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의 명명자는 아사미아 키아. 애니음악에 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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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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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13회에선 애니메이션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시기를 돌아봅니다.

만화 '사일런트 뫼비우스'의 이미지송에서 편곡을 담당했다.

- 네버랜드 활동이 막혀버리면서 음악활동의 전환기가 찾아왔다.

네버랜드가 해체하기 직전해인 1989년. 타케다 테츠야 씨의 라이브에 백밴드로 참가했습니다. 악곡 연주 뿐 아니라 낭독극에선 바람이나 파도소리를 키보드로 표현하는 특수효과 같은 연주도 했었습니다. 공연은 연간 130회 정도. 개런티도 좋았습니다. 게다가 네버랜드의 모두가 타케다 씨의 지방공연을 쫓아가 현지에서 우리들의 라이브 공연도 열 수 있었습니다. 일석이조였지요.

백밴드 일에 불만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공연을 거듭하니 점점 위기감이 커져갔습니다. 타케다 씨에게 의존한 음악활동도 좋은걸까. 타케다 씨가 콘서트를 열지 않으면 우린 어떻게 되는 걸까. (해원대의 히트곡)‘생각해보니 멀리 온 것이다’를 연주하면서 감상에 젖어 ‘이대론 안되겠어!’라고.

- 1990년에 네버랜드는 해체. 기업 PR영상의 음악이나 이벤트 BGM 작곡 등으로 음악활동을 계속했다.

밤늦게 전화가 울리더니, “지금 스튜디오로 오세요”. 애니메이션 “사이코아머 고바리안”의 일로 알게 된 디렉터였습니다. 달려가니, 후에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주제가 ‘잔혹한 천사의 테제’로 인기를 얻는 타카하시 요코 씨가 있었습니다. 데모 녹음의 피아노 연주자로 곧장 참가했습니다.

이후 “만화 이미지송을 만들어보지 않을래?”. 그 디렉터가 인기만화 ‘사일런트 뫼비우스’의 이미지송 제작을 권유했습니다. 만화 속 장면이나 등장인물을 이미지하여 음악을 만듭니다. 작곡은 욧짱(음악 프로듀서 노무라 요시오 씨). 저는 편곡으로 참가했습니다.

- 사일런트 뫼비우스와의 만남으로 인해, 음악활동의 중심이 사운드 프로듀서로 옮겨간다.

“제가 만들게 해주세요”. 사일런트 뫼비우스에서 이미지송 앨범을 만든다는 소식을 듣고, 작가 아사미야 키아 선생님에게 달려갔습니다. 나라면 좋은 작품을 만들 자신이 있었습니다. 답변은 “좋아”. 이것이 처음으로 프로듀서가 된 순간입니다. 선생님의 “좋아”란 말이 없었으면 스태프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 시기엔 음반사 식스티 뮤직 네트워크의 사무실을 빌린 형태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일런트 뫼비우스의 CD를 발매하기 위해서 새로운 레이블을 세우게 되었습니다만, 딱하니 오는 레이블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아사미야 선생님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란티스가 좋겠다”

유래는 그리스의 고전에 등장하는 신비로운 꿈의 대륙 ‘아틀란티스’. 후에 창업하는 애니메이션 음악을 중심으로 한 음반회사 ‘란티스’의 작명자는, 아사미야 선생님이셨습니다.

(2018년 8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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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소에서 독립, 별안간 무급이 되어 밴드해체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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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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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12회에선 새로운 밴드의 해체로 인해 힘든 시기로 내몰렸던 시기를 되돌아 봅니다.

네버랜드 해체 후 결성한 휴먼네이처의 멤버들(오른쪽 끝이 본인)

- 1980년대 중반. LAZY 출신의 타카사키 아키라 씨와 히구치 무네타카 씨가 결성한 LOUDNESS는 미국 뉴욕에서 라이브 공연을 열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었다. 한편, 이노우에 씨가 타나카 히데유키 씨와 만든 Neverland는 용두사미로.

온천이나 호텔에서 디너쇼를 열거나 팬미팅을 여는 일이 늘어나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란 상황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무소에서 급료를 받고 있으니까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다’란 결론이 나면서 이시다 신고 씨와 설립했던 I.T.I. 하우스를 떠나기로 했습니다.

