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40주년, 동경하던 음악가에게 의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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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 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22회에선 데뷔 40주년 기념 음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보물이라던 데이비드 포스터 씨와의 사진(왼쪽은 1987년 내일당시, 오른쪽은 2016년 산타모니카 스튜디오에서)

- 2017년에 데뷔 40주년을 맞이하는 카게야마 히로노부 씨와 기념앨범 제작을 시작했다.

 

카게야마 군은 이상한 사람으로, 무얼 하고 싶다고 말하지를 않습니다. 예전부터 그래왔기에 둘이서 식사를 하러 가면 맞는 게 없었습니다.

 

그런 카게야마 군한테 “40주년 앨범으로 이루고 싶은 꿈같은 건 있어?”라 물었더니 데이비드 포스터가 참가해주면 최고겠지라고. AOR(어덜트 오리엔티드 록) 장르로 우리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준 뮤지션. 1987년 내일시 찍어준 사진은 몸에서 떼지 않고 갖고 다니는 보물입니다.

 

처음엔 무리려나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20년 전 영어도 제대로 못 하면서 AOR에 대해 동경으로 애니메이션 기동신세기 건담 X’의 주제가를 로스앤젤레스에서 수록했을 당시에 신세를 졌던 분께서 데이비드 포스터 씨로 이어지는 인맥을 갖고 계셨던 겁니다. 그야말로 기적이었습니다.

 

그를 향한 마음을 전한 카게야마 군의 편지가 주효했을 겁니다. 카게야마 군이 직접 작곡한 데모 음원을 보내자, 자신이 그 곡을 어레인지하고 있는 모습이 동영상으로 보내졌습니다. ‘이건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라며 소름이 돋았습니다. 카게야마 군은 영어 작사에 도전했습니다. 다니고 있던 영어회화 선생님이 감수를 해주셨습니다.

 

녹음은 산타모니카 스튜디오. 개방적으로 맞이해줘서 놀랐습니다. 기계로 음정을 고치지 않는 전통적인 방식. 피치나 영어 발음에도 신경을 써주어 카게야마 군한테 몇 번이나 다시 부를 것을 지시했습니다. 10살이나 연상인 그의 음악제작에 대한 열정에 감동. 그리하여 앨범 ‘A. O. R’은 완성되었습니다.

 

- 레이지도 데뷔 40주년을 맞았다

20173, 카마야츠 히로시(무슈 카마야츠) 씨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사카의 TV 방송에서 데뷔할 기회를 주셨던 은인입니다. 5월의 송별회에서 재회했던 작사가 모리 유키노죠 씨. 40년 전에 우리들의 데뷔곡을 작사해주셨습니다.

 

모리 씨는 카게야마 군의 대표곡인 드래곤볼 Z’의 주제가 ‘CHA-LA HEAD-CHA-LA’를 작사해주셨습니다. 함께 있던 카게야마 군에게 항상 노래해주어 고마워라며 말을 걸어주셨습니다. 이 재회로 인해 40주년 기념 싱글은 모리 씨에게 작사를 부탁하기로 했습니다.

 

201712월에 발매한 싱글에 수록한 ‘Wandering Soul’은 이노우에 씨가 작곡했다.

이 노래는 언제나 영원히라는 구절로 시작됩니다. 이 부분은 제 고집이 들어갔는데, 녹음이 시작된 11월에 란티스와 반다이 비주얼의 통합화가 이미 수면 밑에서 진행되고 있었고, 우리는 20184월에 란티스 법인이 소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을 앞두고 긍정적인 멜로디와 노랫말로 직원들이나 팬들에게 마음을 전하는 노래입니다. ‘란티스의 혼은 언제나 영원. 언제까지라도 계속될 거야라고.

 

(2018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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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한 애니메이션에 어울리는 애니송을- 창업을 결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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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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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14회에선 애니송 음반회사 설립에 대해 밝힙니다.

'기동신세기 건담 X'의 엔딩곡 '휴먼터치'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녹음되었다

- 1995년, 식스티 뮤직 네트워크가 경영 부진으로.

“이노우에 군도 함께 하자” 식스티가 해산할 무렵, 반다이와 아뮤즈가 공동으로 신설한 음반 회사 에어즈에 권유 받았습니다. 그 밖에도 대형 오퍼들이 왔기에 망설였었습니다. 결정타는 식스티에서 친한 사이였던 경리 담당의 키카와 히토미 씨. 그녀가 에어즈로 입사하기로 정했다는 이야길 듣고 “키카와 씨가 간다면, 나도 가볼까”

- 에어즈는 ‘울트라맨 티가’ 등의 울트라맨 시리즈나 TV 애니메이션 ‘신기동세기 건담 X’의 엔딩곡을 담당헀다.

