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UvK-D5Td_1E?si=jzcPmXH32I6QPVsJ

 

https://youtu.be/F7OstGf0pCA?si=rPFaQBCDHL7l7pKe

 

https://youtu.be/jZcxSteZL9Y?si=KkoOeEK58tHzW8Ax

 

인터뷰 재팬이란 곳과 인터뷰한 내용 간단히 요약

중구난방이어도 이해좀

 


- 1인 라이브
우선 경비가 크게 들지 않는다. BOWWOW의 야마모토 쿄지, SABER TIGER의 시모야마 타케노리도 이렇게 1인 라이브 순회를 하고 있다.

텅텅 빈 공연장을 보기도 하지만, 해야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

ANTHEM 시절 동료 후쿠다 히로야와 트윗캐스트를 이용한 인터넷 공연도 하고 있다. 코로나 기간 동안 무대에서 공연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에 뮤지션으로써 공포를 느꼈기 때문.

- 1인 매니지먼트
똑같은 장소에서 계속하면 신선미가 떨어진다. 또한 가게 사정상 공연을 하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 때문에 1년 주기로 같은 공연장을 찾고자 한다. 물론, 1년 후엔 공연장 측에서 더욱 잘팔리는 가수를 부르고 싶어할 수도 있다.

ANTHEM은 21세 때 가입했기에 이런 일을 할 일이 없었고 애니메탈 초기에도 매니저가 도맡아 했었다. 스스로 매니지먼트를 하기 시작한 것은 2천년대 이후로, 스스로 움직여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마이스페이스, 페이스북으로 해외와 소통하면서 남미도 다녀왔다.

물론 음악인은 다른 일에 신경쓰지 않고 자기 앞에 놓여진 일을 잘 요리하는게 제일 좋다.
그런 점에서 에이조는 스스로가 운이 좋다고 평한다. 대학 3학년 때 자기 능력을 시험해보기 위해서 ANTHEM의 오디션에 지원했고 합격했다. 완성도는 모리카와 유키오가 더욱 높았으나잠재력을 인정받았다. 마치 비기너즈 럭이었다. 기존 멤버들은 이미 밴드계에 몸담고 있던 이들이기에 그들을 거스르지 않고 따른 것이 성공으로 이어졌다.

사카모토 에이조가 스스로 꼽는 성공은 ANTHEM, 애니메탈, JAM Project 의 세가지.
ANTHEM 시절엔 리더 시바타 나오토,
애니메탈 시절엔 현재 GALNERYUS를 프로듀스하고 있는 히사타케 요리마사 프로듀서.
JAM Project 시절엔 "더욱 샤우팅하라"며 주문했던 란티스의 이노우에 슌지 사장과 리더 카게야마 히로노부가 지금을 자신을 만들어준 핵심인물이다.


- ANTHEM
좋은 걸 만들기 위해선 스스로를 지옥으로 몰아넣어야한다는 마인드가 있는 밴드. 에이조는 대학생 때 오디션에 붙었기 때문에 경력있는 다른 멤버들의 주문을 따라야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못한다고 말하기보단 일단 해보는 식으로 움직였다. 85년도에 앨범을 내고나선 바로 전국투어에 들어갔다. 산소결핍으로 관객이 쓰러지는 사고도 있었다. 하지만 꽉 찬 공연장에서 정신없이 살아가는 삶이 사회 초년생 에이조에겐 보통의 삶이었다.

81년 LOUDNESS를 시작으로, EARTHSHAKER, .44 MAGNUM, MARINO, 블리자드가 나왔고 85년이 ANTHEM, SHOW-YA, 세이키마츠. 에이조가 87년에 그만둘 때에 X와 DEAD END가 등장했다. 이 전성기를 고등 3학년부터 20대 초반에 겪었다. 에이조는 CONCERTO MOON이 10년, 6년 정도만 이르게 나타났어도 정말 대단했을거라 생각하기에 아쉬워했다.

당시는 투어의 연속이기에 판매량 등을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또한 신곡도 생각해야만 한다.

다른 사람과의 접촉도 피했었다. 젊었던 에이조는 ANTHEM이란 이름표를 때버리면 다른 아마추어 밴드들 앞에선 후배의 위치가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메이저 밴드의 보컬리스트란 태도를 갖추기 위해서 타인과의 접촉을 끊는 환경이 마련되었다.

이렇게 놀러나가지도 못하게 막았음에도 리더 시바타 나오토의 컨트롤은 대단했다. 따라서 에이조는 비즈니스를 생각할 일이 없었고, 당시에 행복하게 활동했었다.

