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ZY - ROCK ON ME

MUSIC 2021. 6. 22. 20:54

 

LAZY - ROCK ON ME

 

작사: 카게야마 히로노부

작곡: 이노우에 슌지, 카게야마 히로노부

편곡: LA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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んなったって関係無

타반낫탓테칸케이네에

묶음 취급받아도 관계없어

 

マネーんだって関心無

마네-츤닷테칸신네에

돈을 쌓는들 관심없어

 

名前売ったって 快感無

나마에웃탓테 카이칸네에

이름을 팔아봤자 쾌감없어

 

Oh I’m so bad

 

フリースタイルだって いいじゃんねえ

후리-스타이루닷테 이이쟈네에

프리스타일이라도 괜찮지않겠어

 

アメリカンばっか No more でえ

아메리칸밧카 No more 데에

미국인만하는건 No more 인거야

 

流行りもんなんて うんざりでえ

하야리몬난테 운자리데

유행따윈 질려서

 

I’m feeling down


無神論だって問題無

무신론닷테몬다이네에

무신론은 문제없어

 

日本人だって特権無

니혼진닷테톳켄네에

일본인이라고 특권없어

 

アラブだって偏見無

아라푸카이닷테헨켄네에

아랍계라고 편견없어

 

HEYShake your hands

 

波乱万丈40

하란반죠데40

파란만장한 40!

 

Never give up!!

 

まだ けねえ

마다 마케네에

아직 지지않았어!

 

Put yo hands upRaise you hands up

 

Get upStand up

 

あきらめねえ

아키라메네에

포기하지않아!

 

Rock on me

Going on my way

 

ありふれた もう いたくないぜ

아리후레타우타와 모오 우타이타쿠나이제

흔해빠진 노래는 더 이상 부르고 싶지않아

 

世界今日 しみのChain reaction

세카이와쿄오모 니쿠시미노Chain reaction

세상은 오늘도 증오의 Chain reaction

 

連鎖るんだ!!

렌사오타치키룬다!!

연쇄를 끊는거다!!

 

すぐに

이마스구니

지금 당장

 

価値観繰替えろ

카치칸오쿠리카에로

가치관을 바꿔라

 

すぐに

이마스구니

지금 당장

 

Everybody want

Everybody need

Everybody want some love……

 

 

地雷踏んだって Don’t know why

지라이훈닷테 Don’t know why

지뢰를 밟은들 Don’t know why

 

危険いっぱいじゃ Don’t know why

키켄잇바이쟈 Don’t know why

위험이 가득한들 Don’t know why

 

議員さんなんて そんなもんで

기인상난테 손나몬데

위원님들이란 원래 그러니

 

Oh It’s too bad

 

孤軍奮闘40

코군훈토우데40

고군분투한 40!

 

Never say Yes!!

 

まだ やめねえ

마다 야메네에

아직 그만두지않아!

 

Put yo hands upRaise you hands up

 

Say noSay no

 

されねえ

다마사레네에

속지않겠어!

 

Rock on me

Going on my way

 

いラブソングは もう きたくもないぜ

아마이라브송구와 모오 키키타쿠모나이제

달아빠진 러브송따윈 이젠 듣고 싶지도 않아

 

テレビじゃ今日 Genocide

테레비쟈쿄오모 쿠리카에스Genocide

텔레비전에선 오늘도 반복되는 Genocide

 

しみを るんだ

니쿠시미오 타치키룬다

증오를 끊어내는거야

 

すぐに

이마스구니

지금 당장

 

偽善者 あふり

기젠샤오 아후리다세

위선자를 색출하라

 

すぐに

이마스구니

지금 당장

 

Everybody want

Everybody need

Everybody want some love……

 

 

Rock on me

Going on my way

 

末期びは きたくもないぜ!!

마츠고노사케비와 키키타쿠모나이제!!

최후의 울부짖음은 듣고싶지도 않아!!

 

かとともに らぬ かと

다레카토토모니 나모시라누 다레카토

누군가와 함께 이름도 모를 누군가와

 

未来るんだ

미라이오카치토룬다

미래를 쟁취하는거다

 

すぐに

이마스구니

지금 당장

 

エゴイズムをてろ

에고이즈무오누기스테로

이기심을 벗어던져라

 

すぐに

이마스구니

지금 당장

 

Everybody want

Everybody need

Everybody want some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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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컬 - 카게야마 히로노부

기타 - 타카사키 아키라

베이스 - 타나카 히로유키

드럼 - 히구치 무네타카

키보드 - 이노우에 슌지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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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 애니송 열기를 펼치다. 시부야의 성지에서 벌일 마지막 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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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 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최종회 제24회에선 새로운 꿈을 밝힙니다.