애니메이션 제작 담당인 선라이즈에서 프로듀서인 우에다 마스오 씨(애니플렉스 전 사장)을 만났습니다. “테마는 사랑. 외국인이 부르도록 합시다. 이노우에 군이 미국에서 녹음해와주세요” 동행한 사장의 지원도 있었기에 로스앤젤레스에서 녹음하기로 정해졌습니다.

‘작사, 작곡, 뮤지션까지 전부 외국인으로 구성해서 본격 서양음악을 만들어주지’ 레이지 시절 에어플레이의 음반을 들은 이래, 어덜트 오리엔티드 락(AOR) 장르를 항상 꿈꿔왔습니다. 키카와 씨한테서 건네받은 현금을 움켜쥔 채 단신으로 미국행. 영어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기에 고생했지만, 이 경험이 약 20년 후에 기적을 일으킵니다.

“반드시 하게 해주세요” 그렇게 부탁한 것은 만화 ‘사일런트 뫼비우스’의 TV 애니메이션이었습니다. 과거 이미지 송을 제작한 인연으로 ‘나 밖에 할 수 없잖아’라고 생각했습니다. 애니메이션의 기획제작을 맡은 반다이 비주얼을 방문하여 이미지 송의 실적이나 아사미야 키아 선생님과의 신뢰관계를 주장하여 음악 프로듀서를 맡았습니다.

- 1999년, 에어즈는 사업을 중지한다.

당시에는 아티스트와의 타이업이 급증하여, ‘진정한 애니송’이라 부를만한 작품은 적어지고 있었습니다. 세간에선 애니노래라면 ‘우주전함 야마토’의 사사키 이사오 씨 등의 베테랑 가수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드래곤볼Z’ 주제가를 부른 카게야마 군조차 라이브에선 충분한 관객을 모으지 못했습니다.

TV 애니메이션의 심야방송이 시작되면서, 제작현장에서도 박력과 스피드감 있는 영상표현이 실현되었습니다. 이러한 애니메이션의 진화에 애니송은 따라가지 못하는 인상이었습니다. 애니송 장르가 충분히 스며들지 못한 채, 재능 있는 뮤지션이나 크리에이터가 모이기 어려웠습니다.

‘지금 시대에 맞는 애니송을 만들고 싶다’-. 에어즈 퇴사 후, 애니메이션 음악을 중심으로 한 음반 회사를 차리기로 결심했습니다. 찬동하고 있던 것은 에어즈의 동료였던 이토 요시유키 씨와 마츠무라 키요코, 그리고 경리 담당의 키카와 씨까지 세 명. 드디어, 란티스의 창업입니다.

(2018년 8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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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유 가사를 "싫습니다"며 거부, 애니송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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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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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11회에선 독립 후 처음으로 애니송에 손을 대게 된 경위를 돌아봅니다.

아이돌 시절과는 달리 네버랜드에서는 음악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앞줄 왼쪽이 본인)

- 1981년, 사무소에서 독립하여 전 LAZY의 베이시스트인 타나카 히데유키 씨와 Neverland를 결성하다.

킹레코드의 시게마츠 히데토시 디렉터의 발안으로 아쿠유 씨가 가사를 써 주셨습니다. 완성된 가사는 “우리덜 오사카에서 왔어서예~” 같은. “절대로 싫습니다.”라며 퇴짜를 놓았지만 상대는 대선생님. “어떻게 거절하겠냐!”라며 혼이 났습니다.

당시 히트하던 여성 3인조 그룹 슈가의 프로듀서와 짜보는 아이디어도 나왔었습니다. 그러나 맞추러 온 프로듀서하고 맞지 않아 “이것도 싫습니다.”라며 거절. “그냥 네 맘대로 해라!”라며 내팽개쳐졌습니다.

네버랜드는 스스로 라이브하우스를 찾거나 연습장소를 확보하는 등 마치 밑바닥 시절로 돌아간 활동이었습니다. 라이브 공지 포스터는 멤버들과 렌터카를 타고 붙이러 나갔습니다. 500~600장 정도 붙였습니다. 괴한으로 오인당해 경찰관한테 불려 멈추는 일도 있었습니다.

