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재능들이 손댄 ‘하루히’가 대폭발, ‘럭키스타도 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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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18회에선 애니메이션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럭키스타의 연이은 히트에 대한 뒷이야기를 밝힙니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은 주제가 뿐 아니라 삽입곡도 인기였다

- 2006년 방송된 TV 애니메이션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은 사회현상으로 이어졌다.

 

과감하게 젊은이에게 프로듀스를 맡겼습니다. 그 전까진 사장인 저와 창립 멤버인 이토 요시유키 씨가 음악 프로듀서를 맡고 있었습니다. “너한테 전부 맡길테니까, 곤란해지면 물어봐라며 보냈던 것은 사이토 시게루 씨. 당시 란티스에 막 입사했던 30세 언저리의 젊은이였습니다.

 

BGM이나 삽입곡을 작곡한 코우사키 사토루 씨는 남코(현 반다이 남코 엔터테인먼트) 출신. 스즈미야 하루히에서 연출이나 각본을 담당했던 야마모토 유타카 씨하고는 교토대학에서 친구사이였습니다. 작사는 하타 아키 씨. 처음에는 란티스의 거래처에서 근무하는 아르바이트였습니다만, “분명 재밌는 가사를 써줄테니까라던 스태프의 보증으로 작사를 의뢰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CD 매출 톱클래스인 대인기 크리에이터입니다.

 

주인공인 스즈미야 하루히는 히라노 아야 씨가 연기했습니다. 첫만남은 2001년에 방송된 애니메이션 천사의 꼬리였습니다. 캐릭터송 녹음 중에 아직 중학생이던 그녀의 리듬감이나 감각은 성우진 중에서도 돋보였습니다. 급성장 중인 히라노 씨와 활발하고 에너지 넘치는 하루히의 캐릭터가 잘 어울렸습니다.

 

젊은 스탭이 대히트를 성공시키면서, 그때까지 소소하게 히트를 거듭했던 저는 새로운 시대의 바람을 느꼈습니다. 킹레코드의 오오츠키 토시미치 씨도 잘됐네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서라며 기뻐해주셨습니다.

 

제가 사운드 프로듀스를 하게 되면, 이것저것 참견을 하고 싶어집니다. 스즈미야 하루히를 성공으로 이끈 것은 젊은 크리에이터의 자유로운 아이디어였습니다. 이 작품 이후, 저는 프로듀서로서 전면에 나서는 일은 없어집니다. 스즈미야 하루히는 란티스의 터닝포인트가 되었습니다.

 

- 스즈미야 하루히의 엔딩곡 하레하레유카이에서 등장인물이 추는 댄스를 따라하는 팬들이 속출. 그 열기를 공유하며 증폭하기 시작한 것이 동시기에 나타난 유튜브니코니코동화’. 애니메이션의 인기가 제작자의 의도를 넘어서는 인터넷 시대에 돌입했다.

 

팬이 애니메이션 작품을 응원하는 트렌드가 생긴 것은 최근입니다. 2007년 방송한 럭키스타에서는 니코니코동화 등에서 주제가 가져가! 세라복을 오리콘 랭킹 1위로 만들자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당초, 초기출하량은 5만매로 정해져있었습니다. ‘이 매수라면 1위는 무리겠지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큰일이 일어났어요팬들의 심기에 민감한 스태프들이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팬과 제일 가까운 란티스가 품절을 일으켜선 안된다미팅을 열어 출하 매수를 2배인 10만매로 늘리기로 했습니다. 결과는 오리콘 2위였습니다. 스즈미야 하루히와 럭키스타의 히트가 애니송 씬(scene)을 바꿨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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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사마'의 성공, 팬들의 강력한 일체감에 놀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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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17회에선 일상계 애니메이션이나 심야 애니메이션이 떠오르던 시기를 회상합니다.

2005년에 시작한 '애니멜로 섬머 라이브'에서 애니송의 열겨를 실감했다

- 2005, 휴대전화용 컨텐츠 송신의 드왕고가 애니송 라이브 이벤트 아니멜로 섬머 라이브(아니사마)를 개최. 프로듀서 오오타 토요키 씨(현재 드왕고 산하 메이지스 사장)는 란티스의 이노우에 씨에게 협력을 청했다.