회사에서 피아노를 연주 중인 이노우에 씨

- 애니송 해외전개에 힘을 쏟다.

 

7월 로스앤젤레스와 상하이에서 애니송 라이브 애니송 월드 축제를 개최했습니다. 로스앤젤레스는 3일간 마이크로소프트 극장에 17천명을 동원, 상하이 역시 1만장의 티켓이 당일 매진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러브라이브! 굿즈도 인기, 폭염으로 신용카드 리더가기 고장나는 문제도 있었지만, 많은 손님의 기뻐하는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계기는 2014. 노키아 시어터(현 마이크로소프트 극장)에서 보컬로이드 하츠네 미쿠의 라이브 감상회 때 회장의 열기에 압도되어 애니송으로 여기를 만석으로 하고 싶다라고. 그리고 2016년에 제1회를 개최했습니다. 올해 11월에는 뉴욕에서 첫 공연을 할 예정입니다. 경기장은 해머스타인 볼룸. 아레나 같은 대형 공간은 아니지만 노려라, 메디슨 스퀘어 가든의 기분입니다.

 

7월 두 공연에서 놀란 적이 있습니다. 출연자의 절반 이상이 현지어로 MC(연주간 토크)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티스트의 노력에 감동을 받았어요. JAM Project는 영어, 중국어, 포르투갈어, 힌디어와 각국의 언어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 다음 꿈, 시부야에 새로운 성지를 만드는 것

 

업계발전에 이 음악홀이 필요합니다. 한다면 시부야가 아니면 의미가 없습니다”. 2017년 봄 쯤, 술집에서 반다이 남코 홀딩스의 타구치 미츠아키 사장과 직접 담판을 지었습니다. 눈에 띄는 1000평짜리 땅을 보고서 여기밖에 없어요라고. ‘시부야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습니다.

 

마음에 둔 것은 시부야의 밤 풍경이었습니다. 라이브하우스인 시부야 eggman에서 나온 땀투성이의 젊은이들과, NHK홀에서 나와 공원거리를 미소를 띈 채 걸어가고 있는 부인의 모습. 시부야야말로 음악의 심볼이 되는 거리라고 실감했습니다.

 

최근에는 2000명 규모의 홀이 부족합니다. 수천명의 공연장을 만원으로 만드는 애니송 아티스트가 늘었습니다만, 실제로 거기에 다다르기까지가 매우 어렵습니다. 성공을 꿈꾸며 땀흘리는 분들이 노래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고 싶습니다. 레코딩 스튜디오도 설치되어 애니메이션 음악 뿐만 아니라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자립해나갈 장소입니다.

 

인생은 마지막에 결판이 난다고 생각합니다. LAZY가 해산한 1980년대부터 약 10년간, 저는 성과를 내지 못한 채 계속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란티스 창업 후에는 정신없이 일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인생을 돌아보면 그 10년도 포함하여 다양한 국면에서 만났던 사람들과의 인연이, 생각지도 못한 형태로 일로써 이어지고 있습니다. 신기한 느낌입니다.

 

시부야 프로젝트는 자세한 시설 상태를 포함해 검토 중입니다만, 연령적으로 제 마지막 큰일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회사에서 퇴직하면, 공연장에서 악기관리 스태프로 채용해주지 않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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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823)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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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에 애니송 문화를 발신, 정액제 청취 방송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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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 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23회에선 정액제 청취 서비스 시작에 회상합니다.

7월, 중국에서 개최한 라이브 '애니송 월드 축제'에서도 JAM Project가 등장(중국 상하이)

- 란티스 창업 후 얼마되지않았던 2000, 실력파 애니송 가수들이 모인 JAM Project의 프로듀서를 맡게된다.

 

애니송 타이업 곡이 늘어나면서 미즈키 이치로 씨나 카게아마 히로노부 씨는 다음 세대에 진정한 애니송을 전하고 싶다라는 마음이 피어납니다. “포켓몬은 해외에서 대인기에요”. 기쁜 듯이 이야기하던 것은 포켓몬스터의 주제가를 부른 마츠모토 리카 씨. 해외에 먼저 가서, 문을 여는 유닛이 있어도 괜찮겠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닛명은 재팬 애니메이션송 메이커즈의 약자. 슬로건은 “150킬로의 공을 던지는 선수들을 모으자였습니다. 초기멤버는 미즈키 씨, 카게아마 씨, 마츠모토 씨, 엔도 마사아키 씨, 사카모토 에이조 씨. 지금과 다르게 주목도는 낮았고, 발족 기자회견에 모였던 기자는 10명 정도였습니다.