매일을 음악 연습에 몰두했습니다. 보컬은 가입 당시 17세. 아버님으로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이노우에 씨와 동거할 것”이라는 조건으로 허가를 받아내어 참가했습니다. 문외한이었기에 마이크스탠드의 사용법부터 철저히 교육시켰습니다. 카와구치호에 있던 합숙 스튜디오의 오너로부터 “제일 많이 연습한 것은 네버랜드”라는 보증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네버랜드 활동은 즐거웠습니다. 악기를 유지보수하거나, 악곡을 연구하거나. 하고싶은 일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충실감이 있었습니다. 레이지 시절에는 음악 이외의 일이 많아 스튜디오에 1개월간 틀어박혀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시간 같은 건 없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레이지에서 버라이어티 방송의 콩트를 극한까지 끌어올려보는 것도 괜찮았을 거란 생각도 들긴 합니다만.

- 1983년, Neverland는 애니송에 처음으로 얽힌다.

“이노우에 군, 애니메이션과 타이업해보지 않을래?” 킹레코드 씨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 이쪽은 “하?”였습니다. 킹레코드 안에서도 업무 상대가 애니메이션 관계 부서였기에 항상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 분위기도 달랐습니다.

TV 애니메이션 ‘사이코아머 고바리안’의 오프닝곡과 엔딩곡을 담당했습니다. “인트로를 더 화려하게”라던가 “1코러스를 90초에“라는 등의 주문을 받아 ‘리퀘스트가 많아서 귀찮은 업계구나’라고. 이게 첫인상이었습니다. 아직 ‘애니송’이란 단어도 없이 ‘티비 만화 주제가’라고 불렸습니다.

솔직히 어릴 때 TV 애니메이션은 ‘타이거마스크’를 본 정도로, 만화나 애니메이션엔 흥미가 없었습니다. 카게야마 군은 만화를 엄청 좋아해서 LAZY 시절에도 합숙소엔 만화책이 가득했습니다. 고바리안이 인연이 되어 프로레슬링의 입장 테마곡을 작곡하는 일도 맡게 되었습니다.

(2018년 8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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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노선으로 인기절정, 일단락되자 싹트기 시작한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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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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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8회에선 아이돌로서 인기절정이던 시기와 음악적으로 ‘빌린 음악’ 상태로 생긴 의문을 이야기합니다.

히비야 야외 음악당에서의 라이브에는 많은 팬들이 몰려들었다. (1978년)

- LAZY는 아이돌 노선에서 인기인이었다.

당시에는 음악 방송의 일이 월요일에 집중되어있었습니다. 니혼테레비의 ‘홍백가 베스트텐’과 ‘밤의 히트 스튜디오’의 생방송과 일본방송협회(NHK) ‘렛츠고 영’의 녹화도 월요일이었습니다. 멤버들은 방송국에서 부르면 언제라도 달려갈 수 있도록 월요일의 예정을 비우고 대기했습니다.

합숙소에는 욕실이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멤버가 한명씩 들어가기 때문에 아침 7시에 버스가 마중 나올 경우, 첫 번째 사람은 새벽 4시 30분 정도부터 들어갔습니다. 전속 스타일리스트를 달지 않는 시대로 복장은 사복이 기본이었습니다. 일이 끝나고 “내일은 흰 바지로”라 전달받으면 한밤중에 황급히 코인빨래방에서 세탁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아이돌월간지에는 ‘묘조(明星)’와 ‘헤이본(平凡)’이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한쪽의 촬영으로 괌에 가서 1박을 하고 오니, 다른 쪽 촬영으로 다시 괌에 가는 일정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괌에서 인기가수 사와다 켄지 씨와 우연히 만나게 되어 밤에 숙박처로 초대받은 적이 있습니다. “연예계에서 지켜야만 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라고 물으니 “알겠냐, 절대 지각만은 하지마라.”고 답하셨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로는 상대에게 할 말이 없잖냐.”라며. 이 가르침은 지금도 지키고 있습니다.

휴일은 없었지만 우리들은 아직 나은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톱아이돌이었던 핑크 레이디 씨와 함께 잡지의 표지를 장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촬영은 새벽 2시부터였습니다. 스튜디오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핑크 레이디 두 분께서 잠든 채로 스태프에게 업혀왔습니다. 의자에 앉혀지고, 카메라맨인 시노야마 키신 씨가 “자 찍습니다.”라고 말을 걸자 방긋 웃으며 찰칵찰칵. 다시 업혀져서 스튜디오를 나가 다음 장소로.

- 인기가 일단락되자, 아이돌노선의 레이지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전성기에는 다음날까지 외워야할 드라마의 대본과 신곡의 연습으로 머리가 꽉 찼습니다. 아무것도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시간의 여유가 생기니 우리들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들과 거의 동시기에 사잔 올스타즈 씨나 ‘록 3인방’의 Char 씨, 하라다 신지 씨, 세라 마치노리 & 트위스트 씨가 데뷔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곡을 만들고, 가사를 써서 활약했습니다.