 

아니사마 개최는 애니송을 둘러싼 분위기가 확하고 바뀐 순간이 아닐까요. 1회는 국립 요요기 경기장의 제1 체육관이 회장이었습니다. 아직 애니송 라이브가 그다지 많지 않던 시기. 정말 관객이 들어올까 걱정도 했습니다만, 오오타 씨는 반드시 요요기에서 성공시킨다라고. 최근의 아니사마에서는 생각도 못할 일입니다만 당시에는 출연자도 모이지 않아 곤란했었습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관중석은 90% 정도 찼습니다. 요요기 경기장에서의 콘서트 같은건 경험이 없기 때문에, 무대 위에서 출연자가 모두 감동해 울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계속 불러온 애니송에 이렇게나 많은 팬이 있냐며. 자기가 해온 일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거죠. 저나 스태프도 울고 있었습니다.

 

아니사마의 성공에 용기를 얻을 수 있었던 건 팬들도 마찬가지 였겠죠. 당시엔 펜라이트가 유행하던 시기였습니다. 8000~9000명이 일제히 펜라이트를 흔드는 모습을 보며 관객들도 애니송을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았구나하고 자신감을 가졌을 겁니다.

 

놀라운 점은 모든 노래를 다같이 응원하는 애니송 팬들의 일체감입니다. J-POP 음악 페스티벌에선 응원하는 아티스트가 노래를 마치고나면 관객들이 바뀝니다.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은 일입니다만, 애니송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같이 응원해줍니다. 이것은 애니송만의 독특한, 세계공통의 문화입니다. 애니송의 장르를 더욱 넓어질지도 모른다. 1회의 아니사마에서 5시간 동안 계속 응원해주시는 팬들을 눈앞에 두고, 그렇게 느꼈습니다.

 

- 아이돌그룹의 융성도 애니송에 혜택을 줬다고 한다.

 

2005년은 ’AKB48’이 활동을 시작하던 시기입니다. AKB48의 노래의 작사는 아키모토 야스시 씨입니다만, 작곡은 곡에 따라서 각각 다른 크리에이터들이 다뤘습니다. ‘모닝구무스메는 작사도 작곡도 모두 츤쿠씨가 다뤘습니다. AKB48의 등장은 크리에이터들에게 새로이 활약할 장소를 제공한 것입니다.

 

AKB48에서 그룹이나 멤버의 특징을 이해하고 작곡에 활용하는 경험을 했던 작곡가가 애니송 업계에서도 활약해주었습니다. 사실 아이돌업계와 애니송업계는 크리에이터를 통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프로작곡가가 맹활약하고 있다는 점에선 레이지의 현역시절과 분위기가 비슷합니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럭키스타’. 이후 애니송에 이끌려 온 젊고 재능있는 크리에이터들이 많은 히트 애니송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2018810)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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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성우의 노래를 지원해 미디어믹스의 출발점으로 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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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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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16회에선 일상계 애니메이션이나 심야 애니메이션이 떠오르던 시기를 회상합니다.

'아즈망가대왕'의 성공이 '일상계'라 불리우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이 늘어나는 계기로. 앨범 'Tribute to 아즈망가대왕'

- 란티스는 애니메이션 성우의 음악 프로듀스에도 힘을 쏟았다.

 

란티스의 기둥은 셋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가희(歌姬). 쿠리바야시 미나미 씨나 yozuca* , CooRie 씨입니다. 당시엔 PC게임 주제가의 일이 많았습니다. 두 번째는 모에()’가 아닌 불타오르는 계열() 가수. 카게야마 군 등이 결성한 JAM Project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신인 성우들. 노가와 사쿠라 씨, 치바 사에코 씨, 신타니 료코 씨들이었습니다.

 

2001년에 음악제작을 맡은 것이 애니메이션 갤럭시 앤젤’. 캐릭터송을 만들어 해당 등장인물을 연기한 성우들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음악을 축으로 한 미디어믹스의 원점입니다. 여주인공 밀푀유 사쿠라바 역을 맡은 신타니 씨는 솔로 데뷔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인기성우의 음악활동이 늘었지만 당시에는 애니메이션 성우가 노래하거나 이벤트에 출연하는 사례가 아직 드물었습니다.

 

- 후에 킹레코드 전무가 되는 애니메이션 프로듀서 오오츠키 토시미치 씨를 만난다.

 

미디어웍스(KADOKAWA)의 미디어믹스 작품 시스터 프린세스로 게임판 음악제작을 노렸습니다. 협상을 위해서 애니메이션 음악 제작이 확정된 킹레코드에 오오츠키 토시미치 씨를 찾아갔습니다.

