서 히미타스(아카네야 히미카)나 아오이짱 등 정말 좋아하는 친구들과 만날 수 있던 것이 굉장히 기쁜 일입니다. 녹음과는 다르게 굉장히 많은 분들이 참여하는 현장이기에 굉장히 긴장하고 있었으니까요.

그 다음으로는 여러 이벤트를 경험하면서 애니메이션에 대한 견해가 바뀌었고,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된다는 것이 재밌었습니다. 정말로 귀중한 체험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세컨드 앨범에선 아카네야 히미카 씨나 유우키 아오이 씨의 오리지널 보이스 드라마가 수록되어있지요. 둘로부터는 정말로 좋은 자극을 받았나보군요?

네. 연기자로서 존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웃음) 히미타스는 연기자뿐이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철저하게 살아가는 아이기에 평소와는 다른 부분을 함께 있으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나도 힘내야지! 라며 힘을 받았어요. 아오이짱은 아오이짱답게 친하게 지냈지만, 문득 대선배 유우키 아오이였구나라며. (웃음) 그녀의 인품이 여러 사람을 매료시키는 것이 전해지기에 그 인간력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패키지로 둘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로 큰 보물입니다.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웃음)


작곡은 중학생 때부터 하셨다는데, 작사, 작곡이 즐거우셨나요?

즐겁기도 했고 어렵기도 했었고 전부였네요. 어릴 때부터 쓰고 있었기에 제게 있어선 일기 같은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만 스스로의 일기가 이런 식이어선 안 된다고 데뷔 때부터 생각했었습니다. 팬 여러분을 기쁘게 해주는 곡은 이래선 안 된다고 생각하며 어렵구나라고 여겼던 부분도 있었습니다.

라이브 공연을 의식한 ‘天手古舞’도 타월을 돌리며 모두가 고조되는 곡을 만들기 위해 쓴 곡입니다만 사실 그런 곡을 만들려해도 업템포나 하이한 곡을 만들지 않았던 저이기에 껍질을 깰 필요가 있었습니다. 자신이 쓰기 쉬운 곡만 쓴다면 의미가 없기에 어렵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역시나 있었습니다.


일기를 쓰듯이 곡을 쓰셨다면 작곡이 일상생활이셨겠네요.

그렇습니다. 떠오르는 즉시 메모를 하고, 좋은 것이 있으면 데모를 만드는 형식이었습니다. 타이트한 스케줄이기도 한다면 콧노래로 곡이 태어나는 것은 아니기에 자연히 떠오르는걸 기다리기보다도 만들 수 있을 때 만들어 놓거나 여러 가지 패턴이 있었네요.


그래서 그렇게 작사, 작곡, 피아노 연주들이 바로바로 나오는군요.

일기 같은 것이기도 하고, 제 평생의 마음은 아티스트이기에 제가 할머니가 된다한들 피아노로 조금씩 곡을 만들고 있진 않을까 생각도 합니다. 그만둔다고 했지만 스스로를 연마하는 것이기도 하기에 곡은 쓰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발표 여부는 제쳐놓더라도 자신의 재능을 시들지 않게 계속 해주는 것은 솔직히 기쁘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마지막엔 모두가 웃는 얼굴이 되어주었으면


베스트 앨범이 나오는데, 지금까지의 활동을 되돌아보는 작품이 되는가요?

그렇습니다. 9월 13일에 『みみめめMIMI BEST ALBUM 〜Bon! Voyage!〜』를 내게 해주셨습니다. 베스트앨범을 내는 것은 생각도 못했던 일이기에 기쁩니다. 정말로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지금까지의 노래를 여러분에게 다시 전해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새로운 미공개 곡이나 새로 수록한 곡도 있기에 여러분에게 전해주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리라이미라이’라는 애니메이션 ‘AKIBA’S TRIP’ 엔딩과 ‘너에게 왈츠’라는 곡은 제가 처음으로 악곡제공을 해준 곡입니다만 실사판 ‘咲-Saki-’의 영화와 드라마의 주제가입니다. 그 곡을 셀프 커버하여 수록했습니다. 첫 공개기에 즐겨주세요.

‘너에게 왈츠’는 스스로 말하는 것도 뭐하지만, 굉장히 좋아하는 곡입니다. 스스로 불러서 여러분에게 전해줄 수 있기에 기쁩니다. 그 곡은 지금의 기분을 겹쳐놓았기에 부디 가사를 읽으며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라이브 공연은 어떤가요? 셋리스트도 생각하시나요?

