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우미로 참가한 ‘레이지’ 실력파로 인기를 얻다"

https://style.nikkei.com/article/DGXZZO60249180R10C20A6000000?channel=DF180320167079

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

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3회에선 카게야마 히로노부 씨의 요청으로 레이지에 참가한 경위를 밝힙니다.

도우미로 가입한 레이지 (1977년 데뷔 당시. 왼쪽에서 두번째가 본인)

- 1976년.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노우에 씨는 카게야마 히로노부 씨의 권유로 밴드 ‘LAZY’에 가입한다.

매일매일, 종일토록 카게야마 군과 놀았습니다. 집이 가까웠기에 함께 돌아가거나, 집에서도 전화로 2시간 정도 수다를 떨거나 했습니다. 신기하게도 서로 잘 맞았어요. 앞바구니에 원통 모양의 항아리 도시락을 실은 채 자전거를 타고 있던 카게야마군의 모습이 지금도 떠오릅니다.

학교 경음악부는 수준이 높지 않았기에 길게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카게야마군은 4인조 밴드를 조직해 그는 기타 겸 보컬, 저는 드럼을 맡았습니다. 하굣길엔 포크가수 카가와 료 씨의 노래에 등장하는 테즈카야마의 ‘하얀 집’이라는 이름의 작은 찻집에 틀어박혀서 음반을 들었습니다. 음악은 취미로서 프로가 될 마음은 전혀 없었습니다. 모두가 함께 음악을 하고 있는 고등학생 생활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1학년 여름 쯤, 레이지 멤버들을 데려온 카게야마 군으로부터 “도우미를 해줬으면 해.”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TV에 출연하는 오디션을 받아보고 싶다며. 드럼이 아닌 키보드 역할이었지만 “도우미 역할 뿐이라면.”라면서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레이지는 카게야마 군이 유치원이나 초등학생 시절부터 소꿉친구로 지내던 타카사키 아키라 씨, 타나카 히로유키 씨와 함께 결성한 마을 밴드였습니다. 그때까진 여자아이가 키보드를 담당했었지만 어째선지 도움을 요청받았습니다. 저와 같은 타이밍에 드럼으로 2살 위인 히구치 무네타카 씨가 가입했습니다. 당시엔 자세한 사정을 몰랐습니다만, 최근에서야 카게야마군의 저서에 “프로를 노리기 위해서 키보드와 드럼 멤버를 교체했다.”라고 쓰여 있어 ‘아, 그 때문이었구나’라며 알게 되었습니다.

- 오사카 현지에서 LAZY는 실력파로 알려져 있었다.

레이지에서 연주할 오르간을 좀처럼 찾지 못하고 있어 곤란해 하고 있을 때, 지인이 오사카 니혼바시에서 팔고 있다고 가르쳐주었습니다. ‘콤보 오르간’이라는 기종이 중고로 10만엔 정도. 오락실에서 라이브 연주하는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았습니다. 리어카 짐칸에 싣고 돌아왔습니다.

레이지는 엄청 뛰어났습니다. 해외 아티스트의 카피도 완벽. 같은 악곡이라도 유럽판이나 해적판 등의 버전도 연주해냈었습니다. 기타인 탓칸은(타카사키 아키라)의 자택에는 테이프를 재생하는 오픈릴이 있었습니다. 그의 집에 모여서 테이프에 녹음되어있는 악곡을 절반 정도의 속도로 재생하여 철저하게 카피했습니다.

딥 퍼플, 레인보우, 유라이어 힙. 브리티시 록의 음반을 닥치는 대로 사서 구석까지 카피했습니다. 딥 퍼플을 연주할 줄 알다니 대단하다는 평판이 퍼져서 단독라이브 때는 유료임에도 수백명 정도를 모을 수 있었습니다. 연주를 잘하는 것만을 생각했었습니다. 되돌아보면 이것이 후에 오리지널 곡을 만들지 못해 활동이 정체되는 요인 중 하나가 됩니다.