- 현재의 ANTHEM
에이조가 있던 시기가 ANTHEM이라고 말하는 사람에겐 현재의 간판을 짊어지는 사람이 곧 ANTHEM이라고 답하고 싶다. 내가 없으면 안된다? 그럼 ANTHEM은 멈춰있을 것이다. 하지만 ANTHEM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 따라서 모리카와 유키오가 ANTHEM의 보컬이다.

보컬이 바뀐다고 극단적으로 바뀌는 밴드도 있다. 하지만 시바타 나오토는 보컬에 따라 어울리는 곡을 만들고 있다. 그렇게 시바타 나오토가 있는 이상 ANTHEM은 계속될거다.

모리카와 유키오 체제에서 나온 하드록 템포의 곡들은 부를 수 없다. 모리카와 유키오이기에 가능한 곡들.

2014년에 탈퇴했을 땐, 매번 향상을 꾀하는 밴드 속에서 자신이 더욱 대단한 것을 제시할 수 없다면 그만둬야한다고 여겼다.

- 애니메탈
ANTHEM을 그만두고 나선 안경점 사원을 1년을 했고, 이후엔 택시기사로 6년을 일했다.

형 둘이 애니메이션 오타쿠였기에 애니송이 어떤건지는 알고 있었다. ANTHEM을 그만둔 이후에도 영점프나 애니메이션 주제가 쪽으론 일이 있었다. 또한 애니메탈은 택시 드라이버를 하던 와중에 제의가 들어왔기에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막상 스탭들은 20대의 젊은 사람들이었기에 녹음할 때 디렉션도 주지 못했다. 기존에 없던 기획이라 어떻게 해야할 지도 몰랐기에 녹음은 사카모토 에이조가 직접 중심이 되었다.

녹음은 8월에 했지만 이후 말이 없다가 10월이 돼서야 보도자료가 나왔다. 본래는 펀하우스 계약이었으나 갑자기 소니로 옮겨지더니 바로 후속작 제작에 들어갔다.

이후 애니송 장르와 노래방 유행이 겹치면서 크게 성공했다. 정통파 보컬리스트인 사카모토 에이조 입장에선 노래방에서 바보처럼 괴성을 지르는 사람들이 자길 뒷받침해주게 될 지는 꿈에도 몰랐다. ANTHEM의 팬들은 싫어했다.

초기엔 택시 운전수 일을 병행했다,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면 그대로 택시를 몰고 인터뷰 장소로 이동했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해놓고 복장을 갈아입곤 했다.

애니메탈은 엄청 잘팔렸지만 투어의 괴로움은 ANTHEM과는 결이 달랐다. 똑같은 내용의 취재를 아침부터 밤까지 연속했기 때문. 그야말로 연예계 인사였다.
33세의 에이조는 질려했지만, 애니메탈 레이디를 하던 미이는 매번 똑같은 내용을 말해도 다른 식으로 대답을 해주는 등 프로의 모습을 보였다. “애니메이션 주제가 가수를 하고 싶었어!”라며 대중이 갖고 있는 이미지를 절대로 깨트리지 않았다.

다양한 일이 있었다. 금융계 운동회 공연, 공장직원의 가족들을 상대로 하는 공연 등. 메탈러가 맨 앞줄을 차지했기에 반가운 분위기가 되어 열심히 메탈공연에 임하면, 좀 더 ‘가족친화적인 공연을 해달라’는 주문이 들어왔다.

애니메탈은 온 힘을 쏟아붓기에 공연이 끝나면 하얗게 불타고 만다. 하지만 소니 소속이었고, 잘 팔렸기에, 업계인들에게 인사는 당연했으며, 뒷풀이까지 참석해야만 했다.

힘들었지만 잘나가는 연예인을 경험했기에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한번은 소니에서 밤에 방송하는 애니송 방송에 출연해달라는 주문을 받았었다. 막상 스튜디오에 가보니 대본도 없이 프리토크로 30분을 때워야했다. 솔직히 애니메이션에 자세한 사람은 아니기에 좋아하는 캐릭터를 말해달라는 질문에 대충 답했었다. 당시엔 젊고 잘나갔기 때문에 밴드 멤버나 프로듀서에게 건방진 태도를 보이곤 했었다. 지금은 반성하는 부분.

- 네리마 마초맨
87년 ANTHEM을 그만두고 난 뒤에 X JAPAN이 등장하며 이제 정통파 메탈로는 힘들겠다는 무드가 있었다.

에이조는 아마추어 계열을 경험해보지 않았기에 네리마 마초맨을 결성했다.

- 회사원
나이가 들어서 자신을 돌아보면 굉장히 무례했었다. 하지만 음악인인 에이조는 그걸 감수시킬만한 파워가 있었다. 따라서 이걸 고쳐야만 한다고 생각했기에 음악으로 잘 안되는 시기엔 회사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예전엔 TV에 나오지 못하면 연예인으로서 큰일나는 줄 아는 풍토가 있었고 아버지도 그랬다. 애니메탈로 TV에 나와서 아버지 앞에서 그나마 가슴을 펼 수 있었다.