스스로가 어떤 곡을 부르고 싶다, 몇 번째에 이러한 곡을 넣고 싶다고 등 여러 가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타이틀은 제가 생각한 『Bon! Voyage!』로 마지막에 모두가 웃는 얼굴이 되어 주셨으면 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입니다. 그러니까 모두가 웃는 얼굴이 될 수 있는 셋리스트를 짜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공연에서 하고 싶은 것은?

우선은 하고 싶은 곡이 너무 많아서, 노래를 전해주고 싶은 것이 첫 번째네요. 마지막까지 듣고 나면 역시 미미메메MIMI를 좋아하길 잘했다고 생각이 드는, 그러한 음악을 전해주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역시나 쓸쓸해져버리겠네요.

모두에 헤어진다는 것은 쓸쓸함보다도 모두와 만났던 기쁨을 곱씹을 수 있는 라이브 공연으로 만들고 싶기에 저는 울지 않을 겁니다! 노력해보겠습니다. 모두가 웃는 얼굴이 되어서 내일도 미미메메MIMI의 음악을 들으며 힘내야지라고. 사람들 각자 여러 가지 인생이 있고, 여러 가지 매일이 있지만, 모두는 자기가 인생의 주역이라 여기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매진이라더군요.

여러분, 꼭 물건은 라커룸에 넣고, 수분보충을 하면서 즐겨주세요. 저도 최선을 다할 것이기에 여러분도 그만큼의 각오는 해주세요. (웃음)


그럼 마지막으로, 메시지 부탁합니다.

이건 꼭, 응원해주시던 팬 여러분도 생각해주셨으면 하는 건데 해산, 졸업을 해도, 파이널 라이브가 끝이 난다해도 저와 챠모이가 함께 전해온 음악은 여러분과의 인연이랄까, 언제나 들으면 모두와 연결되어있는 기분이 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쓸쓸해지는 기분도 듭니다만 역시 음악은 색이 바라지 않기에 여러분과의 인연도 바라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계속 미미메메MIMI의 음악을 들으며, 사랑받을 수 있다면 기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제부터 새로운 도전을 할 것이기에 타카오 열심히 하고 있을까, 발버둥 치고 있진 않을까라고 생각되리라 생각됩니다. 저도 여러분을 생각하고 있기에 다들 응원해주시면 기쁘겠습니다.



촬영 중 “결혼이 이유라는 의견도 봤지만 전혀 예정 없습니다.”라며 웃는 얼굴로 이야기했으며 인터뷰도 차분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그만큼 큰 결단이란 것이 느껴졌으나…… 도중에 다른 형태로 감동을 전하는 도전을 하고 싶다는 말도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활동을 부정하는 것은 전혀 없었으며 그야말로 감사의 마음과 음악을 사랑한다는 마음은 전해져왔다.


앞으로의 일은 전혀 알 수 없지만 그녀는 앞으로도 음악과 맞닿아있을 것이다. 지금은 그것뿐이지만 기쁘게 생각된다. 그리고 라스트 라이브에서 그녀에게 “좋은 여행을”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취재, 글 : 츠카코시 준이치

촬영 : 나카무라 유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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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sirabee.com/2017/07/14/20161204572/


언론 사이트 しらべえ가 전한 평론가 츠네미 요헤이씨와 ANTHEM의 리더 시바타 나오토씨의 대담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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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헤비메탈계의 중진, ANTHEM이 약 3년 만에 새 앨범 ‘ENGRAVED’를 릴리스했다.


전작 ‘ABSOLUTE WORLD’부터 보컬 모리카와 유키오가 복귀. 서포트 멤버였던 타마루 아츠시가 정식멤버가 되었다. 신체제 하에서 2015년에는 결성 30주년을 맞이했다.


작년에는 새 앨범 리코딩의 연기를 결단하고 라이브 활동에 몰두해왔다. 대망의 신작은 Judas Priest를 비롯해 수많은 메탈계의 명반을 다뤘던 크리스 탕가리즈를 오랜만에 믹스로 기용했다. 또한 기타리스트 시미즈 아키오가 앨범의 반을 작곡했다.


외부 작사가로 엔도 후비토씨를 기용했는데 지금까지 리더이자 베이시스트인 시바타 나오토가 작사 작곡의 대부분을 맡아왔기에 이례적인 일이다.


나는 14세 때부터 이 밴드의 팬이었다. 1992년에 한번 해체했다가 나중에 부활한 이후에도 계속 듣고 있다. 그들의 음악을 사랑할 뿐 아니라 그 엄격한 자세에 일일이 자극받고 있다.