 

그래, 자네가 란티스인가첫 대면부터 느닷없이 압도당했습니다. 동세대지만 박력이 대단했어요.

 

움찔거리면서 게임만이라도 맡겨주십시오라고 말을 꺼내니, “이노우에 씨 말야, 애니만드는데 돈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알아?”라는 오오츠키 씨. 여기에 더해 애니에 투자할 경우, 게임쪽 음악까지 담당하지 않으면 이쪽은 회수가 안된다고라고. 결국엔 그래도, 좋습니다. 좋은 곡을 만들어주세요라며 OK를 받았습니다. 그것이 오오츠키 씨와의 만남입니다.

 

2002, 만화 아즈망가대왕의 애니메이션화로 제작위원회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금액은 수천만엔. 창업한지 얼마되지 않은 벤처기업였기에, ‘목숨을 건출자였습니다.

 

판궈처인 미디어웍스는 란티스와 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았는데, 실은 오오츠키 씨의 추천이 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란티스가 아니면 안돼라며, 란티스의 출자를 인정해주셨습니다. 오오츠키 씨는 란티스에 재미있는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이란 인상이 심어져있었답니다. 남쪽으로 이주한 지금도 교제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즈망가대왕은 정겨운 일상생활을 그리는 일상계애니메이션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심야 애니메이션의 주목도가 높아지면서 라디오에선 관련 프로그램이 늘어났습니다. 그 무렵에는 현재 이사인 사쿠라이 유카 씨도 가세하면서 란티스의 동료도 늘어나갔습니다.

 

무언가가 터질 새벽녘. 그런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201889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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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보험을 해지하여 자본금으로. 직원 넷이서 창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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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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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15회에선 스스로 자금을 대어 음반회사를 설립한 당시를 되돌아 봅니다.

 

오기 부분에 씰을 붙여 발매한 앨범 'I'm in you' 라이너노트의 마지막 페이지

1999. 애니메이션 음악을 중심으로 하는 음반회사를 창업한다.

 

당시엔 주식회사 설립에 자본금 1000만엔이 필요했습니다. 저금만으로는 부족해 생명보험도 해약해서 돈을 모았습니다. 회사명에는 매직가든이나 솔리드 복스같은 여러 가지 안이 있었습니다. 고민 끝에 과거 아사미야 키아 선생님께서 이름 지어주신 란티스로 결정했습니다.

 

곡 제작은 창업멤버로 할수 있었습니다만 문제는 디스트리뷰션(판매)였습니다. 그렇기에 유통망을 가진 판매 파트너를 찾아 유니버설 뮤직 등 대기업을 차례로 돌았습니다. 설립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란티스와 계약을 맺어줄 리 없었고, 모조리 거절당했습니다.

 

방문할 기업이 점점 줄어들어, 마지막은 킹레코드였습니다. 애니메이션 전문 레이블 스타차일드가 있어 무리란걸 알고 있었지만, 연간 매출액 2억엔이라는 사업계획을 믿어주어 계약이 결정되었습니다. 책임자는 시게마츠 히데토시 씨. 80년대 네버랜드의 디렉터로 신세를 졌었는데, 당시 임원으로 승진했었습니다.

 

운도 따랐습니다. 킹레코드에선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프로듀서이기도 했던 실력자 오오츠키 토시미치 씨가 때마침 외부에서 일하셨던 시기. 나중에 오오츠키 씨가 돌아와 이런 얘기는 듣지 못했어!”라며 화내셨다고 합니다. 시게마츠 씨의 승진과 오오츠키 씨의 부재. 이 두 가지가 행운의 포인트였습니다.

 

창업초만 하여도 란티스는 직원 4명인 세계최소 음반사였다.

 

에비스에 위치한 맨션의 방 하나를 얻어 시작을 했습니다. 집세는 월 35만엔 정도. 신용이 없었기에 리스 회사도 의자나 책상을 빌려주진 않았습니다.

 

카펫위엔 집에서 가져온 전화기와 작은 복사기 하나 뿐. 킹레코드 분이 인사를 하러 오시면 몹시 허둥지둥했었습니다. “회사가 붐벼서라고 거짓말을 하곤 근처의 호텔 엑셀런트 에비스의 카페에서 회의를 가졌습니다.

 

란티스의 첫 작품은 고등학생 시절의 친구인 카게야마 히로노부시 씨의 CD.