 

마침 로봇계의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이 많던 시기. 카게야마 씨가 지명된 일이 몇 개 있었습니다만, 발족 초기엔 죄송스럽게도 전부 JAM으로 돌렸습니다. 당시 작업했던 일 중 하나인 슈퍼로봇대전시리즈의 주제가는, 20년이 넘도록 계속하고 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애니송 쪽의 일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각자의 경위가 있어, 애니송에 구원받아 지금의 생활을 할수 있었습니다. JAM의 활동은 그러한 애니송에 대한 보은의 마음이 담겨있기에 그 열량이 대단합니다. 멤버들은 평균 50세를 넘었습니다만 귀찮을 정도로 파워풀합니다. 개런티는 등분이 되기에 N분의 1이 되어버립니다만.

 

애니메이션은 따뜻한 사람들의 모임이야”. 카게야마 씨와 자주 이야기합니다. 둘 다 제2의 음악 인생을 애니송한테 구원받았습니다. 우리가 뛰어들었던 연예계는 20세의 젊은이가 은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세계. 반면에 TV 애니메이션은 1쿨이 3개월. 실패해도 차례차례 기회가 돌아옵니다. 거기에 실패경험을 쌓지 않으면 히트곡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 2017, 전문 애니메이션송 정액제 서비스 아뉴타출범을 주도했다.

 

회사의 경계를 넘어 애니송 업계에 공헌합시다”. 2015, 애니메이션 마크로스시리즈에서 프로듀서를 맡은 플라잉 독의 사사키 시로 사장과 시부야의 선술집에서 의기투합했습니다. 스포티파이 등 자유로운 청취의 파도가 일본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아뉴타 구상의 시작입니다.

 

플라잉 독의 작은 회의실. 거기가 아뉴타의 사무실이 되었습니다. 20172월 첫 임원회의를 열어 신회사를 설립. KADOKAWA , 토호 씨, 포니캐넌 씨 등 업계의 10개사가 단결했습니다.

 

중국에서도 송신을 시작했습니다. 영상전달 서비스 비리비리와의 제휴입니다. 비리비리는 일본보다 싼 월 6위안(100)을 주장했습니다. 고민했지만 “6위안의 너머엔 많은 중국인 팬들이 있습니다”. 이 말로 납득을 하게 됩니다.

 

(2018822)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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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친구의 죽음에 충격 'LAZY'의 동료들을 떠나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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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 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21회에선 LAZY 멤버들의 잇따른 죽음을 돌아봅니다.

LAZY는 17년 만에 재결성된다

- 1981LAZY 해산 후, 이노우에 씨와 타나카 히데유키 씨는 네버랜드를 결성했다. 타카사키 아키라 씨와 히구치 무네타카 씨의 LOUDNESS는 일본의 하드록 씬을 견인. 카게야마 히로노부는 애니송 가수가 됐다.

 

1997, TV 방송 울트라맨 다이나의 음악 감독을 맡게 되었습니다. LAZY 멤버들은 울트라맨 세대. 재결성해서 엔딩곡을 만들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카게야마 군은 바로 흔쾌히 승낙. 히로유키는 당연히 괜찮아했을 테니 넘어가고, 연장자인 히구치 씨를 설득하러 갔습니다. 그가 단골로 드나들던 도쿄 시모키타자와의 선술집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재밌겠다. 하지만 탓칸(타카사키 아키라)이 뭐라고 말할진 모르겠는걸당시 히구치 씨는 라우드니스를 탈퇴하고 탓칸과 거리를 두던 상태였습니다.

 

다음으로 나선 곳은 롯폰기 프린스호텔의 바. 탓칸에게 사정을 설명하니 히구치는 뭐라던?” 어째선지 반말이었습니다. 떠들썩한 분위기였지만 히구치가 좋다면 좋아” “잘됐다라고 안심하며 히로유키에게 전화했더니 뜻밖에 나는 싫어란 대답. 결국, 처음에는 4명으로 재결성하고 나중에 히로유키가 가세했습니다. 17년 만의 재결성이었습니다.

 

해체 후 계속 만나지 않던 멤버도 있었는데, 다섯 명이 모이고 보니 과거의 레이지가 있었습니다. 나이를 먹어도 그 시절의 기분으로 돌아갈 수 있다니, 학교의 동아리 같아서 신기했습니다.

 

- 20069, 타나카 씨가 급서했다.

 

825일이 그의 생일이라서 축하하자고 모두 함께 이야기하던 참이었습니다. 연락을 준 것은 카게야마 군.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돌연사였습니다.