리더이자 베이시스트인 시바타 나오토와 인터뷰할 기회를 얻었다. 음악지에선 읽을 수 없는 열렬한 팬의 시점에서 꺼내온 생생한 목소리를 즐겨주길 바란다.



- 멤버들의 개성이 전해지는 ‘재미있는’ 앨범


츠네미 요헤이

새 앨범 ‘ENGRAVED’. 음원을 받고나서 일주일간 벌써 스무 번 이상 듣고 있습니다. 메탈 앨범에는 무례한 표현일지도 모르겠지만 솔직한 감상은 ‘재미있는’ 앨범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바타 나오토

이번 작품은 아직 객관적으로 들을 순 없지만 ‘재미있다’라는 표현에 관해선 어쩌면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이란 느낌입니다.


이번 앨범은 21세기의 ‘HUNTING TIME’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딱 1988년에 모리카와 (유키오)씨가 가입하여 ‘GYPSY WAYS’, ‘HUNTING TIME’을 연달아 발표했었죠.


이번 ‘ENGRAVED’도 모리카와 씨가 복귀한 새로운 체제에서 두 번째 앨범이군요. 팬으로써 기대했었는데, 압박이 크지 않았습니까?


모리카와가 복귀했었던 지난 앨범 ‘ABSOLUTE WORLD’에선 우리들도 분명한 관심을 느끼고 있었기에 확실히 이번에는 그걸 넘어서고 싶단 마음이 있었네요.


리코딩 연기도 그런 마음이 강했었기 때문이었나요?


소재자체는 있었습니다만 아직 여물지 않은 느낌이었기에 연기하기로 했었습니다.



- 멤버의 개성과 동기


팍하고 들으면 ANTHEM이라고는 알 수 있겠지만 예전보다도 진화하고 있다고. 멤버의 개성이 드러난다고도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고 끓어올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재밌다”라고 느꼈습니다.


역시나 자극이랄까 동기가 가장 중요했기에 거기야말로 창작의 진실이 있다고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느끼고 있었습니다. 오랜 기간 좋아하는 걸 추구하는 와중에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여러 가지 일을 겪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추진력에 맡기며 일을 해왔습니다. 전형적으로 멤버교체겠네요. 안쎔을 재결성하고 난 이후에는 10년 이상 멤버교체가 없었는데, 어느 날 모두가 같은 텐션으로 음악 제작이나 활동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개개인의 동기를 찾아내어 그걸 항상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 이것이 이 세계에 살아남기 위해선 꽤나 중요한 조건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의욕이 없어졌다면 그만둬도 좋아.”였으나 멤버들은 인생을 걸고 길고 진한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기에 어떻게든 화학반응을 일으키기 위해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어왔습니다.


하지만 일어나지 않을 때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시절에 우연히 병에 걸리면서 앞으로의 음악활동에 후회를 남기지 않겠다고 생각해 결과적으로 현재의 라인업이 되었습니다. 보컬과 드럼을 변경한 것입니다.



- 기타리스트 시미즈 아키오의 활약


이번에는 기타리스트 시미조 아키오씨의 곡이 앨범의 반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저는 시미즈씨가 더 주장해도 좋다고 생각했기에 기쁩니다.


시미즈가 주장하는 방법은 음악의 수만으로는 절대로 드러낼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이것저것 해 본 결과입니다. 제 이미지로는 저와 시미즈의 관계는 정맥과 동맥처럼 서로 얽혀있다 봅니다. 어느 쪽이 동맥이냐 이런 건 아니고. (웃음)


에너지가 왕복하는 2개의 파이프같이. 캐릭터도 개성도 방법론도 다르지만 같은 밴드로서 서로 자극해가며 해나가고 있습니다. 시미즈는 빈틈없이 준비하고서 일하는 타입으로 순간적으로 타오르는 불길을 잡아내는 느낌의 저하고는 어떤 면에선 물과 기름 같은 관계입니다. 그래도 제대로 된 ANTHEM의 사운드를 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웃음)


팬으로선 시미즈씨가 좀 더 인정받았으면 하고 생각하니까요.


그건 제가 제일 많이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너희들 알겠니?”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웃음) 어떻게 하면 시미즈의 힘이 제대로 보일까? 라던가 (웃음)


앨범 중반의 ‘MIDNIGHT GROWL’, ‘REACTIVE DESIRE’, ‘SACRED TRACE’ 등은 그의 세계를 뛰어나게 표현하고 있는데도 ANTHEM이기 까지 합니다.