 

그의 노래를 어쿠스틱 버전으로 편곡해 저도 몇 곡인가 피아노를 쳤습니다. 어쿠스틱으로 만든 것은 녹음하는 데에 돈이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재킷 촬영도 스튜디오 구석에서 끝냈습니다.

 

인쇄소에서 온 라이너 노트(음반에 붙이는 해설지)를 보고 깜짝놀랐습니다. ‘KAGEYAMA H’O’RONOBU“라고 오기. ”진짜야?“ 말문이 막혔습니다. 지금이라면 다시 찍습니다만 당시엔 돈이 없었습니다. ‘HIRONOBU’ 스티커를 만들어서 다같이 한장한장 붙였어요. 4000장정도 붙였을까요? 카게야마 군에게는 미안한 일을 했습니다만 본인은 재밌는 일 하고 있네~“라며 웃어 넘겨줬습니다.

 

(201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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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한 애니메이션에 어울리는 애니송을- 창업을 결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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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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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14회에선 애니송 음반회사 설립에 대해 밝힙니다.

'기동신세기 건담 X'의 엔딩곡 '휴먼터치'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녹음되었다

- 1995년, 식스티 뮤직 네트워크가 경영 부진으로.

“이노우에 군도 함께 하자” 식스티가 해산할 무렵, 반다이와 아뮤즈가 공동으로 신설한 음반 회사 에어즈에 권유 받았습니다. 그 밖에도 대형 오퍼들이 왔기에 망설였었습니다. 결정타는 식스티에서 친한 사이였던 경리 담당의 키카와 히토미 씨. 그녀가 에어즈로 입사하기로 정했다는 이야길 듣고 “키카와 씨가 간다면, 나도 가볼까”

- 에어즈는 ‘울트라맨 티가’ 등의 울트라맨 시리즈나 TV 애니메이션 ‘신기동세기 건담 X’의 엔딩곡을 담당헀다.

애니메이션 제작 담당인 선라이즈에서 프로듀서인 우에다 마스오 씨(애니플렉스 전 사장)을 만났습니다. “테마는 사랑. 외국인이 부르도록 합시다. 이노우에 군이 미국에서 녹음해와주세요” 동행한 사장의 지원도 있었기에 로스앤젤레스에서 녹음하기로 정해졌습니다.

‘작사, 작곡, 뮤지션까지 전부 외국인으로 구성해서 본격 서양음악을 만들어주지’ 레이지 시절 에어플레이의 음반을 들은 이래, 어덜트 오리엔티드 락(AOR) 장르를 항상 꿈꿔왔습니다. 키카와 씨한테서 건네받은 현금을 움켜쥔 채 단신으로 미국행. 영어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기에 고생했지만, 이 경험이 약 20년 후에 기적을 일으킵니다.

“반드시 하게 해주세요” 그렇게 부탁한 것은 만화 ‘사일런트 뫼비우스’의 TV 애니메이션이었습니다. 과거 이미지 송을 제작한 인연으로 ‘나 밖에 할 수 없잖아’라고 생각했습니다. 애니메이션의 기획제작을 맡은 반다이 비주얼을 방문하여 이미지 송의 실적이나 아사미야 키아 선생님과의 신뢰관계를 주장하여 음악 프로듀서를 맡았습니다.

- 1999년, 에어즈는 사업을 중지한다.

당시에는 아티스트와의 타이업이 급증하여, ‘진정한 애니송’이라 부를만한 작품은 적어지고 있었습니다. 세간에선 애니노래라면 ‘우주전함 야마토’의 사사키 이사오 씨 등의 베테랑 가수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드래곤볼Z’ 주제가를 부른 카게야마 군조차 라이브에선 충분한 관객을 모으지 못했습니다.

TV 애니메이션의 심야방송이 시작되면서, 제작현장에서도 박력과 스피드감 있는 영상표현이 실현되었습니다. 이러한 애니메이션의 진화에 애니송은 따라가지 못하는 인상이었습니다. 애니송 장르가 충분히 스며들지 못한 채, 재능 있는 뮤지션이나 크리에이터가 모이기 어려웠습니다.

‘지금 시대에 맞는 애니송을 만들고 싶다’-. 에어즈 퇴사 후, 애니메이션 음악을 중심으로 한 음반 회사를 차리기로 결심했습니다. 찬동하고 있던 것은 에어즈의 동료였던 이토 요시유키 씨와 마츠무라 키요코, 그리고 경리 담당의 키카와 씨까지 세 명. 드디어, 란티스의 창업입니다.