 

히로유키는 상냥한 사람이었습니다. 레이지 시절부터 합숙소에서 함께 살았고, 후에도 아파트에서 이웃사촌. 가장 돈이 없던 네버랜드 시대에도 함께 살았습니다. 침대에 휴대용 TV를 갖고 와, 보는 것은 언제나 영화 ET. 항상 울어버리니까 ET만 몇 번이나 보는 건데라며 태클을 걸기도 했던 정말로 순수한 남자였습니다.

 

- 2년 후, 히구치 씨가 간세포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등이 아프다라면서 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바로 입원. 고베의 큰 병원으로 갔어요. 투병 중에도 호쾌해서 문병하러 가면 신고베역에서 스테이크 도시락을 사줘치료로 머리가 빠지고, 몸이 야위어가도 평소의 쾌활한 히구치 씨였습니다. 침대 옆에는 자동차 잡지. 그때까진 스포츠카 밖에 타질 않았는데, “이제부턴 친환경이다. 퇴원하면 친환경 차량을 살까 생각해긍정적이었습니다.

 

떠나기 두, 세 달전, 둘이서 도쿄에 식사를 하러 갔습니다. 술도 담배도 끊었지만, 식욕은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조금 더 먹고 싶다라고 하여 세타가야 거리의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가게로. 한 손에 켄터키 치킨이 쥐어진 채 슌지, 고마워!”. 이게 마지막 모습이었어요.

 

(2018820)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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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다이 그룹에서 출자, 소속 아티스트도 40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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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20회에선 반다이 비주얼(현 반다이 남코 아츠)으로부터의 출자를 이야기합니다.

카와시로 씨(사진 왼쪽)의 말이, 반다이 남코 그룹 입성의 계기가 되었다

- 창업 2년째에 자본참가의 타진을 받았다.

 

다음에 사무실 가도 될까?” 전화의 상대방은 캐릭터 굿즈 등을 다루는 회사의 사장님이었습니다. 방문은 토요일. 창업 직후의 좁은 사무실을 둘러보며 아직 여섯자리 늘릴 수 있겠네. 우리가 출자할 테니 같이 해봄세

 

회사 멤버들에게 의견을 물었습니다. 당시의 란티스는 갓만들어진 벤처기업이었습니다. 산하에 들어감에 따라 회사가 어떻게 되어버릴지 잘 몰랐기에 불안이 앞섰습니다. 정말 고마우신 제안이셨습니다만 혼자만의 힘으로 자본금을 1000만엔에서 3000만엔으로 늘리는 길을 택했습니다.

 

이걸 어쩌지또 다른 불안도 있었습니다. 당시, 그 회사는 반다이 비주얼과 공동으로 사업에 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거절하면 반다이 비주얼과의 관계가 나빠지지 않을까하고 걱정했습니다.

 

불안을 불식하기 위해 반다이 비주얼을 방문했습니다. 그 자리에 나타난 것이 후에 사장으로 취임하는 카와시로 카즈미 씨.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라고 사정을 설명하자 카와시로 씨는 미소. “그건 말이죠, 이노우에 씨의 뜻을 제일 중요시 해도 괜찮습니다

 

몇 년 후, 란티스도 사업 확대의 전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자사의 레코딩 스튜디오를 만들기 위해 약 1억엔을 차입했습니다만, 사원들은 더 많은 애니메이션 작품에 투자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대로 단독 노선을 계속해도 자금 부족에 빠지는 것은 분명합니다. 상장도 선택지에 있었습니다만 주식공개로 고생하고 있는 회사도 알고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반다이 비주얼 카와시로 씨에게 물었습니다. “뜻을 소중히라는 말이 마음에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다이 비주얼도 음악 사업으로의 진출을 모색하고 있던 무렵이었습니다. 이때는 회사 멤버들의 의견도 일치했습니다. 2006, 51%의 출자를 받았습니다.

 

반다이 비주얼 산하에서, 란티스는 어른의 계단을 올랐습니다. 확실한 룰 아래 사원을 존중하는 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까진 규칙이 없는 상태였으니까요. 직원들한텐 좋은 결단이 아니었을까요.

 

- 출자를 받은 뒤에도 은 변하지 않았다.

 

2009년에 10년 동안 계속되어왔던 킹레코드와의 판매계약이 종료해, 반다이 비주얼로 계약처를 바꾸었습니다. 그때 건방지게도 우리는 새로운 레이블을 만들어 애니플렉스와 제네온 엔터테인먼트(당시)에 각각 판매 계약을 맺었습니다.