(닛케이산업신문 2018년 7월 23일)

Posted by M. Salgado
,

“딥퍼플의 충격, 카게야마 히로노부와의 만남”

https://style.nikkei.com/article/DGXZZO60089880Y0A600C2000000?channel=DF180320167079

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

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2회에서는 중학시절 경음악과의 만남을 되돌아봅니다.

중학생 야구부 시절

- 중학2학년 때 경음악과 만나다.

“이노우에 군, 피아노 치잖아? 키보드 좀 쳐줘.” 문화제에서 연주하기 위해서 동급생들이 말을 걸어준 것이 경음악과의 만남이었습니다.

그 동급생이 들려준 것이 영국의 록밴드인 딥 퍼플. 오르간이라면 보통 일렉톤(전자 오르간) 같은 맑은 소리가 연상되지만, 딥 퍼플의 키보디스트였던 존 로드는 뒤틀린 소리로 와앗!하며 연주. 세상에 이런 음악도 있었냐며 크게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이게 제 인생 첫 밴드활동입니다. 문화제니까 스테이지는 학교의 체육관. 밴드명도 없이 “다음은 2학년의 누구누구가 부릅니다.”하는 세계였어요. 피아노 발표회를 제외하곤 사람 앞에서 연주하는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연주한 것은 딥 퍼플의 ‘하이웨이 스타’였을까요. 문화제가 끝나고서 그대로 경음악 동호회에 가입했습니다. 연습은 가정학과실에서 했습니다. 가정과 선생님께서 흥미를 가져주셔서 “써도 된단다.”라며 허락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같은 시기에 야구부는 그만뒀습니다. 문화제에서 연주하니 야구부 선생님께서 “그런 짓하려면 그만둬라.”라며 야단치셨거든요. 당시의 록음악은 담배 냄새가 진하고, 좀 불량한 이미지였어요. 입부당시엔 기대받은 신인 투수였습니디만, 신장이 전혀 자라지 않아 “차라리 아래서부터 언더 스로로 던져라.”라고 지시받았었습니다. “좀 싫네. 꼴불견이야.”라고 생각해 퇴부했었습니다. 그때부터 음악 일직선으로 집중했습니다.

- 경음악을 시작할 당시엔 드럼지망이었다.

TV의 음악 프로그램에서 더 스파이더스라든지 더 타이거스라든지 그룹 사운드를 꽤나 시청했었습니다. 드럼을 정말 좋아했습니다. 잡지를 허벅지에 감고, 긴 젓가락을 두드리며 연습을 하곤 했습니다.

경음악 동호회에서도 키보드와 드럼 양 쪽을 담당했었습니다. 동호회의 멤버와 떨어져 고등학교에 통학하던 때도 밴드를 계속했었습니다. 그 외에도 두 개, 세 개씩 밴드를 겸임하고 있었고, 거기에선 드럼을 치고 있었습니다.

- 1976년 4월, 야마토가와 고등학교에 입학.

입학하자 친구들로부터 “경음악부에 들어가보자.”라는 권유를 받았어요. 저는 중학교 때부터 밴드를 해왔으니까 자신만만하게 처들어갔죠.

경음악부실에 들어가니 구석진 곳에 같은 신입생의 남자아이가 드럼을 치며 놀고있었습니다. 그걸 본 제가 다가서며 “비켜. 내가 쳐보게.”라고. 일어선 남자아이는 컬리 헤어 스타일에 새하얀 몸을 해 얌전한 분위기를 풍겼습니다.

이름은 카게야마 히로노부(景山浩宣)군.

후에 밴드 ‘LAZY’에서 동고동락하고, 인기 애니메이션 ‘드래곤볼Z’ 등의 테마송을 불러 인기 애니송 가수로 발돋움하는 ‘카게야마 히로노부’였습니다.

(닛케이산업신문 2018년 7월 20일)

Posted by M. Salgado
,

"애니송은 붐을 넘어. 그 주도는 레이지"

https://style.nikkei.com/article/DGXZZO59810050R00C20A6000000

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

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이노우에 씨는 ‘직장인비록’의 제1회에서 스스로의 성장 동력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어린시절 집앞에서

- 1960년 5월 15일, 오사카에서 태어나다.

