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 애니송 열기를 펼치다. 시부야의 성지에서 벌일 마지막 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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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 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최종회 제24회에선 새로운 꿈을 밝힙니다.

회사에서 피아노를 연주 중인 이노우에 씨

- 애니송 해외전개에 힘을 쏟다.

 

7월 로스앤젤레스와 상하이에서 애니송 라이브 애니송 월드 축제를 개최했습니다. 로스앤젤레스는 3일간 마이크로소프트 극장에 17천명을 동원, 상하이 역시 1만장의 티켓이 당일 매진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러브라이브! 굿즈도 인기, 폭염으로 신용카드 리더가기 고장나는 문제도 있었지만, 많은 손님의 기뻐하는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계기는 2014. 노키아 시어터(현 마이크로소프트 극장)에서 보컬로이드 하츠네 미쿠의 라이브 감상회 때 회장의 열기에 압도되어 애니송으로 여기를 만석으로 하고 싶다라고. 그리고 2016년에 제1회를 개최했습니다. 올해 11월에는 뉴욕에서 첫 공연을 할 예정입니다. 경기장은 해머스타인 볼룸. 아레나 같은 대형 공간은 아니지만 노려라, 메디슨 스퀘어 가든의 기분입니다.

 

7월 두 공연에서 놀란 적이 있습니다. 출연자의 절반 이상이 현지어로 MC(연주간 토크)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티스트의 노력에 감동을 받았어요. JAM Project는 영어, 중국어, 포르투갈어, 힌디어와 각국의 언어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 다음 꿈, 시부야에 새로운 성지를 만드는 것

 

업계발전에 이 음악홀이 필요합니다. 한다면 시부야가 아니면 의미가 없습니다”. 2017년 봄 쯤, 술집에서 반다이 남코 홀딩스의 타구치 미츠아키 사장과 직접 담판을 지었습니다. 눈에 띄는 1000평짜리 땅을 보고서 여기밖에 없어요라고. ‘시부야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습니다.

 

마음에 둔 것은 시부야의 밤 풍경이었습니다. 라이브하우스인 시부야 eggman에서 나온 땀투성이의 젊은이들과, NHK홀에서 나와 공원거리를 미소를 띈 채 걸어가고 있는 부인의 모습. 시부야야말로 음악의 심볼이 되는 거리라고 실감했습니다.

 

최근에는 2000명 규모의 홀이 부족합니다. 수천명의 공연장을 만원으로 만드는 애니송 아티스트가 늘었습니다만, 실제로 거기에 다다르기까지가 매우 어렵습니다. 성공을 꿈꾸며 땀흘리는 분들이 노래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고 싶습니다. 레코딩 스튜디오도 설치되어 애니메이션 음악 뿐만 아니라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자립해나갈 장소입니다.

 

인생은 마지막에 결판이 난다고 생각합니다. LAZY가 해산한 1980년대부터 약 10년간, 저는 성과를 내지 못한 채 계속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란티스 창업 후에는 정신없이 일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인생을 돌아보면 그 10년도 포함하여 다양한 국면에서 만났던 사람들과의 인연이, 생각지도 못한 형태로 일로써 이어지고 있습니다. 신기한 느낌입니다.

 

시부야 프로젝트는 자세한 시설 상태를 포함해 검토 중입니다만, 연령적으로 제 마지막 큰일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회사에서 퇴직하면, 공연장에서 악기관리 스태프로 채용해주지 않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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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823)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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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에 애니송 문화를 발신, 정액제 청취 방송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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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 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23회에선 정액제 청취 서비스 시작에 회상합니다.

7월, 중국에서 개최한 라이브 '애니송 월드 축제'에서도 JAM Project가 등장(중국 상하이)

- 란티스 창업 후 얼마되지않았던 2000, 실력파 애니송 가수들이 모인 JAM Project의 프로듀서를 맡게된다.