 

란티스에는 40팀의 아티스트가 있었습니다. 반다이 비주얼이 1쿨에 만드는 애니메이션은 2, 3. 그것만으로는 겨우 8팀 밖에 못 부릅니다. 아티스트가 노래할 장소를 확보하려면 자본 관계에 얽메이지 않고 애니메이션과의 접점을 가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아티스트가 노력해서 앨범을 만들고 라이브를 연다.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2018817)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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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고 노래하는 성우라이브, 애니송이벤트의 저변이 넓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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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19회에선 애니송라이브가 저변을 넓혀가던 시기를 돌아봅니다.

등장인물을 맡은 9명의 성우가 실제 라이브에서도 노래하고 춤추는 프로젝트 러브라이브!

- 2010, 애니메이션과 음악을 융합한 러브라이브!’시리즈가 시작된다. 9명의 여고생이 아이돌 활동에 힘쓰는 내용으로, 출연 성우가 애니메이션과 똑같이 춤을 추고 노래를 하는 라이브로 도쿄돔 만원에 성공할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처음 프로젝트에 대해 들었던 것은 애니메이션 제작을 맡은 선라이즈의 히라야마 사토시 프로듀서로부터입니다. 인기 아이돌에, 애니메이션과 게임 요소를 하나로 묶는다. 그리고 애니메이션 뮤직비디오를 CD와 함께 전개하는 아이디어였습니다. ‘기동전사 건담시리즈 등을 다루던 선라이즈가 모에계열에 자신 있는 란티스와 조합한다는 것에 재미를 느꼈습니다.

 

하지만, 당초엔 CD를 발매해도 팔리는 건 1000장 정도. 그런데도 관계자는 정열을 쏟았기에 회사 측에서도 좋은 의미에서 방치를 했습니다. 거기서 누군가가 영감을 떠올렸죠. “캐스트에게 애니메이션과 똑같은 댄스를 추게하는건 어떨까요?” 요코하마 블릿츠에서의 라이브를 계획 중에 매력적인 제안이었습니다. 노래만큼은 만들어 낼 수 있었으므로, 공연을 결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요코하마에서의 공연을 거쳐 캐스트가 애니메이션과 싱크로하여 춤추고 노래한다는 라이브 스타일이 정착해갔습니다.

 

- 대규모 애니송 라이브 개최도 늘어갔다. 2005년에 애니멜로 섬머 라이브’, 2009년에 애니맥스 뮤직스’, 2010년에 리스아니! 라이브가 시작. 애니송은 음악 장르의 하나로서 정착한다.

 

혼자 즐기는 이벤트였던 애니송 라이브가 친구들과 함께 즐기는 이벤트가 되어갔습니다. 애니송의 이미지가 바뀌어서 친구를 끌어들이기 쉬워졌고, 인터넷의 보급으로 팬들간의 교류가 생겨났기 때문일까요.

 

4명의 여성그룹 스피어의 라이브 공연장에서 앙케이트로 그 외에 좋아하는 아티스트는?’라는 답변으로 제일 많았던 것이 카게야마 군이 결성했던 하드 계열 ‘JAM Project’. 타입이 정반대인 그룹입니다. 의외의 결과였지만 애니송의 인기란 이런거려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애니송은 모두가 응원하는 문화. 아티스트가 달라도 고객층까지 다른 건 아니죠.

 

- 창업 10주년을 맞은 2009, 소속 아티스트가 한자리에 모이는 란티스 마츠리를 열었다.

 

후지큐 하이랜드 코니퍼 포레스트에서 이틀간 야외 라이브를 했습니다. 아키하바라에서 야마나시까지 임시 직행열차를 달리게 했습니다. 이틀째는 억수같이 퍼붓는 비. 레이지도 청춘의 한곡인 ‘BURN’을 연주한 후, 마지막엔 불꽃놀이를 했습니다. 온몸이 흙투성이였지만 야외 괜찮네. 즐거워라고 사원들과 함께 분위기가 고조되었습니다.

 

(2018816)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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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재능들이 손댄 ‘하루히’가 대폭발, ‘럭키스타도 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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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18회에선 애니메이션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럭키스타의 연이은 히트에 대한 뒷이야기를 밝힙니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은 주제가 뿐 아니라 삽입곡도 인기였다

- 2006년 방송된 TV 애니메이션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은 사회현상으로 이어졌다.

 

과감하게 젊은이에게 프로듀스를 맡겼습니다. 그 전까진 사장인 저와 창립 멤버인 이토 요시유키 씨가 음악 프로듀서를 맡고 있었습니다. “너한테 전부 맡길테니까, 곤란해지면 물어봐라며 보냈던 것은 사이토 시게루 씨. 당시 란티스에 막 입사했던 30세 언저리의 젊은이였습니다.