별안간 무급이 되었습니다. 네버랜드 보컬과 히데유키까지 셋이서 동거를 했습니다. 활동비를 확보하기 위해서 영상특전이 붙은 팬클럽을 만들고, 500개 정도의 비디오테이프 더빙을 나누어서 맡았습니다. 집에 전화를 걸어서 테이프에 녹음한 팬클럽 안내음성을 자동응답기로 틀었습니다. 테이프 재생 스위치가 눌릴 때 나는 ‘딸깍’소리가 계속 울려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라이브 공연장에도 직접 전화를 걸어서 부킹했습니다. 여섯 명이 탈 수 있는 차를 구입해, 악기를 싣고 전국각지를 돌아다녔습니다. 라이브 중에는 대기실에 아무도 없기 때문에 회계담당인 드러머는 돈을 넣은 가방을 허리에 찬 채로 연주했습니다. 지방 순회공연이 후반부에 다다르자 가방이 무거워져서 부릉부릉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분배하는 생활이었습니다.

당시, (전 LAZY의)카게야마 히로노부 군이 건축현장에서 일꾼 아르바이트를 하고, 경험도 쌓아 현장의 리더에 올랐었습니다. 네버랜드의 수입만으로는 먹고 살 수 없었기에 그에게 부탁해 일꾼으로 들어갔습니다.

아침 다섯시, 카게야마 군이 차로 데리러 와 주었습니다. 키보드를 치는 제 손가락을 배려해, 무거운 물건을 들지 않는 작업장에 배치해 주었습니다. 하루 작업이 끝나면 리더인 카게야마 군으로부터 일당 1만엔이 든 봉투를 받았습니다.

- 결국 네버랜드 해산을 결심한다.

음반사 어디든 사무소에 속해있지 않은 네버랜드와의 계약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든 계약을 해달라고, 음반사 앞에 숨어서 디렉터를 기다렸습니다. 나오자마자 “이 곡 들어봐주세요”라며 테이프를 건넵니다.

“그렇게 CD를 내고 싶다면 해체하면 되잖냐” 예전에 소속되어 있던 음반사 디렉터가 답했습니다. “해체CD”란 명목이 있다면 발매해 준다는 것입니다. 네버랜드의 이름을 버릴지 말지 멤버들과 미팅은 했지만 앞뒤 따질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예산이 없어서 스튜디오 녹음을 할 수 없었기에 요코하마 비브레에서 해체 라이브 공연을 녹음. 1990년, 최후의 CD를 발매하면서 네버랜드는 해체. 하지만 거의 같은 멤버들로 새로운 밴드를 결성했습니다.

(2018년 8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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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유 가사를 "싫습니다"며 거부, 애니송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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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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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11회에선 독립 후 처음으로 애니송에 손을 대게 된 경위를 돌아봅니다.

아이돌 시절과는 달리 네버랜드에서는 음악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앞줄 왼쪽이 본인)

- 1981년, 사무소에서 독립하여 전 LAZY의 베이시스트인 타나카 히데유키 씨와 Neverland를 결성하다.

킹레코드의 시게마츠 히데토시 디렉터의 발안으로 아쿠유 씨가 가사를 써 주셨습니다. 완성된 가사는 “우리덜 오사카에서 왔어서예~” 같은. “절대로 싫습니다.”라며 퇴짜를 놓았지만 상대는 대선생님. “어떻게 거절하겠냐!”라며 혼이 났습니다.

당시 히트하던 여성 3인조 그룹 슈가의 프로듀서와 짜보는 아이디어도 나왔었습니다. 그러나 맞추러 온 프로듀서하고 맞지 않아 “이것도 싫습니다.”라며 거절. “그냥 네 맘대로 해라!”라며 내팽개쳐졌습니다.

네버랜드는 스스로 라이브하우스를 찾거나 연습장소를 확보하는 등 마치 밑바닥 시절로 돌아간 활동이었습니다. 라이브 공지 포스터는 멤버들과 렌터카를 타고 붙이러 나갔습니다. 500~600장 정도 붙였습니다. 괴한으로 오인당해 경찰관한테 불려 멈추는 일도 있었습니다.

매일을 음악 연습에 몰두했습니다. 보컬은 가입 당시 17세. 아버님으로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이노우에 씨와 동거할 것”이라는 조건으로 허가를 받아내어 참가했습니다. 문외한이었기에 마이크스탠드의 사용법부터 철저히 교육시켰습니다. 카와구치호에 있던 합숙 스튜디오의 오너로부터 “제일 많이 연습한 것은 네버랜드”라는 보증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네버랜드 활동은 즐거웠습니다. 악기를 유지보수하거나, 악곡을 연구하거나. 하고싶은 일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충실감이 있었습니다. 레이지 시절에는 음악 이외의 일이 많아 스튜디오에 1개월간 틀어박혀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시간 같은 건 없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레이지에서 버라이어티 방송의 콩트를 극한까지 끌어올려보는 것도 괜찮았을 거란 생각도 들긴 합니다만.