(2018년 8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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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블의 명명자는 아사미아 키아. 애니음악에 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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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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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13회에선 애니메이션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시기를 돌아봅니다.

만화 '사일런트 뫼비우스'의 이미지송에서 편곡을 담당했다.

- 네버랜드 활동이 막혀버리면서 음악활동의 전환기가 찾아왔다.

네버랜드가 해체하기 직전해인 1989년. 타케다 테츠야 씨의 라이브에 백밴드로 참가했습니다. 악곡 연주 뿐 아니라 낭독극에선 바람이나 파도소리를 키보드로 표현하는 특수효과 같은 연주도 했었습니다. 공연은 연간 130회 정도. 개런티도 좋았습니다. 게다가 네버랜드의 모두가 타케다 씨의 지방공연을 쫓아가 현지에서 우리들의 라이브 공연도 열 수 있었습니다. 일석이조였지요.

백밴드 일에 불만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공연을 거듭하니 점점 위기감이 커져갔습니다. 타케다 씨에게 의존한 음악활동도 좋은걸까. 타케다 씨가 콘서트를 열지 않으면 우린 어떻게 되는 걸까. (해원대의 히트곡)‘생각해보니 멀리 온 것이다’를 연주하면서 감상에 젖어 ‘이대론 안되겠어!’라고.

- 1990년에 네버랜드는 해체. 기업 PR영상의 음악이나 이벤트 BGM 작곡 등으로 음악활동을 계속했다.

밤늦게 전화가 울리더니, “지금 스튜디오로 오세요”. 애니메이션 “사이코아머 고바리안”의 일로 알게 된 디렉터였습니다. 달려가니, 후에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주제가 ‘잔혹한 천사의 테제’로 인기를 얻는 타카하시 요코 씨가 있었습니다. 데모 녹음의 피아노 연주자로 곧장 참가했습니다.

이후 “만화 이미지송을 만들어보지 않을래?”. 그 디렉터가 인기만화 ‘사일런트 뫼비우스’의 이미지송 제작을 권유했습니다. 만화 속 장면이나 등장인물을 이미지하여 음악을 만듭니다. 작곡은 욧짱(음악 프로듀서 노무라 요시오 씨). 저는 편곡으로 참가했습니다.

- 사일런트 뫼비우스와의 만남으로 인해, 음악활동의 중심이 사운드 프로듀서로 옮겨간다.

“제가 만들게 해주세요”. 사일런트 뫼비우스에서 이미지송 앨범을 만든다는 소식을 듣고, 작가 아사미야 키아 선생님에게 달려갔습니다. 나라면 좋은 작품을 만들 자신이 있었습니다. 답변은 “좋아”. 이것이 처음으로 프로듀서가 된 순간입니다. 선생님의 “좋아”란 말이 없었으면 스태프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 시기엔 음반사 식스티 뮤직 네트워크의 사무실을 빌린 형태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일런트 뫼비우스의 CD를 발매하기 위해서 새로운 레이블을 세우게 되었습니다만, 딱하니 오는 레이블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아사미야 선생님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란티스가 좋겠다”

유래는 그리스의 고전에 등장하는 신비로운 꿈의 대륙 ‘아틀란티스’. 후에 창업하는 애니메이션 음악을 중심으로 한 음반회사 ‘란티스’의 작명자는, 아사미야 선생님이셨습니다.

(2018년 8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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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소에서 독립, 별안간 무급이 되어 밴드해체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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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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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12회에선 새로운 밴드의 해체로 인해 힘든 시기로 내몰렸던 시기를 되돌아 봅니다.

네버랜드 해체 후 결성한 휴먼네이처의 멤버들(오른쪽 끝이 본인)

- 1980년대 중반. LAZY 출신의 타카사키 아키라 씨와 히구치 무네타카 씨가 결성한 LOUDNESS는 미국 뉴욕에서 라이브 공연을 열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었다. 한편, 이노우에 씨가 타나카 히데유키 씨와 만든 Neverland는 용두사미로.

온천이나 호텔에서 디너쇼를 열거나 팬미팅을 여는 일이 늘어나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란 상황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무소에서 급료를 받고 있으니까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다’란 결론이 나면서 이시다 신고 씨와 설립했던 I.T.I. 하우스를 떠나기로 했습니다.