 

BGM이나 삽입곡을 작곡한 코우사키 사토루 씨는 남코(현 반다이 남코 엔터테인먼트) 출신. 스즈미야 하루히에서 연출이나 각본을 담당했던 야마모토 유타카 씨하고는 교토대학에서 친구사이였습니다. 작사는 하타 아키 씨. 처음에는 란티스의 거래처에서 근무하는 아르바이트였습니다만, “분명 재밌는 가사를 써줄테니까라던 스태프의 보증으로 작사를 의뢰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CD 매출 톱클래스인 대인기 크리에이터입니다.

 

주인공인 스즈미야 하루히는 히라노 아야 씨가 연기했습니다. 첫만남은 2001년에 방송된 애니메이션 천사의 꼬리였습니다. 캐릭터송 녹음 중에 아직 중학생이던 그녀의 리듬감이나 감각은 성우진 중에서도 돋보였습니다. 급성장 중인 히라노 씨와 활발하고 에너지 넘치는 하루히의 캐릭터가 잘 어울렸습니다.

 

젊은 스탭이 대히트를 성공시키면서, 그때까지 소소하게 히트를 거듭했던 저는 새로운 시대의 바람을 느꼈습니다. 킹레코드의 오오츠키 토시미치 씨도 잘됐네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서라며 기뻐해주셨습니다.

 

제가 사운드 프로듀스를 하게 되면, 이것저것 참견을 하고 싶어집니다. 스즈미야 하루히를 성공으로 이끈 것은 젊은 크리에이터의 자유로운 아이디어였습니다. 이 작품 이후, 저는 프로듀서로서 전면에 나서는 일은 없어집니다. 스즈미야 하루히는 란티스의 터닝포인트가 되었습니다.

 

- 스즈미야 하루히의 엔딩곡 하레하레유카이에서 등장인물이 추는 댄스를 따라하는 팬들이 속출. 그 열기를 공유하며 증폭하기 시작한 것이 동시기에 나타난 유튜브니코니코동화’. 애니메이션의 인기가 제작자의 의도를 넘어서는 인터넷 시대에 돌입했다.

 

팬이 애니메이션 작품을 응원하는 트렌드가 생긴 것은 최근입니다. 2007년 방송한 럭키스타에서는 니코니코동화 등에서 주제가 가져가! 세라복을 오리콘 랭킹 1위로 만들자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당초, 초기출하량은 5만매로 정해져있었습니다. ‘이 매수라면 1위는 무리겠지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큰일이 일어났어요팬들의 심기에 민감한 스태프들이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팬과 제일 가까운 란티스가 품절을 일으켜선 안된다미팅을 열어 출하 매수를 2배인 10만매로 늘리기로 했습니다. 결과는 오리콘 2위였습니다. 스즈미야 하루히와 럭키스타의 히트가 애니송 씬(scene)을 바꿨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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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사마'의 성공, 팬들의 강력한 일체감에 놀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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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17회에선 일상계 애니메이션이나 심야 애니메이션이 떠오르던 시기를 회상합니다.

2005년에 시작한 '애니멜로 섬머 라이브'에서 애니송의 열겨를 실감했다

- 2005, 휴대전화용 컨텐츠 송신의 드왕고가 애니송 라이브 이벤트 아니멜로 섬머 라이브(아니사마)를 개최. 프로듀서 오오타 토요키 씨(현재 드왕고 산하 메이지스 사장)는 란티스의 이노우에 씨에게 협력을 청했다.

 

아니사마 개최는 애니송을 둘러싼 분위기가 확하고 바뀐 순간이 아닐까요. 1회는 국립 요요기 경기장의 제1 체육관이 회장이었습니다. 아직 애니송 라이브가 그다지 많지 않던 시기. 정말 관객이 들어올까 걱정도 했습니다만, 오오타 씨는 반드시 요요기에서 성공시킨다라고. 최근의 아니사마에서는 생각도 못할 일입니다만 당시에는 출연자도 모이지 않아 곤란했었습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관중석은 90% 정도 찼습니다. 요요기 경기장에서의 콘서트 같은건 경험이 없기 때문에, 무대 위에서 출연자가 모두 감동해 울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계속 불러온 애니송에 이렇게나 많은 팬이 있냐며. 자기가 해온 일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거죠. 저나 스태프도 울고 있었습니다.