- 1983년, Neverland는 애니송에 처음으로 얽힌다.

“이노우에 군, 애니메이션과 타이업해보지 않을래?” 킹레코드 씨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 이쪽은 “하?”였습니다. 킹레코드 안에서도 업무 상대가 애니메이션 관계 부서였기에 항상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 분위기도 달랐습니다.

TV 애니메이션 ‘사이코아머 고바리안’의 오프닝곡과 엔딩곡을 담당했습니다. “인트로를 더 화려하게”라던가 “1코러스를 90초에“라는 등의 주문을 받아 ‘리퀘스트가 많아서 귀찮은 업계구나’라고. 이게 첫인상이었습니다. 아직 ‘애니송’이란 단어도 없이 ‘티비 만화 주제가’라고 불렸습니다.

솔직히 어릴 때 TV 애니메이션은 ‘타이거마스크’를 본 정도로, 만화나 애니메이션엔 흥미가 없었습니다. 카게야마 군은 만화를 엄청 좋아해서 LAZY 시절에도 합숙소엔 만화책이 가득했습니다. 고바리안이 인연이 되어 프로레슬링의 입장 테마곡을 작곡하는 일도 맡게 되었습니다.

(2018년 8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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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ZY 해체 후, ‘포키’에서 이노우에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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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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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10회에선 레이지 해체 후에 참여한 새로운 그룹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트라이앵글 프로덕션을 떠나고 새로운 사무소 I.T.I. House를 설립하다.

- 1981년, LAZY 해체 후에도 이노우에 씨는 트라이앵글 프로덕션에 잔류했다.

후지타 코이치 사장은 퀸시 존스가 프로듀싱해 히트했던 ‘아이노코리다(사랑의 코리다)’의 일본어판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거기서 3인조 그룹 트로와 합류해 새로운 유닛인 ‘빅뱅’을 결성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노코리다를 일본어로 부른다는 건 솔직히, 촌스러웠죠. 빅뱅에서의 활동은 그 한곡뿐이 되었습니다.

저와 함께할 보컬을 발굴하기 위해서 후지타 사장과 저는 많은 데모 테이프들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한사람, 빛나는 원석이 있었습니다. “그룹 짜기 전에 함께 생활해봐” 후지타 사장의 제안으로 도쿄 아오야마의 저택에서 1주일 정도 함께 살았습니다. 동갑인 그는 대학생. (닛산의) 빨간 블루버드를 탄 채 “포키(이노우에), 바다에 가자”. 음악에 대한 이야기보다 놀러가자고 하다니. 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밤, 롯폰기의 야키토리 가게에 있던 후지타 사장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와는 못하겠습니다.” 그렇게 호소한 바로 다음 순간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주먹으로 크게 맞고 만화 속 한 장면처럼 카운터에서 굴러 떨어졌습니다. 이젠 인내의 한계입니다. “때려치겠어!” 입에서 곧장 튀어나왔습니다.

이후 후지타 사장은 스기야마 키요타카 & 오메가 트라이브를 프로듀스. 유닛 결성을 포기한 대학생 카도마츠 토시키는 이후 싱어송라이터로 대성공했습니다. 분명 저와 짰으면 그리 팔리지 않았겠죠. 제가 사무소를 뛰쳐나온 탓에 서로가 행복해진거라 생각합니다.

- 레이지의 베이시스트 타나카 히데유키 씨와 합류하다.

레이지 해체 후, 히로유키(타나카 히로유키), 탓칸(타카사키 아키라), 그리고 히구치(히구치 무네타카) 씨와 함께 ‘LOUDNESS’에 참가할 예정이었습니다만 음악성의 차이로 탈퇴하고 맙니다. 그래서 알고 지내던 기타리스트나 히구치 씨의 제자였던 드러머를 불러 미국발 ‘어덜트 오리엔티드 록(AOR)’을 지향하는 ‘Neverland’를 결성합니다.

“너희들 같이 할래?”라며 말을 걸어준 사람은 트라이앵글 프로덕션에서 레이지의 라이브 담당이던 이시다 신고 씨였습니다. 후지타 사장에게 맞은 사건이 사무실에 널리 퍼졌기에 배려해준 것이겠죠. 이시다 씨를 사장으로 사무소를 차리게 됩니다. 이름은 ‘이노우에’ ‘타나카’ ‘이시다’의 앞글자를 딴 I.T.I. House입니다.