 

애니송 타이업 곡이 늘어나면서 미즈키 이치로 씨나 카게아마 히로노부 씨는 다음 세대에 진정한 애니송을 전하고 싶다라는 마음이 피어납니다. “포켓몬은 해외에서 대인기에요”. 기쁜 듯이 이야기하던 것은 포켓몬스터의 주제가를 부른 마츠모토 리카 씨. 해외에 먼저 가서, 문을 여는 유닛이 있어도 괜찮겠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닛명은 재팬 애니메이션송 메이커즈의 약자. 슬로건은 “150킬로의 공을 던지는 선수들을 모으자였습니다. 초기멤버는 미즈키 씨, 카게아마 씨, 마츠모토 씨, 엔도 마사아키 씨, 사카모토 에이조 씨. 지금과 다르게 주목도는 낮았고, 발족 기자회견에 모였던 기자는 10명 정도였습니다.

 

마침 로봇계의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이 많던 시기. 카게야마 씨가 지명된 일이 몇 개 있었습니다만, 발족 초기엔 죄송스럽게도 전부 JAM으로 돌렸습니다. 당시 작업했던 일 중 하나인 슈퍼로봇대전시리즈의 주제가는, 20년이 넘도록 계속하고 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애니송 쪽의 일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각자의 경위가 있어, 애니송에 구원받아 지금의 생활을 할수 있었습니다. JAM의 활동은 그러한 애니송에 대한 보은의 마음이 담겨있기에 그 열량이 대단합니다. 멤버들은 평균 50세를 넘었습니다만 귀찮을 정도로 파워풀합니다. 개런티는 등분이 되기에 N분의 1이 되어버립니다만.

 

애니메이션은 따뜻한 사람들의 모임이야”. 카게야마 씨와 자주 이야기합니다. 둘 다 제2의 음악 인생을 애니송한테 구원받았습니다. 우리가 뛰어들었던 연예계는 20세의 젊은이가 은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세계. 반면에 TV 애니메이션은 1쿨이 3개월. 실패해도 차례차례 기회가 돌아옵니다. 거기에 실패경험을 쌓지 않으면 히트곡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 2017, 전문 애니메이션송 정액제 서비스 아뉴타출범을 주도했다.

 

회사의 경계를 넘어 애니송 업계에 공헌합시다”. 2015, 애니메이션 마크로스시리즈에서 프로듀서를 맡은 플라잉 독의 사사키 시로 사장과 시부야의 선술집에서 의기투합했습니다. 스포티파이 등 자유로운 청취의 파도가 일본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아뉴타 구상의 시작입니다.

 

플라잉 독의 작은 회의실. 거기가 아뉴타의 사무실이 되었습니다. 20172월 첫 임원회의를 열어 신회사를 설립. KADOKAWA , 토호 씨, 포니캐넌 씨 등 업계의 10개사가 단결했습니다.

 

중국에서도 송신을 시작했습니다. 영상전달 서비스 비리비리와의 제휴입니다. 비리비리는 일본보다 싼 월 6위안(100)을 주장했습니다. 고민했지만 “6위안의 너머엔 많은 중국인 팬들이 있습니다”. 이 말로 납득을 하게 됩니다.

 

(2018822)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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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사마'의 성공, 팬들의 강력한 일체감에 놀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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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17회에선 일상계 애니메이션이나 심야 애니메이션이 떠오르던 시기를 회상합니다.

2005년에 시작한 '애니멜로 섬머 라이브'에서 애니송의 열겨를 실감했다

- 2005, 휴대전화용 컨텐츠 송신의 드왕고가 애니송 라이브 이벤트 아니멜로 섬머 라이브(아니사마)를 개최. 프로듀서 오오타 토요키 씨(현재 드왕고 산하 메이지스 사장)는 란티스의 이노우에 씨에게 협력을 청했다.

 

아니사마 개최는 애니송을 둘러싼 분위기가 확하고 바뀐 순간이 아닐까요. 1회는 국립 요요기 경기장의 제1 체육관이 회장이었습니다. 아직 애니송 라이브가 그다지 많지 않던 시기. 정말 관객이 들어올까 걱정도 했습니다만, 오오타 씨는 반드시 요요기에서 성공시킨다라고. 최근의 아니사마에서는 생각도 못할 일입니다만 당시에는 출연자도 모이지 않아 곤란했었습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관중석은 90% 정도 찼습니다. 요요기 경기장에서의 콘서트 같은건 경험이 없기 때문에, 무대 위에서 출연자가 모두 감동해 울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계속 불러온 애니송에 이렇게나 많은 팬이 있냐며. 자기가 해온 일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거죠. 저나 스태프도 울고 있었습니다.