반면에 LAZY로 세상에 알려진 노래는 누군가로부터 받은 작품투성이. 분장실에서 고다이고 씨나 세라 씨와 함께 있으면 “너희들 연주실력이 그렇게나 좋은데, 언제까지나 그런 걸로 좋은 거야?”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래. 그랬었지.”라며 깨달아갑니다.

그럴 때 사무소에서 한 음악 프로듀서를 소개받습니다. 후에 작가가 되는 이주인 시즈카 씨입니다.

(2018년 7월 30일)

 

アイドル路線で人気絶頂 一段落して芽生え始めた疑問|出世ナビ|NIKKEI STYLE

市場規模が膨らんだ「アニメソング(アニソン)」ビジネスの立役者の一人がバンダイナムコアーツの井上俊次副社長です。1970年代にロックバンド「レイジー」で一世を風靡しました。井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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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의 진으로 대망의 히트, 아이돌 취급에도 익숙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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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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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7회에선 처음으로 히트하던 당시를 돌아봅니다.

안무가 추가되는 등, 아이돌 노선의 히트에는 곤욕도 있었다.

- 음반은 팔리지 않았지만, 멤버들은 조금씩 그 반응을 느끼고 있었다.

백화점 옥상에서 공연을 반복했습니다. 연주 후에는 음반을 직접 팔았습니다. 점차 팬들이 몰려들면서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데뷔하고 반년 정도 지난 1977년 후반에는 1000명 정도의 팬들이 모여들 정도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곡인 ‘카무플라주’도 오리콘 랭킹 60위 정도에 올라 ‘마루쿄’ 마크가 붙었습니다. 지금은 없습니다만 ‘도쿄에서 팔리고 있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신주쿠 아시베 홀’에서도 라이브를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전성기의 그룹사운드들도 이용하던 공연장이었습니다. 우리들은 갖고 있는 곡이 4곡 밖에 없었기에 딥 퍼플 등 좋아하는 악곡을 연주했습니다. 아이돌밴드를 볼 생각에 찾아온 여성팬들은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반응은 있었습니다만 주변의 기대를 넘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카무플라주는 작곡이 토쿠라 슌이치 씨, 작사가 마츠토야 유미 씨였으니까요. 사무소에서는 “다음 곡이 팔리지 않으면 너희들 오사카로 돌아가라”며 최후통첩을 했습니다.

세 번째 곡은 ‘빨간두건양 조심해’. 스태프가 “이번부턴 안무가 들어갈거야”라 말해 모두가 “에!?”. 춤선생님은 핑크 레이디의 안무가 도이 하지메 씨였습니다. 꼴사나운 춤사위였지만 우리는 거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레슨 후에도 합숙소 앞의 공터에서 안무 연습. 의상도 컬러풀하고 화려해져 갔습니다. 그야말로 일본식 베이 시티 롤러스. 탓칸(타카사키 아키라)는 정말 싫어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최근 카게야마 군과 탓칸 셋이서 “빨간두건이 팔리지 않았다면 어찌되었으려나”라며 대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카게야마 군은 본가의 이발소를 이어받았을 거라고. 탓칸도 역시 본가의 자영업을 이었을 거라고. 저는 본가 신사이바시의 아메리카무라 부근에서 술집이라도 하고 있었겠지요.

- 1978년 2월, 배수의 진으로 발매한 ‘빨간두건양 조심해’가 대히트해 인기 탤런트가 되다.

당시 인기가수는 ‘신춘 숨은 장기자랑 대회’ 등의 버라이어티 방송에서 콩트도 했었습니다. 우리도 까마귀 차림을 하거나 상투를 틀고 시대극을 했습니다. 콩트 연습도 시간을 들여야 했습니다. 적당적당히 해버리면 이카리야 쵸스케 씨한테 혼나고 마니까요. 저는 열여덟살로, 화려한 예능계가 즐겁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은, 머리가 젖은 채로 자버린 탓에 잠꼬대로 인해 머리가 뻗친 채 아침에 일어났습니다. “이거 괜찮네”가 되어서 신문에 ‘포키컷’으로 소개돼 꽤나 유행했었지요.

잡지의 취재로 그라운드에 모이자 눈앞에 끈이 있었습니다. 어째선지 모르겠으나 “오늘은 스모를 하겠습니다.”라며 그 자리에서 끈을 둘러 스모를 했습니다. 이러한 일이 계속되고, 멤버들의 감각도 조금씩 무뎌져, 이런 매일에도 익숙해져 갔습니다.

(2018년 7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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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함 투성이의 데뷔곡, 저조한 판매량에 침울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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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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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6회에선 실패가 거듭되던 데뷔당시의 일화를 밝힙니다.