네버랜드에선 레이지의 영광에 기댈 생각이 없었습니다. 자기소개도 “키보드의 이노우에입니다.” 본명으로 승부했고, 포키란 이름은 쓰지 않았습니다. ‘빨간두건양 조심해’ 같은 레이지 시절의 히트곡도 연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강한척했어도 레이지의 ‘잔향’으로서 활동했다는 측면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걸 증명하듯이 네버랜드의 활동은 조금씩 시들어가고 있었습니다.

(2018년 8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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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 해체하는 게 어때?“ 사장의 한마디에 흔쾌히 승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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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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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9회에선 레이지가 해체하게 된 경위를 밝힙니다.

1981년 2월 18일에 해체 선언을 하고, 기자회견에 임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이노우에 씨)

- 밴드의 인기도 피크가 지나면서 아이돌 노선에 대한 의심이 커졌다.

“너희들, 사실은 어떤 음악이 하고 싶은거야?” 사무소의 소개로 프로듀서 자리에 앉은 사람은, 후에 작가가 되는 이주인 시즈카 씨였습니다. “하드록이 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대답은 명쾌했습니다. “해보면 되잖아.” 하코네의 록웰 스튜디오에 틀어박혀 하드록으로의 회귀를 노린 앨범 제작에 착수했습니다.

잡지의 취재에도 “록을 하고 싶다.”라 공언했고 아무렇지도 않게 담배도 피워대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 7월부터의 전국 투어에선 “아이돌 노선은 이제 끝”이란 말과 “헤비메탈 선언.” 최연장자이자 리더인 무네타카 히구치 씨와 사무소의 후지타 코이치 사장이 충돌해 해고 소동도 일어났었습니다. 결국은 “맘대로 해!” 앨범 녹음장에 스태프가 아무도 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방치당한겁니다.

- 1980년 12월, LAZY는 앨범 ‘우주선지구호’를 발매. 수록곡의 대부분을 타카사키 아키라 씨부터 각 멤버들이 작곡. 이주인 시즈카 씨도 ‘다테 아유무’ 명의로 작사에 참가했다. 일본 록 팬들이 명반으로 꼽는 한 장이다.

5명이 각자 자신의 음악을 관철하는 경험을 하고보니 멤버 간 방향성의 차이가 확연해졌습니다. 탓칸과 히구치 씨는 한층 더 격렬함을 추구하고 싶어 했습니다. 카게야마 군은 솔로. 저는 ‘어덜트 오리엔티드 록(AOR)’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데이비드 포스터가 소속해있는 미국 밴드 에어플레이의 음반을 듣고 ‘이거다!’라고 직감했죠. ‘그 때’는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냥, 너희들 해체하는 게 어때?” 1981년 정초에 그런 말을 꺼낸건 후지타 사장이었습니다. 멤버 간 음악성의 차이가 확연히 차이나던 우리도 흔쾌히 승낙. 2월 18일에 예정되어 있던 카게야마 군의 버스데이 라이브를 해체발표일로 정했습니다.

데뷔의 기회를 주신 카마야츠 히로시(무슈 카마야츠) 씨에게 보고해야만 했습니다. 해체발표 전날 밤, 오사카에서 카마야츠 씨를 만났습니다. “우리들, 해체합니다.” 카마야츠 씨는 “으음”이라 신음하며 아무 말도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천천히 입을 열고 “디스코장에 갈까?” 어째선지 디스코장에서 미친 듯이 흔들었습니다.

다음날, 도쿄의 조후시 그린홀에서 LAZY는 해체를 발표했습니다.

해체 라스트 라이브는 5월 31일의 나고야 공연이었습니다. 라스트 라이브의 마지막, 드럼이나 기타의 마구 연주하며 곡을 끝내는 ‘휘젓기’가 좀처럼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들 끝내기 싫어서 20분 정도 계속한 게 아닐까요? 라이브 후에는 다섯이서 밤새 마시고 “다들 건강해.” 그것 뿐이었습니다. LOUDNESS를 결성한 탓칸과 히구치 씨 둘이나, 솔로 활동을 시작한 카게야마 군과는 몇 년간 만나는 일이 없었습니다.

(2018년 7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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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노선으로 인기절정, 일단락되자 싹트기 시작한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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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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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8회에선 아이돌로서 인기절정이던 시기와 음악적으로 ‘빌린 음악’ 상태로 생긴 의문을 이야기합니다.