 

아니사마의 성공에 용기를 얻을 수 있었던 건 팬들도 마찬가지 였겠죠. 당시엔 펜라이트가 유행하던 시기였습니다. 8000~9000명이 일제히 펜라이트를 흔드는 모습을 보며 관객들도 애니송을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았구나하고 자신감을 가졌을 겁니다.

 

놀라운 점은 모든 노래를 다같이 응원하는 애니송 팬들의 일체감입니다. J-POP 음악 페스티벌에선 응원하는 아티스트가 노래를 마치고나면 관객들이 바뀝니다.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은 일입니다만, 애니송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같이 응원해줍니다. 이것은 애니송만의 독특한, 세계공통의 문화입니다. 애니송의 장르를 더욱 넓어질지도 모른다. 1회의 아니사마에서 5시간 동안 계속 응원해주시는 팬들을 눈앞에 두고, 그렇게 느꼈습니다.

 

- 아이돌그룹의 융성도 애니송에 혜택을 줬다고 한다.

 

2005년은 ’AKB48’이 활동을 시작하던 시기입니다. AKB48의 노래의 작사는 아키모토 야스시 씨입니다만, 작곡은 곡에 따라서 각각 다른 크리에이터들이 다뤘습니다. ‘모닝구무스메는 작사도 작곡도 모두 츤쿠씨가 다뤘습니다. AKB48의 등장은 크리에이터들에게 새로이 활약할 장소를 제공한 것입니다.

 

AKB48에서 그룹이나 멤버의 특징을 이해하고 작곡에 활용하는 경험을 했던 작곡가가 애니송 업계에서도 활약해주었습니다. 사실 아이돌업계와 애니송업계는 크리에이터를 통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프로작곡가가 맹활약하고 있다는 점에선 레이지의 현역시절과 분위기가 비슷합니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럭키스타’. 이후 애니송에 이끌려 온 젊고 재능있는 크리에이터들이 많은 히트 애니송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2018810)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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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성우의 노래를 지원해 미디어믹스의 출발점으로 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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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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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16회에선 일상계 애니메이션이나 심야 애니메이션이 떠오르던 시기를 회상합니다.

'아즈망가대왕'의 성공이 '일상계'라 불리우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이 늘어나는 계기로. 앨범 'Tribute to 아즈망가대왕'

- 란티스는 애니메이션 성우의 음악 프로듀스에도 힘을 쏟았다.

 

란티스의 기둥은 셋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가희(歌姬). 쿠리바야시 미나미 씨나 yozuca* , CooRie 씨입니다. 당시엔 PC게임 주제가의 일이 많았습니다. 두 번째는 모에()’가 아닌 불타오르는 계열() 가수. 카게야마 군 등이 결성한 JAM Project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신인 성우들. 노가와 사쿠라 씨, 치바 사에코 씨, 신타니 료코 씨들이었습니다.

 

2001년에 음악제작을 맡은 것이 애니메이션 갤럭시 앤젤’. 캐릭터송을 만들어 해당 등장인물을 연기한 성우들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음악을 축으로 한 미디어믹스의 원점입니다. 여주인공 밀푀유 사쿠라바 역을 맡은 신타니 씨는 솔로 데뷔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인기성우의 음악활동이 늘었지만 당시에는 애니메이션 성우가 노래하거나 이벤트에 출연하는 사례가 아직 드물었습니다.

 

- 후에 킹레코드 전무가 되는 애니메이션 프로듀서 오오츠키 토시미치 씨를 만난다.

 

미디어웍스(KADOKAWA)의 미디어믹스 작품 시스터 프린세스로 게임판 음악제작을 노렸습니다. 협상을 위해서 애니메이션 음악 제작이 확정된 킹레코드에 오오츠키 토시미치 씨를 찾아갔습니다.

 

그래, 자네가 란티스인가첫 대면부터 느닷없이 압도당했습니다. 동세대지만 박력이 대단했어요.