별안간 무급이 되었습니다. 네버랜드 보컬과 히데유키까지 셋이서 동거를 했습니다. 활동비를 확보하기 위해서 영상특전이 붙은 팬클럽을 만들고, 500개 정도의 비디오테이프 더빙을 나누어서 맡았습니다. 집에 전화를 걸어서 테이프에 녹음한 팬클럽 안내음성을 자동응답기로 틀었습니다. 테이프 재생 스위치가 눌릴 때 나는 ‘딸깍’소리가 계속 울려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라이브 공연장에도 직접 전화를 걸어서 부킹했습니다. 여섯 명이 탈 수 있는 차를 구입해, 악기를 싣고 전국각지를 돌아다녔습니다. 라이브 중에는 대기실에 아무도 없기 때문에 회계담당인 드러머는 돈을 넣은 가방을 허리에 찬 채로 연주했습니다. 지방 순회공연이 후반부에 다다르자 가방이 무거워져서 부릉부릉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분배하는 생활이었습니다.

당시, (전 LAZY의)카게야마 히로노부 군이 건축현장에서 일꾼 아르바이트를 하고, 경험도 쌓아 현장의 리더에 올랐었습니다. 네버랜드의 수입만으로는 먹고 살 수 없었기에 그에게 부탁해 일꾼으로 들어갔습니다.

아침 다섯시, 카게야마 군이 차로 데리러 와 주었습니다. 키보드를 치는 제 손가락을 배려해, 무거운 물건을 들지 않는 작업장에 배치해 주었습니다. 하루 작업이 끝나면 리더인 카게야마 군으로부터 일당 1만엔이 든 봉투를 받았습니다.

- 결국 네버랜드 해산을 결심한다.

음반사 어디든 사무소에 속해있지 않은 네버랜드와의 계약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든 계약을 해달라고, 음반사 앞에 숨어서 디렉터를 기다렸습니다. 나오자마자 “이 곡 들어봐주세요”라며 테이프를 건넵니다.

“그렇게 CD를 내고 싶다면 해체하면 되잖냐” 예전에 소속되어 있던 음반사 디렉터가 답했습니다. “해체CD”란 명목이 있다면 발매해 준다는 것입니다. 네버랜드의 이름을 버릴지 말지 멤버들과 미팅은 했지만 앞뒤 따질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예산이 없어서 스튜디오 녹음을 할 수 없었기에 요코하마 비브레에서 해체 라이브 공연을 녹음. 1990년, 최후의 CD를 발매하면서 네버랜드는 해체. 하지만 거의 같은 멤버들로 새로운 밴드를 결성했습니다.

(2018년 8월 3일)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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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유 가사를 "싫습니다"며 거부, 애니송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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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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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11회에선 독립 후 처음으로 애니송에 손을 대게 된 경위를 돌아봅니다.

아이돌 시절과는 달리 네버랜드에서는 음악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앞줄 왼쪽이 본인)

- 1981년, 사무소에서 독립하여 전 LAZY의 베이시스트인 타나카 히데유키 씨와 Neverland를 결성하다.

킹레코드의 시게마츠 히데토시 디렉터의 발안으로 아쿠유 씨가 가사를 써 주셨습니다. 완성된 가사는 “우리덜 오사카에서 왔어서예~” 같은. “절대로 싫습니다.”라며 퇴짜를 놓았지만 상대는 대선생님. “어떻게 거절하겠냐!”라며 혼이 났습니다.

당시 히트하던 여성 3인조 그룹 슈가의 프로듀서와 짜보는 아이디어도 나왔었습니다. 그러나 맞추러 온 프로듀서하고 맞지 않아 “이것도 싫습니다.”라며 거절. “그냥 네 맘대로 해라!”라며 내팽개쳐졌습니다.

네버랜드는 스스로 라이브하우스를 찾거나 연습장소를 확보하는 등 마치 밑바닥 시절로 돌아간 활동이었습니다. 라이브 공지 포스터는 멤버들과 렌터카를 타고 붙이러 나갔습니다. 500~600장 정도 붙였습니다. 괴한으로 오인당해 경찰관한테 불려 멈추는 일도 있었습니다.

매일을 음악 연습에 몰두했습니다. 보컬은 가입 당시 17세. 아버님으로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이노우에 씨와 동거할 것”이라는 조건으로 허가를 받아내어 참가했습니다. 문외한이었기에 마이크스탠드의 사용법부터 철저히 교육시켰습니다. 카와구치호에 있던 합숙 스튜디오의 오너로부터 “제일 많이 연습한 것은 네버랜드”라는 보증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네버랜드 활동은 즐거웠습니다. 악기를 유지보수하거나, 악곡을 연구하거나. 하고싶은 일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충실감이 있었습니다. 레이지 시절에는 음악 이외의 일이 많아 스튜디오에 1개월간 틀어박혀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시간 같은 건 없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레이지에서 버라이어티 방송의 콩트를 극한까지 끌어올려보는 것도 괜찮았을 거란 생각도 들긴 합니다만.