히비야 야외 음악당에서의 라이브에는 많은 팬들이 몰려들었다. (1978년)

- LAZY는 아이돌 노선에서 인기인이었다.

당시에는 음악 방송의 일이 월요일에 집중되어있었습니다. 니혼테레비의 ‘홍백가 베스트텐’과 ‘밤의 히트 스튜디오’의 생방송과 일본방송협회(NHK) ‘렛츠고 영’의 녹화도 월요일이었습니다. 멤버들은 방송국에서 부르면 언제라도 달려갈 수 있도록 월요일의 예정을 비우고 대기했습니다.

합숙소에는 욕실이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멤버가 한명씩 들어가기 때문에 아침 7시에 버스가 마중 나올 경우, 첫 번째 사람은 새벽 4시 30분 정도부터 들어갔습니다. 전속 스타일리스트를 달지 않는 시대로 복장은 사복이 기본이었습니다. 일이 끝나고 “내일은 흰 바지로”라 전달받으면 한밤중에 황급히 코인빨래방에서 세탁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아이돌월간지에는 ‘묘조(明星)’와 ‘헤이본(平凡)’이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한쪽의 촬영으로 괌에 가서 1박을 하고 오니, 다른 쪽 촬영으로 다시 괌에 가는 일정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괌에서 인기가수 사와다 켄지 씨와 우연히 만나게 되어 밤에 숙박처로 초대받은 적이 있습니다. “연예계에서 지켜야만 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라고 물으니 “알겠냐, 절대 지각만은 하지마라.”고 답하셨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로는 상대에게 할 말이 없잖냐.”라며. 이 가르침은 지금도 지키고 있습니다.

휴일은 없었지만 우리들은 아직 나은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톱아이돌이었던 핑크 레이디 씨와 함께 잡지의 표지를 장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촬영은 새벽 2시부터였습니다. 스튜디오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핑크 레이디 두 분께서 잠든 채로 스태프에게 업혀왔습니다. 의자에 앉혀지고, 카메라맨인 시노야마 키신 씨가 “자 찍습니다.”라고 말을 걸자 방긋 웃으며 찰칵찰칵. 다시 업혀져서 스튜디오를 나가 다음 장소로.

- 인기가 일단락되자, 아이돌노선의 레이지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전성기에는 다음날까지 외워야할 드라마의 대본과 신곡의 연습으로 머리가 꽉 찼습니다. 아무것도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시간의 여유가 생기니 우리들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들과 거의 동시기에 사잔 올스타즈 씨나 ‘록 3인방’의 Char 씨, 하라다 신지 씨, 세라 마치노리 & 트위스트 씨가 데뷔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곡을 만들고, 가사를 써서 활약했습니다.

반면에 LAZY로 세상에 알려진 노래는 누군가로부터 받은 작품투성이. 분장실에서 고다이고 씨나 세라 씨와 함께 있으면 “너희들 연주실력이 그렇게나 좋은데, 언제까지나 그런 걸로 좋은 거야?”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래. 그랬었지.”라며 깨달아갑니다.

그럴 때 사무소에서 한 음악 프로듀서를 소개받습니다. 후에 작가가 되는 이주인 시즈카 씨입니다.

(2018년 7월 30일)

 

アイドル路線で人気絶頂 一段落して芽生え始めた疑問|出世ナビ|NIKKEI STYLE

市場規模が膨らんだ「アニメソング(アニソン)」ビジネスの立役者の一人がバンダイナムコアーツの井上俊次副社長です。1970年代にロックバンド「レイジー」で一世を風靡しました。井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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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의 진으로 대망의 히트, 아이돌 취급에도 익숙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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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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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7회에선 처음으로 히트하던 당시를 돌아봅니다.

안무가 추가되는 등, 아이돌 노선의 히트에는 곤욕도 있었다.

- 음반은 팔리지 않았지만, 멤버들은 조금씩 그 반응을 느끼고 있었다.

백화점 옥상에서 공연을 반복했습니다. 연주 후에는 음반을 직접 팔았습니다. 점차 팬들이 몰려들면서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데뷔하고 반년 정도 지난 1977년 후반에는 1000명 정도의 팬들이 모여들 정도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곡인 ‘카무플라주’도 오리콘 랭킹 60위 정도에 올라 ‘마루쿄’ 마크가 붙었습니다. 지금은 없습니다만 ‘도쿄에서 팔리고 있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신주쿠 아시베 홀’에서도 라이브를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전성기의 그룹사운드들도 이용하던 공연장이었습니다. 우리들은 갖고 있는 곡이 4곡 밖에 없었기에 딥 퍼플 등 좋아하는 악곡을 연주했습니다. 아이돌밴드를 볼 생각에 찾아온 여성팬들은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반응은 있었습니다만 주변의 기대를 넘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카무플라주는 작곡이 토쿠라 슌이치 씨, 작사가 마츠토야 유미 씨였으니까요. 사무소에서는 “다음 곡이 팔리지 않으면 너희들 오사카로 돌아가라”며 최후통첩을 했습니다.