 

아니사마의 성공에 용기를 얻을 수 있었던 건 팬들도 마찬가지 였겠죠. 당시엔 펜라이트가 유행하던 시기였습니다. 8000~9000명이 일제히 펜라이트를 흔드는 모습을 보며 관객들도 애니송을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았구나하고 자신감을 가졌을 겁니다.

 

놀라운 점은 모든 노래를 다같이 응원하는 애니송 팬들의 일체감입니다. J-POP 음악 페스티벌에선 응원하는 아티스트가 노래를 마치고나면 관객들이 바뀝니다.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은 일입니다만, 애니송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같이 응원해줍니다. 이것은 애니송만의 독특한, 세계공통의 문화입니다. 애니송의 장르를 더욱 넓어질지도 모른다. 1회의 아니사마에서 5시간 동안 계속 응원해주시는 팬들을 눈앞에 두고, 그렇게 느꼈습니다.

 

- 아이돌그룹의 융성도 애니송에 혜택을 줬다고 한다.

 

2005년은 ’AKB48’이 활동을 시작하던 시기입니다. AKB48의 노래의 작사는 아키모토 야스시 씨입니다만, 작곡은 곡에 따라서 각각 다른 크리에이터들이 다뤘습니다. ‘모닝구무스메는 작사도 작곡도 모두 츤쿠씨가 다뤘습니다. AKB48의 등장은 크리에이터들에게 새로이 활약할 장소를 제공한 것입니다.

 

AKB48에서 그룹이나 멤버의 특징을 이해하고 작곡에 활용하는 경험을 했던 작곡가가 애니송 업계에서도 활약해주었습니다. 사실 아이돌업계와 애니송업계는 크리에이터를 통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프로작곡가가 맹활약하고 있다는 점에선 레이지의 현역시절과 분위기가 비슷합니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럭키스타’. 이후 애니송에 이끌려 온 젊고 재능있는 크리에이터들이 많은 히트 애니송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2018810)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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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보험을 해지하여 자본금으로. 직원 넷이서 창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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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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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15회에선 스스로 자금을 대어 음반회사를 설립한 당시를 되돌아 봅니다.

 

오기 부분에 씰을 붙여 발매한 앨범 'I'm in you' 라이너노트의 마지막 페이지

1999. 애니메이션 음악을 중심으로 하는 음반회사를 창업한다.

 

당시엔 주식회사 설립에 자본금 1000만엔이 필요했습니다. 저금만으로는 부족해 생명보험도 해약해서 돈을 모았습니다. 회사명에는 매직가든이나 솔리드 복스같은 여러 가지 안이 있었습니다. 고민 끝에 과거 아사미야 키아 선생님께서 이름 지어주신 란티스로 결정했습니다.

 

곡 제작은 창업멤버로 할수 있었습니다만 문제는 디스트리뷰션(판매)였습니다. 그렇기에 유통망을 가진 판매 파트너를 찾아 유니버설 뮤직 등 대기업을 차례로 돌았습니다. 설립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란티스와 계약을 맺어줄 리 없었고, 모조리 거절당했습니다.

 

방문할 기업이 점점 줄어들어, 마지막은 킹레코드였습니다. 애니메이션 전문 레이블 스타차일드가 있어 무리란걸 알고 있었지만, 연간 매출액 2억엔이라는 사업계획을 믿어주어 계약이 결정되었습니다. 책임자는 시게마츠 히데토시 씨. 80년대 네버랜드의 디렉터로 신세를 졌었는데, 당시 임원으로 승진했었습니다.

 

운도 따랐습니다. 킹레코드에선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프로듀서이기도 했던 실력자 오오츠키 토시미치 씨가 때마침 외부에서 일하셨던 시기. 나중에 오오츠키 씨가 돌아와 이런 얘기는 듣지 못했어!”라며 화내셨다고 합니다. 시게마츠 씨의 승진과 오오츠키 씨의 부재. 이 두 가지가 행운의 포인트였습니다.

 

창업초만 하여도 란티스는 직원 4명인 세계최소 음반사였다.

 

에비스에 위치한 맨션의 방 하나를 얻어 시작을 했습니다. 집세는 월 35만엔 정도. 신용이 없었기에 리스 회사도 의자나 책상을 빌려주진 않았습니다.

 

카펫위엔 집에서 가져온 전화기와 작은 복사기 하나 뿐. 킹레코드 분이 인사를 하러 오시면 몹시 허둥지둥했었습니다. “회사가 붐벼서라고 거짓말을 하곤 근처의 호텔 엑셀런트 에비스의 카페에서 회의를 가졌습니다.

 

란티스의 첫 작품은 고등학생 시절의 친구인 카게야마 히로노부시 씨의 CD.