'Hey! I Love You!'는 마카이노 코우지 작곡, 모리 유키노죠 작사의 곡이었다.


- 1977년 7월, 레이지는 데뷔곡 ‘Hey! I Love You!’를 발매했다.

데뷔 전부터 정보 프로그램인 ‘긴자 NOW!’에 출연하고 있었습니다. ‘오사카에 엄청난 밴드가 있다’란 분위기를 연출하는 영상도 제작했습니다. 우리가 무대에서 연주하고 있으면 관객들이 “와~” “꺄~”하며 열광하는 영상이었습니다.

이것엔 내막이 있는데, 소속사가 인기 아이돌 그룹 베이 시티 롤러스의 영상을 상영하는 필름 콘서트를 개최했습니다. 레이지는 스크린 반대편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콘서트의 마지막, 스크린을 올리며 레이지가 베이 시티 롤러스의 노래를 연주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이내 “무명 밴드가 멋대로 연주하지마!”라며 팬들이 격노합니다만, 앞부분만 찍으면 크게 환호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TV 출연 효과로 레이지는 나름대로 화제의 신인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리고 7월 24일, 유원지 ‘토시마엔’에서 데뷔 라이브 공연을 했습니다. 의기양양하게 무대에 올라섰습니다만 관중은 100명도 모이지 않았습니다. 음반도 통 팔리지 않았습니다. 그전까지 분위기가 좋았던 만큼 다들 실망하여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습니다.

데뷔곡이 전혀 팔리지 않았기에 두 번째 곡인 카무플라주는 조금 방향을 틀었습니다. 당시에 잘나가던 핑크 레이디의 히트곡을 쓰던 토쿠라 슌이치 씨에서 작곡을 부탁하고, 카마야츠 히로시(무슈 카마야츠) 씨의 세팅으로 작사는 마츠토야 유미 씨로 정해졌습니다. “이걸로도 안되면 어쩌지”라고 할 정도로 최고의 조합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대대로 흘러가진 않았습니다.

- 익숙지 않은 팝 곡조에 록밴드 지향이던 레이지는 당황했다.

당시에는 신곡을 연습해도 데모 테이프가 없었기에 손에는 악보만이 들려있었습니다. 악보를 보면 코드는 알 수 있다지만 팝의 ‘셔플’이란 리듬이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이제는 간단히 칠 수 있지만 록밴드로 활동해온 레이지가 연주하기엔 익숙하지 않은 리듬. 스튜디오에서 필사적으로 연습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데뷔곡은 레코딩을 하지 않았습니다. 녹음일 스튜디오에 가니 어째선지 스튜디오 뮤지션들도 불려왔더군요. 디렉터는 “너희들도 그들과 똑같은 곡을 녹음할거야”라며.

녹음 후에 곡을 비교해 들어보곤 “어느 쪽에 잘해보여?”라며 고르란 듯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셔플 리듬이 서툴렀기에 어쩔 수 없이 스튜디오 뮤지션의 녹음판을 쓰기로 했습니다.

악기는 겉모습뿐이고, 제대로 연주하지 않는 사례는 결코 드물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연주도 못하고, 레코딩도 못하며, 라이브를 열어도 팬이 오지 않았던 데뷔곡엔 억울한 추억만이 남아있습니다.

(2018년 7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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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록을 싫어하는 사장, 아이돌 노선으로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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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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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5회에선 아이돌 노선으로 데뷔하며 기대를 배신당한 꼴이 되어버린 뒷사정을 들어봅니다.

본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레이지는 아이돌 노선으로 진행된다 (우측에서 두번째가 본인)


- 1977년 봄, 7월에 프로데뷔를 앞둔 레이지는 상경하여 사무소가 준비한 시로카네다이의 외딴집에서 공동생활을 시작한다. 낮에는 음악 스튜디오에서 연습하고, 밤에는 메이지대학 부속 나카노 고등학교의 야간학교로 통학했다. 사무소는 레이지가 아이돌 노선으로 데뷔하기로 결정하고 있었다.

(60년대를 풍미한) 그룹사운드 장르의 분들이 스태프로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우리들의 머리는 더욱 짧아져 있었습니다. “록을 하자”라며 권유했던 카마야츠 히로시(무슈 카마야츠) 씨조차도 처음엔 함께 미팅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만, 어느 샌가 참여자들은 바뀌어 있었습니다.

닉네임도 정했습니다. 과거 그룹사운드에서도 더 타이거즈라면 줄리, 샐리 등의 이름이 있었기에 ‘이노우에’라면 어떨까했었습니다. 어느 밤, 공동생활 중이던 합숙소의 전화가 울렸습니다. 수화기의 너머엔 호텔 뉴저팬에서 회의 중이던 사무소의 높은 분들이었습니다. 대뜸 “‘밀키’와 ‘포키’ 중에 어떤가 좋아요?” 어느 쪽도 싫었습니다만 “포키로 부탁합니다.”라고 답해 저는 포키가 되었습니다.