세 번째 곡은 ‘빨간두건양 조심해’. 스태프가 “이번부턴 안무가 들어갈거야”라 말해 모두가 “에!?”. 춤선생님은 핑크 레이디의 안무가 도이 하지메 씨였습니다. 꼴사나운 춤사위였지만 우리는 거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레슨 후에도 합숙소 앞의 공터에서 안무 연습. 의상도 컬러풀하고 화려해져 갔습니다. 그야말로 일본식 베이 시티 롤러스. 탓칸(타카사키 아키라)는 정말 싫어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최근 카게야마 군과 탓칸 셋이서 “빨간두건이 팔리지 않았다면 어찌되었으려나”라며 대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카게야마 군은 본가의 이발소를 이어받았을 거라고. 탓칸도 역시 본가의 자영업을 이었을 거라고. 저는 본가 신사이바시의 아메리카무라 부근에서 술집이라도 하고 있었겠지요.

- 1978년 2월, 배수의 진으로 발매한 ‘빨간두건양 조심해’가 대히트해 인기 탤런트가 되다.

당시 인기가수는 ‘신춘 숨은 장기자랑 대회’ 등의 버라이어티 방송에서 콩트도 했었습니다. 우리도 까마귀 차림을 하거나 상투를 틀고 시대극을 했습니다. 콩트 연습도 시간을 들여야 했습니다. 적당적당히 해버리면 이카리야 쵸스케 씨한테 혼나고 마니까요. 저는 열여덟살로, 화려한 예능계가 즐겁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은, 머리가 젖은 채로 자버린 탓에 잠꼬대로 인해 머리가 뻗친 채 아침에 일어났습니다. “이거 괜찮네”가 되어서 신문에 ‘포키컷’으로 소개돼 꽤나 유행했었지요.

잡지의 취재로 그라운드에 모이자 눈앞에 끈이 있었습니다. 어째선지 모르겠으나 “오늘은 스모를 하겠습니다.”라며 그 자리에서 끈을 둘러 스모를 했습니다. 이러한 일이 계속되고, 멤버들의 감각도 조금씩 무뎌져, 이런 매일에도 익숙해져 갔습니다.

(2018년 7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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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함 투성이의 데뷔곡, 저조한 판매량에 침울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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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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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6회에선 실패가 거듭되던 데뷔당시의 일화를 밝힙니다.

'Hey! I Love You!'는 마카이노 코우지 작곡, 모리 유키노죠 작사의 곡이었다.


- 1977년 7월, 레이지는 데뷔곡 ‘Hey! I Love You!’를 발매했다.

데뷔 전부터 정보 프로그램인 ‘긴자 NOW!’에 출연하고 있었습니다. ‘오사카에 엄청난 밴드가 있다’란 분위기를 연출하는 영상도 제작했습니다. 우리가 무대에서 연주하고 있으면 관객들이 “와~” “꺄~”하며 열광하는 영상이었습니다.

이것엔 내막이 있는데, 소속사가 인기 아이돌 그룹 베이 시티 롤러스의 영상을 상영하는 필름 콘서트를 개최했습니다. 레이지는 스크린 반대편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콘서트의 마지막, 스크린을 올리며 레이지가 베이 시티 롤러스의 노래를 연주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이내 “무명 밴드가 멋대로 연주하지마!”라며 팬들이 격노합니다만, 앞부분만 찍으면 크게 환호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TV 출연 효과로 레이지는 나름대로 화제의 신인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리고 7월 24일, 유원지 ‘토시마엔’에서 데뷔 라이브 공연을 했습니다. 의기양양하게 무대에 올라섰습니다만 관중은 100명도 모이지 않았습니다. 음반도 통 팔리지 않았습니다. 그전까지 분위기가 좋았던 만큼 다들 실망하여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습니다.