 

그의 노래를 어쿠스틱 버전으로 편곡해 저도 몇 곡인가 피아노를 쳤습니다. 어쿠스틱으로 만든 것은 녹음하는 데에 돈이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재킷 촬영도 스튜디오 구석에서 끝냈습니다.

 

인쇄소에서 온 라이너 노트(음반에 붙이는 해설지)를 보고 깜짝놀랐습니다. ‘KAGEYAMA H’O’RONOBU“라고 오기. ”진짜야?“ 말문이 막혔습니다. 지금이라면 다시 찍습니다만 당시엔 돈이 없었습니다. ‘HIRONOBU’ 스티커를 만들어서 다같이 한장한장 붙였어요. 4000장정도 붙였을까요? 카게야마 군에게는 미안한 일을 했습니다만 본인은 재밌는 일 하고 있네~“라며 웃어 넘겨줬습니다.

 

(201888)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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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한 애니메이션에 어울리는 애니송을- 창업을 결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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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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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14회에선 애니송 음반회사 설립에 대해 밝힙니다.

'기동신세기 건담 X'의 엔딩곡 '휴먼터치'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녹음되었다

- 1995년, 식스티 뮤직 네트워크가 경영 부진으로.

“이노우에 군도 함께 하자” 식스티가 해산할 무렵, 반다이와 아뮤즈가 공동으로 신설한 음반 회사 에어즈에 권유 받았습니다. 그 밖에도 대형 오퍼들이 왔기에 망설였었습니다. 결정타는 식스티에서 친한 사이였던 경리 담당의 키카와 히토미 씨. 그녀가 에어즈로 입사하기로 정했다는 이야길 듣고 “키카와 씨가 간다면, 나도 가볼까”

- 에어즈는 ‘울트라맨 티가’ 등의 울트라맨 시리즈나 TV 애니메이션 ‘신기동세기 건담 X’의 엔딩곡을 담당헀다.

애니메이션 제작 담당인 선라이즈에서 프로듀서인 우에다 마스오 씨(애니플렉스 전 사장)을 만났습니다. “테마는 사랑. 외국인이 부르도록 합시다. 이노우에 군이 미국에서 녹음해와주세요” 동행한 사장의 지원도 있었기에 로스앤젤레스에서 녹음하기로 정해졌습니다.

‘작사, 작곡, 뮤지션까지 전부 외국인으로 구성해서 본격 서양음악을 만들어주지’ 레이지 시절 에어플레이의 음반을 들은 이래, 어덜트 오리엔티드 락(AOR) 장르를 항상 꿈꿔왔습니다. 키카와 씨한테서 건네받은 현금을 움켜쥔 채 단신으로 미국행. 영어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기에 고생했지만, 이 경험이 약 20년 후에 기적을 일으킵니다.

“반드시 하게 해주세요” 그렇게 부탁한 것은 만화 ‘사일런트 뫼비우스’의 TV 애니메이션이었습니다. 과거 이미지 송을 제작한 인연으로 ‘나 밖에 할 수 없잖아’라고 생각했습니다. 애니메이션의 기획제작을 맡은 반다이 비주얼을 방문하여 이미지 송의 실적이나 아사미야 키아 선생님과의 신뢰관계를 주장하여 음악 프로듀서를 맡았습니다.

- 1999년, 에어즈는 사업을 중지한다.

당시에는 아티스트와의 타이업이 급증하여, ‘진정한 애니송’이라 부를만한 작품은 적어지고 있었습니다. 세간에선 애니노래라면 ‘우주전함 야마토’의 사사키 이사오 씨 등의 베테랑 가수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드래곤볼Z’ 주제가를 부른 카게야마 군조차 라이브에선 충분한 관객을 모으지 못했습니다.

TV 애니메이션의 심야방송이 시작되면서, 제작현장에서도 박력과 스피드감 있는 영상표현이 실현되었습니다. 이러한 애니메이션의 진화에 애니송은 따라가지 못하는 인상이었습니다. 애니송 장르가 충분히 스며들지 못한 채, 재능 있는 뮤지션이나 크리에이터가 모이기 어려웠습니다.

‘지금 시대에 맞는 애니송을 만들고 싶다’-. 에어즈 퇴사 후, 애니메이션 음악을 중심으로 한 음반 회사를 차리기로 결심했습니다. 찬동하고 있던 것은 에어즈의 동료였던 이토 요시유키 씨와 마츠무라 키요코, 그리고 경리 담당의 키카와 씨까지 세 명. 드디어, 란티스의 창업입니다.

(2018년 8월 7일)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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