ANTHEM을 그만두었을 당시엔 버블시대였다.
안경점에서 1년을 일했는데, 이걸 천직으로 삼아 10년 후에도 이 일을 계속할 생각은 없었다.
이후에도 트럭 운전, 택시 운전 등으로 먹고살 수 있었다. 2톤 트럭으론 사무용 가구를 옮겼다. 버블시대라 일이 계속 있었다. 이삿짐 센터에서 일할 땐 자기의 팬을 만난 적이 있었다. 고객이 자신을 어려워하니 이건 더는 못하겠다고 생각했었다. 학원강사도 했었는데 이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어뮤즈 종합학원과 요요기 애니메이션 학원에서 일할 수 있었다.

택시 운전수를 선택한 이유는 시간이 널널해서 음악활동을 하기 쉬웠어서. 그리고 멋있어 보였다. 뉴욕의 택시 운전사에 로망이 있었기에. 택시기사는 27세부터 5년간 했었다. 이후 99년에 다시 택시기사를 했었다.

20대 택시기사는 굉장히 젊은 편이었다. 또한 택시기사들 중엔 사연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부분의 회사는 장발 청년을 대부분 거절했으나 에이조가 일한 택시회사는 장발에 상관없이 일할 수 있을 정도로 느슨한 편이었다. 물론 무서워보이는 사람들도 많았다.

승객이 에이조를 알아보기 전에 미리 자신에 대해 밝혔었다. SIAM SHADE의 히데키가 탔던 적도 있었다. 히데키는 어린 시절 비주얼계 밴드들의 로드매니저를 했던 적이 있기에 네리마 마초맨을 알고있었다.

- JAM Project
2년 3개월만에 그만뒀었다. 당시엔 애니메탈, ANTHEM도 하고 있었기에 병행하기 어려웠었다. 그룹의 시작을 끊었기에 나름대로 충분히 할만큼 했다는 기분도 있었다. JAM Projec는 이후에 인기가 생기더니 부도칸(무도관)공연도 성사되었다.

에이조는 여러 분야에 걸친 스타일이지만 JAM Project는 애니송 하나에 전념하는 사람들. 이렇게 하나에만 몰두하는 사람들이 성공하는 걸 보면 부럽다는 기분이 든다. 물론 10주년 공연 땐 함께하기도 했다.

JAM Project 설립시에 카게야마 히로노부, 이노우에 슌지가 가졌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같은 마음으로 응해줄 수 없다는걸 깨닫고 그만두기로 한 것. 그룹단위로 움직이는 것은 개인단위로 움직이는 에이조와 맞지 않았다. 따라서 대형 공연을 성사시켰단 뉴스를 뜨면 보기 싫었었다.

뒤에서 노력하는 스타를 좋아하기에 카게야마 히로노부에게 많이 배웠다. 카게야마 히로노부는 의외로 독설가다. 하지만 그걸 직접 보는게 너무나도 행복했다. 브라운관에서나 보던 동경하던 사람이 갖는 어둠. 스타만이 보여줄 수 있는 어둠. 그걸 볼 수 있다는 점은 꿈이 이뤄진거나 마찬가지다.

- 50대
53, 54세 때에 일했던 회사는 음악활동이 금지되었다. 음악고문으로 오래 있어도 되겠지만 경영이 악화되면 자신이 잘릴 가능성도 적지않다고 생각, 그렇기에 나오기로 했다. 하지만 성대수술도 막 했었던 시기라 노래할 자신도 없었다. 의욕이 있는데도 잘되지 않아 힘들던 시기다. 요요기 학원에 지원했으나 불합격 되고 말았다.

그때 SABER TIGER의 시모야마 타케노리가 지방공연을 권유하여 노래를 하면서 목도 나아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그는 내 은인이기도 하다. 시모야마 타케노리가 공연한 라이브하우스나 가게에 다음 타자로 나를 부킹하는 식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재차 면접을 보곤 요요기 애니메이션 학원의 커리큘림 담당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수업에 맞는 선생의 배치 등을 맡았다. 코로나 시기를 지탱할 수 있어 도움이 되었다. 15세의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많은 걸 배웠다. 학생의 지루해하는 눈이 공부가 된다.

- 60대의 목표
지금껏 자신의 노래를 듣지 못했던 사람에게 노래를 들려주는 것
스페인어를 공부하는 이유도 남미 무대에서 스페인어로 노래를 불러서 남미에서 가수로 인정받기 위한 것

또한 장애인 지원 사업에도 흥미가 있어 준비하고 있다.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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