저를 시작으로 한명씩 전화를 바꿔줬습니다. 카게야마 군은 프랑스어로 ‘미셸’로 결정. 탓칸은 ‘수지’라 불려 “그거 여자 이름 아니에요?” 히로유키의 ‘퍼니’는 이름조차 아니었습니다. 히구치 씨는 ‘데이비’였습니다. “싫어요. 12월 24일(크리스마스 이브) 출생이니 ‘이브’로 해줘요.”라고 반론하였습니다만 받아들여지진 않았습니다.

- 소속사 트라이앵글 프로덕션의 후지타 코이치 사장은 60년대 그룹사운드 밴드인 아웃캐스트에서 기타를 담당했다.

“이야기가 다르잖아요.” 멤버들은 후지타 사장에게 몇 번이나 호소했습니다. 하지만 “딥 퍼플도 사실은 재즈를 하고 싶었을 수도 있잖아. 하지만 지금은 록을 해야 할 수밖에 없는 걸지도 몰라.” 등 영문 모를 소리만 했습니다. 그리곤 “너희들은 베이 시티 롤러스 노선이다.”라고.

당시엔 영국 아이돌 그룹 베이 시티 롤러스가 일본에서 대인기였습니다. 후지타 사장은 그들의 영상 필름을 현지에서 구입해 일본 전국에서 필름 콘서트를 개최하여 거기서 번 돈으로 무언가를 하려던 찰나 레이지와 만났습니다. 그즈음부터 ‘일본판 베이 시티 롤러스’의 컨셉을 생각했겠지요.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후지타 사장은 하드록을 싫어했어요. 역시 그룹사운드 쪽 사람이었어요. 록을 싫어하니까 80년대 팝 스타일의 여름 노래인 스기야마 키요타카 & 오메가트라이브를 프로듀싱해서 대성공한 것이겠죠.

(2018년 7월 25일)

 

アイドル路線で売り出し 社長はハードロック嫌い|出世ナビ|NIKKEI STYLE

市場規模が膨らんだ「アニメソング(アニソン)」ビジネスの立役者の一人がバンダイナムコアーツの井上俊次副社長です。1970年代にロックバンド「レイジー」で一世を風靡しました。井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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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슈 카마야츠가 부모를 설득, 레이지로서 도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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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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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4회에선 레이지가 데뷔에 이르는 경위를 되돌아 봅니다.

이노우에 슌지 씨가 참가한 레이지는 1977년에 데뷔했다


- 도우미로서 가입한 레이지는 TV출연을 목표로 오디션에 응시한다.

1976년 11월, 칸사이 지방의 심야방송 ‘헬로 영’의 오디션을 받았습니다. 매주 오디션을 뚫은 아마추어 밴드가 연주할 수 있는 코너가 있었습니다.

오디션장은 오사카 히가시스미요시의 슈퍼마켓 앞이었습니다. 결과는 기쁘게도 합격. 저는 도우미였습니다. 오디션 후에는 레이지에서 빠질 생각이었습니다만 방송엔 같은 멤버로 나와야만 한다는 룰이 있어서 녹화가 있을 3~4개월 동안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방송 녹화장은 오사카 쥬소 인근의 스튜디오. 고등학교 친구들도 응원해주러 달려와 줬습니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당일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프로의 악기를 보고 ‘역시 대단하구나~’라고 감탄했었습니다.

연주는 한판승부로, 시험을 보는 기분이었습니다. 연주한건 딥 퍼플의 ‘BURN’. 가장 연주가 어렵기로 소문이 난 곡에 일부러 도전했었습니다. 연주 후, 사회자 중 한명이었던 카마야츠 히로시(무슈 카마야츠) 씨의 대기실에 불려갔습니다. 그리고 한마디. “너희들 도쿄에서 프로 활동하지 않겠니?”

- 카마야츠 씨가 오사카에서 가족들을 설득했다.

가족회의가 시작되었습니다. 다들 탓칸(타카사키 아키라)의 집에 집합했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부모님들은 대반대. 예능통이라는 소문이 있던 근처 아저씨한테 상담했습니다. 제 어머님은 “아들이 도쿄에 팔려간다.” 비슷한 기분이 들으셨다고 합니다. 그래도 카마야츠 씨께서 오사카로 와 설득해주신 것이 결정타가 되었습니다.