데뷔곡이 전혀 팔리지 않았기에 두 번째 곡인 카무플라주는 조금 방향을 틀었습니다. 당시에 잘나가던 핑크 레이디의 히트곡을 쓰던 토쿠라 슌이치 씨에서 작곡을 부탁하고, 카마야츠 히로시(무슈 카마야츠) 씨의 세팅으로 작사는 마츠토야 유미 씨로 정해졌습니다. “이걸로도 안되면 어쩌지”라고 할 정도로 최고의 조합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대대로 흘러가진 않았습니다.

- 익숙지 않은 팝 곡조에 록밴드 지향이던 레이지는 당황했다.

당시에는 신곡을 연습해도 데모 테이프가 없었기에 손에는 악보만이 들려있었습니다. 악보를 보면 코드는 알 수 있다지만 팝의 ‘셔플’이란 리듬이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이제는 간단히 칠 수 있지만 록밴드로 활동해온 레이지가 연주하기엔 익숙하지 않은 리듬. 스튜디오에서 필사적으로 연습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데뷔곡은 레코딩을 하지 않았습니다. 녹음일 스튜디오에 가니 어째선지 스튜디오 뮤지션들도 불려왔더군요. 디렉터는 “너희들도 그들과 똑같은 곡을 녹음할거야”라며.

녹음 후에 곡을 비교해 들어보곤 “어느 쪽에 잘해보여?”라며 고르란 듯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셔플 리듬이 서툴렀기에 어쩔 수 없이 스튜디오 뮤지션의 녹음판을 쓰기로 했습니다.

악기는 겉모습뿐이고, 제대로 연주하지 않는 사례는 결코 드물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연주도 못하고, 레코딩도 못하며, 라이브를 열어도 팬이 오지 않았던 데뷔곡엔 억울한 추억만이 남아있습니다.

(2018년 7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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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록을 싫어하는 사장, 아이돌 노선으로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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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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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5회에선 아이돌 노선으로 데뷔하며 기대를 배신당한 꼴이 되어버린 뒷사정을 들어봅니다.

본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레이지는 아이돌 노선으로 진행된다 (우측에서 두번째가 본인)


- 1977년 봄, 7월에 프로데뷔를 앞둔 레이지는 상경하여 사무소가 준비한 시로카네다이의 외딴집에서 공동생활을 시작한다. 낮에는 음악 스튜디오에서 연습하고, 밤에는 메이지대학 부속 나카노 고등학교의 야간학교로 통학했다. 사무소는 레이지가 아이돌 노선으로 데뷔하기로 결정하고 있었다.

(60년대를 풍미한) 그룹사운드 장르의 분들이 스태프로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우리들의 머리는 더욱 짧아져 있었습니다. “록을 하자”라며 권유했던 카마야츠 히로시(무슈 카마야츠) 씨조차도 처음엔 함께 미팅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만, 어느 샌가 참여자들은 바뀌어 있었습니다.

닉네임도 정했습니다. 과거 그룹사운드에서도 더 타이거즈라면 줄리, 샐리 등의 이름이 있었기에 ‘이노우에’라면 어떨까했었습니다. 어느 밤, 공동생활 중이던 합숙소의 전화가 울렸습니다. 수화기의 너머엔 호텔 뉴저팬에서 회의 중이던 사무소의 높은 분들이었습니다. 대뜸 “‘밀키’와 ‘포키’ 중에 어떤가 좋아요?” 어느 쪽도 싫었습니다만 “포키로 부탁합니다.”라고 답해 저는 포키가 되었습니다.

저를 시작으로 한명씩 전화를 바꿔줬습니다. 카게야마 군은 프랑스어로 ‘미셸’로 결정. 탓칸은 ‘수지’라 불려 “그거 여자 이름 아니에요?” 히로유키의 ‘퍼니’는 이름조차 아니었습니다. 히구치 씨는 ‘데이비’였습니다. “싫어요. 12월 24일(크리스마스 이브) 출생이니 ‘이브’로 해줘요.”라고 반론하였습니다만 받아들여지진 않았습니다.

- 소속사 트라이앵글 프로덕션의 후지타 코이치 사장은 60년대 그룹사운드 밴드인 아웃캐스트에서 기타를 담당했다.

“이야기가 다르잖아요.” 멤버들은 후지타 사장에게 몇 번이나 호소했습니다. 하지만 “딥 퍼플도 사실은 재즈를 하고 싶었을 수도 있잖아. 하지만 지금은 록을 해야 할 수밖에 없는 걸지도 몰라.” 등 영문 모를 소리만 했습니다. 그리곤 “너희들은 베이 시티 롤러스 노선이다.”라고.