 

움찔거리면서 게임만이라도 맡겨주십시오라고 말을 꺼내니, “이노우에 씨 말야, 애니만드는데 돈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알아?”라는 오오츠키 씨. 여기에 더해 애니에 투자할 경우, 게임쪽 음악까지 담당하지 않으면 이쪽은 회수가 안된다고라고. 결국엔 그래도, 좋습니다. 좋은 곡을 만들어주세요라며 OK를 받았습니다. 그것이 오오츠키 씨와의 만남입니다.

 

2002, 만화 아즈망가대왕의 애니메이션화로 제작위원회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금액은 수천만엔. 창업한지 얼마되지 않은 벤처기업였기에, ‘목숨을 건출자였습니다.

 

판궈처인 미디어웍스는 란티스와 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았는데, 실은 오오츠키 씨의 추천이 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란티스가 아니면 안돼라며, 란티스의 출자를 인정해주셨습니다. 오오츠키 씨는 란티스에 재미있는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이란 인상이 심어져있었답니다. 남쪽으로 이주한 지금도 교제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즈망가대왕은 정겨운 일상생활을 그리는 일상계애니메이션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심야 애니메이션의 주목도가 높아지면서 라디오에선 관련 프로그램이 늘어났습니다. 그 무렵에는 현재 이사인 사쿠라이 유카 씨도 가세하면서 란티스의 동료도 늘어나갔습니다.

 

무언가가 터질 새벽녘. 그런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201889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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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한 애니메이션에 어울리는 애니송을- 창업을 결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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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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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14회에선 애니송 음반회사 설립에 대해 밝힙니다.

'기동신세기 건담 X'의 엔딩곡 '휴먼터치'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녹음되었다

- 1995년, 식스티 뮤직 네트워크가 경영 부진으로.

“이노우에 군도 함께 하자” 식스티가 해산할 무렵, 반다이와 아뮤즈가 공동으로 신설한 음반 회사 에어즈에 권유 받았습니다. 그 밖에도 대형 오퍼들이 왔기에 망설였었습니다. 결정타는 식스티에서 친한 사이였던 경리 담당의 키카와 히토미 씨. 그녀가 에어즈로 입사하기로 정했다는 이야길 듣고 “키카와 씨가 간다면, 나도 가볼까”

- 에어즈는 ‘울트라맨 티가’ 등의 울트라맨 시리즈나 TV 애니메이션 ‘신기동세기 건담 X’의 엔딩곡을 담당헀다.

애니메이션 제작 담당인 선라이즈에서 프로듀서인 우에다 마스오 씨(애니플렉스 전 사장)을 만났습니다. “테마는 사랑. 외국인이 부르도록 합시다. 이노우에 군이 미국에서 녹음해와주세요” 동행한 사장의 지원도 있었기에 로스앤젤레스에서 녹음하기로 정해졌습니다.

‘작사, 작곡, 뮤지션까지 전부 외국인으로 구성해서 본격 서양음악을 만들어주지’ 레이지 시절 에어플레이의 음반을 들은 이래, 어덜트 오리엔티드 락(AOR) 장르를 항상 꿈꿔왔습니다. 키카와 씨한테서 건네받은 현금을 움켜쥔 채 단신으로 미국행. 영어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기에 고생했지만, 이 경험이 약 20년 후에 기적을 일으킵니다.

“반드시 하게 해주세요” 그렇게 부탁한 것은 만화 ‘사일런트 뫼비우스’의 TV 애니메이션이었습니다. 과거 이미지 송을 제작한 인연으로 ‘나 밖에 할 수 없잖아’라고 생각했습니다. 애니메이션의 기획제작을 맡은 반다이 비주얼을 방문하여 이미지 송의 실적이나 아사미야 키아 선생님과의 신뢰관계를 주장하여 음악 프로듀서를 맡았습니다.

- 1999년, 에어즈는 사업을 중지한다.

당시에는 아티스트와의 타이업이 급증하여, ‘진정한 애니송’이라 부를만한 작품은 적어지고 있었습니다. 세간에선 애니노래라면 ‘우주전함 야마토’의 사사키 이사오 씨 등의 베테랑 가수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드래곤볼Z’ 주제가를 부른 카게야마 군조차 라이브에선 충분한 관객을 모으지 못했습니다.