카마야츠 씨는 레이지를 하드록 밴드로 만들고 싶어 하셨습니다. “(영국 배드 컴퍼니의 보컬)폴 로저스에게 작곡받도록 하자. 작사는 폴의 일본인 부인에게 써달라고 하면 괜찮잖아. 록으로 하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해냈다. 우리들 록을 할 수 있어.”라며 모두들 아주 기뻐했습니다. 카마야츠 씨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긴 머리를 휘날리며, 다리에는 런던부츠를 신고 있었습니다.

데뷔가 정해지면서 도쿄 키타아오야마에 있던 소속사 트라이앵글 프로덕션에 인사하러 갔습니다. 그랬더니 “머리카락 좀 말끔하게 하고 와라.”라며 ‘PEEK-A-BOO’라는 유명한 미용실로 끌려갔습니다. 어떤 헤어스타일인지 조차도 알지 못한 채 싹둑. 우리들은 ‘아앗...’. 하드록도 런던부츠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일단 오사카로 돌아왔지만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면 부모님께서 깜짝 놀라실 것이기에 고민했습니다. 고향 JR 나가이 역에 도착해, 홈에서 마음을 진정시킨 후에야 귀가했던 기억이 납니다. ‘카마야츠 씨의 이야기랑 다르잖아‘. 불안하긴 했지만 이미 상경 날짜는 정해져 있었습니다.

(닛케이산업신문 2018년 7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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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퍼플의 충격, 카게야마 히로노부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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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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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2회에서는 중학시절 경음악과의 만남을 되돌아봅니다.

중학생 야구부 시절

- 중학2학년 때 경음악과 만나다.

“이노우에 군, 피아노 치잖아? 키보드 좀 쳐줘.” 문화제에서 연주하기 위해서 동급생들이 말을 걸어준 것이 경음악과의 만남이었습니다.

그 동급생이 들려준 것이 영국의 록밴드인 딥 퍼플. 오르간이라면 보통 일렉톤(전자 오르간) 같은 맑은 소리가 연상되지만, 딥 퍼플의 키보디스트였던 존 로드는 뒤틀린 소리로 와앗!하며 연주. 세상에 이런 음악도 있었냐며 크게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이게 제 인생 첫 밴드활동입니다. 문화제니까 스테이지는 학교의 체육관. 밴드명도 없이 “다음은 2학년의 누구누구가 부릅니다.”하는 세계였어요. 피아노 발표회를 제외하곤 사람 앞에서 연주하는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연주한 것은 딥 퍼플의 ‘하이웨이 스타’였을까요. 문화제가 끝나고서 그대로 경음악 동호회에 가입했습니다. 연습은 가정학과실에서 했습니다. 가정과 선생님께서 흥미를 가져주셔서 “써도 된단다.”라며 허락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같은 시기에 야구부는 그만뒀습니다. 문화제에서 연주하니 야구부 선생님께서 “그런 짓하려면 그만둬라.”라며 야단치셨거든요. 당시의 록음악은 담배 냄새가 진하고, 좀 불량한 이미지였어요. 입부당시엔 기대받은 신인 투수였습니디만, 신장이 전혀 자라지 않아 “차라리 아래서부터 언더 스로로 던져라.”라고 지시받았었습니다. “좀 싫네. 꼴불견이야.”라고 생각해 퇴부했었습니다. 그때부터 음악 일직선으로 집중했습니다.

- 경음악을 시작할 당시엔 드럼지망이었다.

TV의 음악 프로그램에서 더 스파이더스라든지 더 타이거스라든지 그룹 사운드를 꽤나 시청했었습니다. 드럼을 정말 좋아했습니다. 잡지를 허벅지에 감고, 긴 젓가락을 두드리며 연습을 하곤 했습니다.

경음악 동호회에서도 키보드와 드럼 양 쪽을 담당했었습니다. 동호회의 멤버와 떨어져 고등학교에 통학하던 때도 밴드를 계속했었습니다. 그 외에도 두 개, 세 개씩 밴드를 겸임하고 있었고, 거기에선 드럼을 치고 있었습니다.

- 1976년 4월, 야마토가와 고등학교에 입학.

입학하자 친구들로부터 “경음악부에 들어가보자.”라는 권유를 받았어요. 저는 중학교 때부터 밴드를 해왔으니까 자신만만하게 처들어갔죠.

경음악부실에 들어가니 구석진 곳에 같은 신입생의 남자아이가 드럼을 치며 놀고있었습니다. 그걸 본 제가 다가서며 “비켜. 내가 쳐보게.”라고. 일어선 남자아이는 컬리 헤어 스타일에 새하얀 몸을 해 얌전한 분위기를 풍겼습니다.

이름은 카게야마 히로노부(景山浩宣)군.