- 앨범 제작 방식을 바꿨다


덧붙여서, 이번 앨범의 제작에 변화한 점은 없습니까?


지금까지의 앨범에선 이른바 ANTHEM화한 리코딩을 수수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제 시선에 맞춘 틀을 갖추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소극적인 자세로 소재의 원형을 유지하면서 전부 흘려보내는 느낌으로 했습니다. (쓴웃음)


그걸로 음악이 ANTHEM이 아니게 되어버린다면 그것도 재밌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멤버들에게도 “기본적으로 느끼는 것 그대로 해줘”라고 전했습니다. 객관적인 ANTHEM다운 것이란 뭔가를 미뤄두더라도 너희들은 계속 이 밴드에서 활동하고 있으니까 너희들이 좋다고 여기는 것이 분명 ANTHEM다운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손은 댔지만 실제로 만들어보니 신선한 부분도 있었고 순전히 ANTHEM이란 사운드도 있었네요. 오랜 기간을 거치면서 서로가 서로를 계속 자극해오면서 우리만의 개성을 연마했음을 깨달았습니다.


마스터링을 종료하는 순간까지 집중은 했었습니다만 만약 이 방법론으로 앨범이 완성된다면 “앞으로의 일 따윈 어떻게 되든 좋다.”라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부정적인 “아무래도 좋다”가 아니고요. (웃음)



- 리코딩은 그 순간의 불길을 묘사


“아무래도 좋다”는 록적인 충동이군요. 끓어오르는 느낌입니다. 그 자리에서 무슨 일이 터지든 좋다고. 최근 ANTHEM 라이브에도 시바타씨가 피크를 던지고 손가락으로 연주하거나 다른 프레이즈를 갑자기 연주하기도 하지요. 거기에 끓어오르는 충동, 록을 듣고 싶어 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의 리코딩에선 그 자리에서 순간적으로 스파크가 일어나 튀어 오르는 불꽃을 사진으로 찍는 듯한 감각을 의식합니다. 사실은 주도면밀하게 준비하여 데모 테이프를 가지고 가는 편이 효율 좋게 작업하는 방식일지도 모릅니다. “올바른” 방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나, 개인의 마음이 준비하면 할수록 식어버리고 맙니다. (쓴웃음) 오랫동안 방에 틀어박혀 기타를 친 적도 있습니다만 그건 세밀하게 곡을 완성하기 보다는 충동이든가 에너지든가를 압축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음에 불이 붙지 않으면 어째선지 기분이 나빠집니다. 물건을 만들어 내보인다는 것은 엄청난 에너지와 배짱이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전부 드러내는 것 같기에 저는 이미지적으로 표현한다면 즉흥연주를 녹음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웃음)


최근 라이브가 늘고 있는 것도 어쩌면 그런 마음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리허설은 몇 번이고 하고 있지만 언제 제 마음 속의 무언가가 일어나도 몸이 제대로 반응하도록 하는 거지, 능숙한 연주를 매번 똑같이 하라고 리허설 하는 건 아닙니다.


물론 프로니까 최저한도의 연주는 하고 있습니다만 제 라이브 CD에서 죄다 똑같은 플레이를 할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웃음) 예를 들면 이틀 연속으로 연주해도 전날과는 다른 접근 방식에 도전하고 있단 걸 보이고 싶습니다.


그걸 실행하기엔 엄청난 집중력이 들어갑니다만 (웃음) 철저한 집중으로 연주가 되는 밤엔 좀처럼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각성하고 있으니까요. 그러한 감각에 한번 맞대어 본다면, 빵! 하고 터지면서 닫혔던 뭔가가 열리지 않을까요. (쓴웃음)



- 후지소닉 2017


그 열량은 팬에게 전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는 후지소닉 2017 출연이 결정되었습니다. 메탈 밴드는 ANTHEM 뿐. 이색적이지만 일반에 ANTHEM이 전해진다는 것이 기쁩니다.


이번에 정말 좋아하는 가야마 유조씨와 함께하게 되어 그것도 기쁩니다. 소학교 저학년 시절에 누나나 여동생을 관객으로 빗자루로 기타 대신 삼아 치던 ‘일렉기타의 어린 대장’ 놀이를 했었으니까요. (웃음)


이건 또 메탈 전문지에선 이야기하지 않은 에피소드네요. (웃음)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의 이벤트일지 모르겠지만 주어진 시간을 꽉 채워 연주하여 어떤 눈으로 비칠지, 재미 반 두려움 반 입니다. 하지만 재밌을 거 같아요. 이렇게 오래 했어도 아직도 이렇게 두근거리는 장소가 있다고 생각하니 뭔가 행복합니다.