당시엔 영국 아이돌 그룹 베이 시티 롤러스가 일본에서 대인기였습니다. 후지타 사장은 그들의 영상 필름을 현지에서 구입해 일본 전국에서 필름 콘서트를 개최하여 거기서 번 돈으로 무언가를 하려던 찰나 레이지와 만났습니다. 그즈음부터 ‘일본판 베이 시티 롤러스’의 컨셉을 생각했겠지요.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후지타 사장은 하드록을 싫어했어요. 역시 그룹사운드 쪽 사람이었어요. 록을 싫어하니까 80년대 팝 스타일의 여름 노래인 스기야마 키요타카 & 오메가트라이브를 프로듀싱해서 대성공한 것이겠죠.

(2018년 7월 25일)

 

アイドル路線で売り出し 社長はハードロック嫌い|出世ナビ|NIKKEI STYLE

市場規模が膨らんだ「アニメソング(アニソン)」ビジネスの立役者の一人がバンダイナムコアーツの井上俊次副社長です。1970年代にロックバンド「レイジー」で一世を風靡しました。井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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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슈 카마야츠가 부모를 설득, 레이지로서 도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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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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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4회에선 레이지가 데뷔에 이르는 경위를 되돌아 봅니다.

이노우에 슌지 씨가 참가한 레이지는 1977년에 데뷔했다


- 도우미로서 가입한 레이지는 TV출연을 목표로 오디션에 응시한다.

1976년 11월, 칸사이 지방의 심야방송 ‘헬로 영’의 오디션을 받았습니다. 매주 오디션을 뚫은 아마추어 밴드가 연주할 수 있는 코너가 있었습니다.

오디션장은 오사카 히가시스미요시의 슈퍼마켓 앞이었습니다. 결과는 기쁘게도 합격. 저는 도우미였습니다. 오디션 후에는 레이지에서 빠질 생각이었습니다만 방송엔 같은 멤버로 나와야만 한다는 룰이 있어서 녹화가 있을 3~4개월 동안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방송 녹화장은 오사카 쥬소 인근의 스튜디오. 고등학교 친구들도 응원해주러 달려와 줬습니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당일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프로의 악기를 보고 ‘역시 대단하구나~’라고 감탄했었습니다.

연주는 한판승부로, 시험을 보는 기분이었습니다. 연주한건 딥 퍼플의 ‘BURN’. 가장 연주가 어렵기로 소문이 난 곡에 일부러 도전했었습니다. 연주 후, 사회자 중 한명이었던 카마야츠 히로시(무슈 카마야츠) 씨의 대기실에 불려갔습니다. 그리고 한마디. “너희들 도쿄에서 프로 활동하지 않겠니?”

- 카마야츠 씨가 오사카에서 가족들을 설득했다.

가족회의가 시작되었습니다. 다들 탓칸(타카사키 아키라)의 집에 집합했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부모님들은 대반대. 예능통이라는 소문이 있던 근처 아저씨한테 상담했습니다. 제 어머님은 “아들이 도쿄에 팔려간다.” 비슷한 기분이 들으셨다고 합니다. 그래도 카마야츠 씨께서 오사카로 와 설득해주신 것이 결정타가 되었습니다.

카마야츠 씨는 레이지를 하드록 밴드로 만들고 싶어 하셨습니다. “(영국 배드 컴퍼니의 보컬)폴 로저스에게 작곡받도록 하자. 작사는 폴의 일본인 부인에게 써달라고 하면 괜찮잖아. 록으로 하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해냈다. 우리들 록을 할 수 있어.”라며 모두들 아주 기뻐했습니다. 카마야츠 씨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긴 머리를 휘날리며, 다리에는 런던부츠를 신고 있었습니다.

데뷔가 정해지면서 도쿄 키타아오야마에 있던 소속사 트라이앵글 프로덕션에 인사하러 갔습니다. 그랬더니 “머리카락 좀 말끔하게 하고 와라.”라며 ‘PEEK-A-BOO’라는 유명한 미용실로 끌려갔습니다. 어떤 헤어스타일인지 조차도 알지 못한 채 싹둑. 우리들은 ‘아앗...’. 하드록도 런던부츠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일단 오사카로 돌아왔지만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면 부모님께서 깜짝 놀라실 것이기에 고민했습니다. 고향 JR 나가이 역에 도착해, 홈에서 마음을 진정시킨 후에야 귀가했던 기억이 납니다. ‘카마야츠 씨의 이야기랑 다르잖아‘. 불안하긴 했지만 이미 상경 날짜는 정해져 있었습니다.

(닛케이산업신문 2018년 7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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