후에 밴드 ‘LAZY’에서 동고동락하고, 인기 애니메이션 ‘드래곤볼Z’ 등의 테마송을 불러 인기 애니송 가수로 발돋움하는 ‘카게야마 히로노부’였습니다.

(닛케이산업신문 2018년 7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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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송은 붐을 넘어. 그 주도는 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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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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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이노우에 씨는 ‘직장인비록’의 제1회에서 스스로의 성장 동력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어린시절 집앞에서

- 1960년 5월 15일, 오사카에서 태어나다.

남부 스미요시구에서 태어났습니다. 스미요시대사라는 큰 신사 근처로, 정말로 주택뿐인 변두리였습니다. 아버지는 중소기업의 경리부에서 일하는 샐러리맨. 어머니는 뜨개질이 특기로, 어디한테서 부탁을 받아 돈벌이를 하셨습니다. 제 스웨터도 만들어주셨네요. 집에 욕실이 없었기에 가까운 목욕탕에 다녔습니다. 3살 위인 형은 대범한 타입. 둘째인 저는 할머니만 찾는 아이였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가정으로, 음악적인 요소는 전혀 없었습니다.

유치원 때는 자동차를 좋아해서 양철 미니카를 갖고 놀았습니다. 주무시고 계신 할머니의 등에 미니카를 달렸어요. 항상 할머니 방에 틀어박혀 느긋하게 살았죠. 이웃 친구들이 현관 앞에서 “슌짱 놀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조모께선 “슌지는 자고 있단다~”라며 멋대로 내쫓아버리시곤 하셨어요.

초등학생이 되면서 활발한 성격이 되었습니다. 집 앞 광장에서 야구를 하곤 했어요. 꽤나 몸집이 큰 아이로, 정렬하면 뒤에서 두 번째. 초등학생 6학년 때 신장이 162센티미터가 되었습니다. 믿지 못할 이야기지만 지금의 신장은 161.5센티미터로 당시의 키가 더 컸어요. 그래서 중학교 야구부에 들어가자마자 기대 받는 대형 루키 취급. 포지션은 투수였습니다.

당시, 매월 2000엔씩 돈을 모금하여 오르간을 사는 것이 근처의 어머님들 사이에서 유행했습니다. 어머니도 적립하고 계셨었습니다. 저는 음악은 완전 꽝으로 남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것도 잘 못했습니다. 통지표에선 다섯 등급 중 2. “얘야, 음악은 2등급이잖니”라며 혼났었습니다. 그때 마침 적립금이 만기가 되어 사게 된 오르간이 음악과의 만남이었습니다.

“피아노도 배우렴.”이라는 말을 들어 근처의 ‘야마구치 피아노교실’에 다녔습니다. 남자아이가 적었기에 부끄럽기도 했지만 피아노 교실엔 만화책이 있었기에 일주일에 한번, 만화를 보기위해서 다녔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선생님의 교육방식이 능숙하셨던 거였네요. “슌짱은 제대로 연습했구나”라며 칭찬하고 치켜세워주셨었습니다.

때로는 아버지의 지인께서 집에 오셔서 “슌짱 한곡 연주해줘”라며. 당시에 인기 있던 엔카 등을 외워서 연주하면 “고맙구나!”라며 1000엔도 받았었습니다. 그렇게 TV에서 들리는 곡을 연습해 연주하는 것을 즐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스즈키 신이치씨가 개발한 ‘스즈키 메서드’라는 교육법으로 연습했었습니다. ‘초등과’나 ‘연구과’ 등 여러 단계의 시험이 있었고 과제곡은 클래식 명곡이었습니다. 과제 클리어를 위해 불태웠네요. 중학 1학년까지 계속해 ‘고등과’까진 땄습니다만 ‘연구과’에 들어갈 무렵엔 피아노에서 경음악으로 흥미가 옮겨갔습니다. 음악 성적은 ‘5등급’이 되었네요.

(닛케이산업신문 2018년 7월 19일)


- 이노우에 슌지.
1976년 록밴드 ‘LAZY’ 가입. 1977년 17세의 나이로 프로데뷔. 해체 후에도 음악활동을 계속해 90년대엔 프로듀서로서의 활약이 본격화. 1999년 애니메이션 음악을 중심으로 하는 레코드회사 란티스를 창업. 오사카 출신.

 

アニソンはブームを越えて 仕掛け人は元レイジー|出世ナビ|NIKKEI STYLE

市場規模が膨らんだ「アニメソング(アニソン)」ビジネスの立役者の一人がバンダイナムコアーツの井上俊次副社長です。1970年代にロックバンド「レイジー」で一世を風靡しました。井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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