남부 스미요시구에서 태어났습니다. 스미요시대사라는 큰 신사 근처로, 정말로 주택뿐인 변두리였습니다. 아버지는 중소기업의 경리부에서 일하는 샐러리맨. 어머니는 뜨개질이 특기로, 어디한테서 부탁을 받아 돈벌이를 하셨습니다. 제 스웨터도 만들어주셨네요. 집에 욕실이 없었기에 가까운 목욕탕에 다녔습니다. 3살 위인 형은 대범한 타입. 둘째인 저는 할머니만 찾는 아이였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가정으로, 음악적인 요소는 전혀 없었습니다.

유치원 때는 자동차를 좋아해서 양철 미니카를 갖고 놀았습니다. 주무시고 계신 할머니의 등에 미니카를 달렸어요. 항상 할머니 방에 틀어박혀 느긋하게 살았죠. 이웃 친구들이 현관 앞에서 “슌짱 놀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조모께선 “슌지는 자고 있단다~”라며 멋대로 내쫓아버리시곤 하셨어요.

초등학생이 되면서 활발한 성격이 되었습니다. 집 앞 광장에서 야구를 하곤 했어요. 꽤나 몸집이 큰 아이로, 정렬하면 뒤에서 두 번째. 초등학생 6학년 때 신장이 162센티미터가 되었습니다. 믿지 못할 이야기지만 지금의 신장은 161.5센티미터로 당시의 키가 더 컸어요. 그래서 중학교 야구부에 들어가자마자 기대 받는 대형 루키 취급. 포지션은 투수였습니다.

당시, 매월 2000엔씩 돈을 모금하여 오르간을 사는 것이 근처의 어머님들 사이에서 유행했습니다. 어머니도 적립하고 계셨었습니다. 저는 음악은 완전 꽝으로 남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것도 잘 못했습니다. 통지표에선 다섯 등급 중 2. “얘야, 음악은 2등급이잖니”라며 혼났었습니다. 그때 마침 적립금이 만기가 되어 사게 된 오르간이 음악과의 만남이었습니다.

“피아노도 배우렴.”이라는 말을 들어 근처의 ‘야마구치 피아노교실’에 다녔습니다. 남자아이가 적었기에 부끄럽기도 했지만 피아노 교실엔 만화책이 있었기에 일주일에 한번, 만화를 보기위해서 다녔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선생님의 교육방식이 능숙하셨던 거였네요. “슌짱은 제대로 연습했구나”라며 칭찬하고 치켜세워주셨었습니다.

때로는 아버지의 지인께서 집에 오셔서 “슌짱 한곡 연주해줘”라며. 당시에 인기 있던 엔카 등을 외워서 연주하면 “고맙구나!”라며 1000엔도 받았었습니다. 그렇게 TV에서 들리는 곡을 연습해 연주하는 것을 즐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스즈키 신이치씨가 개발한 ‘스즈키 메서드’라는 교육법으로 연습했었습니다. ‘초등과’나 ‘연구과’ 등 여러 단계의 시험이 있었고 과제곡은 클래식 명곡이었습니다. 과제 클리어를 위해 불태웠네요. 중학 1학년까지 계속해 ‘고등과’까진 땄습니다만 ‘연구과’에 들어갈 무렵엔 피아노에서 경음악으로 흥미가 옮겨갔습니다. 음악 성적은 ‘5등급’이 되었네요.

(닛케이산업신문 2018년 7월 19일)


- 이노우에 슌지.
1976년 록밴드 ‘LAZY’ 가입. 1977년 17세의 나이로 프로데뷔. 해체 후에도 음악활동을 계속해 90년대엔 프로듀서로서의 활약이 본격화. 1999년 애니메이션 음악을 중심으로 하는 레코드회사 란티스를 창업. 오사카 출신.

 

アニソンはブームを越えて 仕掛け人は元レイジー|出世ナビ|NIKKEI STYLE

市場規模が膨らんだ「アニメソング(アニソン)」ビジネスの立役者の一人がバンダイナムコアーツの井上俊次副社長です。1970年代にロックバンド「レイジー」で一世を風靡しました。井上

style.nikkei.com

 

 

Posted by M. Salgad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