- 1983년, Neverland는 애니송에 처음으로 얽힌다.

“이노우에 군, 애니메이션과 타이업해보지 않을래?” 킹레코드 씨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 이쪽은 “하?”였습니다. 킹레코드 안에서도 업무 상대가 애니메이션 관계 부서였기에 항상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 분위기도 달랐습니다.

TV 애니메이션 ‘사이코아머 고바리안’의 오프닝곡과 엔딩곡을 담당했습니다. “인트로를 더 화려하게”라던가 “1코러스를 90초에“라는 등의 주문을 받아 ‘리퀘스트가 많아서 귀찮은 업계구나’라고. 이게 첫인상이었습니다. 아직 ‘애니송’이란 단어도 없이 ‘티비 만화 주제가’라고 불렸습니다.

솔직히 어릴 때 TV 애니메이션은 ‘타이거마스크’를 본 정도로, 만화나 애니메이션엔 흥미가 없었습니다. 카게야마 군은 만화를 엄청 좋아해서 LAZY 시절에도 합숙소엔 만화책이 가득했습니다. 고바리안이 인연이 되어 프로레슬링의 입장 테마곡을 작곡하는 일도 맡게 되었습니다.

(2018년 8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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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ZY 해체 후, ‘포키’에서 이노우에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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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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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10회에선 레이지 해체 후에 참여한 새로운 그룹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트라이앵글 프로덕션을 떠나고 새로운 사무소 I.T.I. House를 설립하다.

- 1981년, LAZY 해체 후에도 이노우에 씨는 트라이앵글 프로덕션에 잔류했다.

후지타 코이치 사장은 퀸시 존스가 프로듀싱해 히트했던 ‘아이노코리다(사랑의 코리다)’의 일본어판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거기서 3인조 그룹 트로와 합류해 새로운 유닛인 ‘빅뱅’을 결성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노코리다를 일본어로 부른다는 건 솔직히, 촌스러웠죠. 빅뱅에서의 활동은 그 한곡뿐이 되었습니다.

저와 함께할 보컬을 발굴하기 위해서 후지타 사장과 저는 많은 데모 테이프들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한사람, 빛나는 원석이 있었습니다. “그룹 짜기 전에 함께 생활해봐” 후지타 사장의 제안으로 도쿄 아오야마의 저택에서 1주일 정도 함께 살았습니다. 동갑인 그는 대학생. (닛산의) 빨간 블루버드를 탄 채 “포키(이노우에), 바다에 가자”. 음악에 대한 이야기보다 놀러가자고 하다니. 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밤, 롯폰기의 야키토리 가게에 있던 후지타 사장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와는 못하겠습니다.” 그렇게 호소한 바로 다음 순간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주먹으로 크게 맞고 만화 속 한 장면처럼 카운터에서 굴러 떨어졌습니다. 이젠 인내의 한계입니다. “때려치겠어!” 입에서 곧장 튀어나왔습니다.

이후 후지타 사장은 스기야마 키요타카 & 오메가 트라이브를 프로듀스. 유닛 결성을 포기한 대학생 카도마츠 토시키는 이후 싱어송라이터로 대성공했습니다. 분명 저와 짰으면 그리 팔리지 않았겠죠. 제가 사무소를 뛰쳐나온 탓에 서로가 행복해진거라 생각합니다.

- 레이지의 베이시스트 타나카 히데유키 씨와 합류하다.

레이지 해체 후, 히로유키(타나카 히로유키), 탓칸(타카사키 아키라), 그리고 히구치(히구치 무네타카) 씨와 함께 ‘LOUDNESS’에 참가할 예정이었습니다만 음악성의 차이로 탈퇴하고 맙니다. 그래서 알고 지내던 기타리스트나 히구치 씨의 제자였던 드러머를 불러 미국발 ‘어덜트 오리엔티드 록(AOR)’을 지향하는 ‘Neverland’를 결성합니다.