- 암 극복으로 달라진 점


활동량의 양와 폭으로 ANTHEM이 변화하고 있는 것은 있습니까?


최근에는 특히나 스탭들도 포함하여 도전하는 것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안정적인 루틴의 활동도 중요합니다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듭니다.


최선으로 준비하여 스테이지에 서서 전력으로 합니다. 암이라는 병을 경험했었기에 더욱 인생관이 명확해진 것일지도. 뭐 예전부터 이런 경향이 있기도 했었고. (웃음)


암을 극복한 이후 시바타씨도 ANTHEM도 바뀐 것 같습니다. 더욱 해방되었고 더욱 엄격해졌습니다.


인생을 즐기고 싶으니까 무엇이든 전력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력을 다하면 실패해도 어딘가 즐겁습니다. 성공하면 배로 즐거워지죠. 어중간하면 실패하면 후회가 남고, 운이 좋게 성공해도 만족감이 낮으니까요.


병에 걸리면서 지금까지의 인생이 여전히 어중간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스스로가 스스로를 걷어찬다면 이를 바라보고 있는 멤버들도 “그럼 나도”가 됩니다. 스태프들도 그 분위기가 되어 “더 재밌는 일은 없을까”라는 생각을 시작하더군요. (웃음)


지금은 다 큰 어른이 장난을 치고 있군요.


그렇습니다. 그런 느낌. (웃음) 저에게 있어 인생을 즐기는 지름길은 더욱 음악과 멤버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마음으로부터 존경할 수 있는 동료가 필요합니다. 멤버, 스태프 함께 어디까지 달릴 수 있을지 지금으로선 철저하게 즐기고 싶습니다.



- ANTHEM은 지금 최고로 끓어오르고 있다


직장인으로서의 발언이기도 합니다만 지금은 검색하면 여러 가지 노하우가 인터넷에 나오기 때문에 멋있는 기획서는 누구라도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끓어오르는 기획은 거의 없어요. 샐러리맨 시절엔 영업을 하거나 영업을 당하거나했지만 기획서에 오타가 있어도 끓어오를 수 있는 영업맨은 없으니까요.


그러던 중 보기에는 완성도가 없어 보이지만 사업파트너로서 이 사람과 해야만 한다고. 이 사람은 끓어오를 정도로 재밌어 보이니까 한번 걸어보자고.


끌리는군요. 정말 공감됩니다.


끓어오르고, 흘러넘치는 느낌이 중요합니다. 곧 환갑을 맞이하는 리더 시바타씨에게 있어 지금의 ANTHEM이 최고로 끓어오르는 시기라는건 재밌습니다.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웃음) 지금은 거의 쉬지 않고 일하고 있습니다. 밤에 산책하면서 ‘이 저돌맹진 2017년. 이 앞에는 무엇이 있는 걸까“라고 생각하다 후훗하고 웃은 적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BOUND TO BREAK’라던가 ‘GYPSY WAYS’가 젊은 시절의 ANTHEM의 피크였다면 이제 두 번째 피크 같은 건 우리가 직접 연출해내지 못한다면? 이라던가. 그런 터무니없는 당근이 눈앞에 획하니 던져졌다면 우린 분명 달릴 수밖에 없을 거란 걸 생각했었지요. (웃음)


우리들은 일본에서만 활동하기 위해 재결성했습니다. 일본에서 제대로 사업하는 걸 전제조건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무리하게 무보수로 해외를 목표하는 느낌이 아니라 활동이랄까, 어쨌든 일본에 발을 붙인 활동이었습니다.


물론 해외 여러 나라에 CD도 발매하고 싶고, 당연히 라이브도 하고 싶습니다. 뮤지션을 하고 있다면 누구나 생각하는 것이군요. 지금의 라인업이 되고나선 이런저런 흉계를 꾸미고 있어요. (웃음)


그 말을 들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ENGRAVED’ 앨범의 마지막 곡은 “Let’s go”로 끝나지요. 앞으로 ANTHEM의 활동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해외라이브도 기대하고 있어요. 성지 가와사키도 정말 좋지만 무도관에 서는 ANTHEM도 보고 싶습니다.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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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다 최고. 이 말 밖에 쓸게없네.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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