“너희들 같이 할래?”라며 말을 걸어준 사람은 트라이앵글 프로덕션에서 레이지의 라이브 담당이던 이시다 신고 씨였습니다. 후지타 사장에게 맞은 사건이 사무실에 널리 퍼졌기에 배려해준 것이겠죠. 이시다 씨를 사장으로 사무소를 차리게 됩니다. 이름은 ‘이노우에’ ‘타나카’ ‘이시다’의 앞글자를 딴 I.T.I. House입니다.

네버랜드에선 레이지의 영광에 기댈 생각이 없었습니다. 자기소개도 “키보드의 이노우에입니다.” 본명으로 승부했고, 포키란 이름은 쓰지 않았습니다. ‘빨간두건양 조심해’ 같은 레이지 시절의 히트곡도 연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강한척했어도 레이지의 ‘잔향’으로서 활동했다는 측면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걸 증명하듯이 네버랜드의 활동은 조금씩 시들어가고 있었습니다.

(2018년 8월 1일)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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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 해체하는 게 어때?“ 사장의 한마디에 흔쾌히 승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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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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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9회에선 레이지가 해체하게 된 경위를 밝힙니다.

1981년 2월 18일에 해체 선언을 하고, 기자회견에 임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이노우에 씨)

- 밴드의 인기도 피크가 지나면서 아이돌 노선에 대한 의심이 커졌다.

“너희들, 사실은 어떤 음악이 하고 싶은거야?” 사무소의 소개로 프로듀서 자리에 앉은 사람은, 후에 작가가 되는 이주인 시즈카 씨였습니다. “하드록이 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대답은 명쾌했습니다. “해보면 되잖아.” 하코네의 록웰 스튜디오에 틀어박혀 하드록으로의 회귀를 노린 앨범 제작에 착수했습니다.

잡지의 취재에도 “록을 하고 싶다.”라 공언했고 아무렇지도 않게 담배도 피워대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 7월부터의 전국 투어에선 “아이돌 노선은 이제 끝”이란 말과 “헤비메탈 선언.” 최연장자이자 리더인 무네타카 히구치 씨와 사무소의 후지타 코이치 사장이 충돌해 해고 소동도 일어났었습니다. 결국은 “맘대로 해!” 앨범 녹음장에 스태프가 아무도 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방치당한겁니다.

- 1980년 12월, LAZY는 앨범 ‘우주선지구호’를 발매. 수록곡의 대부분을 타카사키 아키라 씨부터 각 멤버들이 작곡. 이주인 시즈카 씨도 ‘다테 아유무’ 명의로 작사에 참가했다. 일본 록 팬들이 명반으로 꼽는 한 장이다.

5명이 각자 자신의 음악을 관철하는 경험을 하고보니 멤버 간 방향성의 차이가 확연해졌습니다. 탓칸과 히구치 씨는 한층 더 격렬함을 추구하고 싶어 했습니다. 카게야마 군은 솔로. 저는 ‘어덜트 오리엔티드 록(AOR)’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데이비드 포스터가 소속해있는 미국 밴드 에어플레이의 음반을 듣고 ‘이거다!’라고 직감했죠. ‘그 때’는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냥, 너희들 해체하는 게 어때?” 1981년 정초에 그런 말을 꺼낸건 후지타 사장이었습니다. 멤버 간 음악성의 차이가 확연히 차이나던 우리도 흔쾌히 승낙. 2월 18일에 예정되어 있던 카게야마 군의 버스데이 라이브를 해체발표일로 정했습니다.

데뷔의 기회를 주신 카마야츠 히로시(무슈 카마야츠) 씨에게 보고해야만 했습니다. 해체발표 전날 밤, 오사카에서 카마야츠 씨를 만났습니다. “우리들, 해체합니다.” 카마야츠 씨는 “으음”이라 신음하며 아무 말도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천천히 입을 열고 “디스코장에 갈까?” 어째선지 디스코장에서 미친 듯이 흔들었습니다.

다음날, 도쿄의 조후시 그린홀에서 LAZY는 해체를 발표했습니다.

해체 라스트 라이브는 5월 31일의 나고야 공연이었습니다. 라스트 라이브의 마지막, 드럼이나 기타의 마구 연주하며 곡을 끝내는 ‘휘젓기’가 좀처럼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들 끝내기 싫어서 20분 정도 계속한 게 아닐까요? 라이브 후에는 다섯이서 밤새 마시고 “다들 건강해.” 그것 뿐이었습니다. LOUDNESS를 결성한 탓칸과 히구치 씨 둘이나, 솔로 활동을 시작한 카게야마 군과는 몇 년간 만나는 일이 없었습니다.

(2018년 7월 31일)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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