TV 애니메이션의 심야방송이 시작되면서, 제작현장에서도 박력과 스피드감 있는 영상표현이 실현되었습니다. 이러한 애니메이션의 진화에 애니송은 따라가지 못하는 인상이었습니다. 애니송 장르가 충분히 스며들지 못한 채, 재능 있는 뮤지션이나 크리에이터가 모이기 어려웠습니다.

‘지금 시대에 맞는 애니송을 만들고 싶다’-. 에어즈 퇴사 후, 애니메이션 음악을 중심으로 한 음반 회사를 차리기로 결심했습니다. 찬동하고 있던 것은 에어즈의 동료였던 이토 요시유키 씨와 마츠무라 키요코, 그리고 경리 담당의 키카와 씨까지 세 명. 드디어, 란티스의 창업입니다.

(2018년 8월 7일)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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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노선으로 인기절정, 일단락되자 싹트기 시작한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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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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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8회에선 아이돌로서 인기절정이던 시기와 음악적으로 ‘빌린 음악’ 상태로 생긴 의문을 이야기합니다.

히비야 야외 음악당에서의 라이브에는 많은 팬들이 몰려들었다. (1978년)

- LAZY는 아이돌 노선에서 인기인이었다.

당시에는 음악 방송의 일이 월요일에 집중되어있었습니다. 니혼테레비의 ‘홍백가 베스트텐’과 ‘밤의 히트 스튜디오’의 생방송과 일본방송협회(NHK) ‘렛츠고 영’의 녹화도 월요일이었습니다. 멤버들은 방송국에서 부르면 언제라도 달려갈 수 있도록 월요일의 예정을 비우고 대기했습니다.

합숙소에는 욕실이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멤버가 한명씩 들어가기 때문에 아침 7시에 버스가 마중 나올 경우, 첫 번째 사람은 새벽 4시 30분 정도부터 들어갔습니다. 전속 스타일리스트를 달지 않는 시대로 복장은 사복이 기본이었습니다. 일이 끝나고 “내일은 흰 바지로”라 전달받으면 한밤중에 황급히 코인빨래방에서 세탁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아이돌월간지에는 ‘묘조(明星)’와 ‘헤이본(平凡)’이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한쪽의 촬영으로 괌에 가서 1박을 하고 오니, 다른 쪽 촬영으로 다시 괌에 가는 일정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괌에서 인기가수 사와다 켄지 씨와 우연히 만나게 되어 밤에 숙박처로 초대받은 적이 있습니다. “연예계에서 지켜야만 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라고 물으니 “알겠냐, 절대 지각만은 하지마라.”고 답하셨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로는 상대에게 할 말이 없잖냐.”라며. 이 가르침은 지금도 지키고 있습니다.

휴일은 없었지만 우리들은 아직 나은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톱아이돌이었던 핑크 레이디 씨와 함께 잡지의 표지를 장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촬영은 새벽 2시부터였습니다. 스튜디오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핑크 레이디 두 분께서 잠든 채로 스태프에게 업혀왔습니다. 의자에 앉혀지고, 카메라맨인 시노야마 키신 씨가 “자 찍습니다.”라고 말을 걸자 방긋 웃으며 찰칵찰칵. 다시 업혀져서 스튜디오를 나가 다음 장소로.

- 인기가 일단락되자, 아이돌노선의 레이지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전성기에는 다음날까지 외워야할 드라마의 대본과 신곡의 연습으로 머리가 꽉 찼습니다. 아무것도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시간의 여유가 생기니 우리들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들과 거의 동시기에 사잔 올스타즈 씨나 ‘록 3인방’의 Char 씨, 하라다 신지 씨, 세라 마치노리 & 트위스트 씨가 데뷔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곡을 만들고, 가사를 써서 활약했습니다.

반면에 LAZY로 세상에 알려진 노래는 누군가로부터 받은 작품투성이. 분장실에서 고다이고 씨나 세라 씨와 함께 있으면 “너희들 연주실력이 그렇게나 좋은데, 언제까지나 그런 걸로 좋은 거야?”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래. 그랬었지.”라며 깨달아갑니다.

그럴 때 사무소에서 한 음악 프로듀서를 소개받습니다. 후에 작가가 되는 이주인 시즈카 씨입니다.

(2018년 7월 30일)

 

アイドル路線で人気絶頂 一段落して芽生え始めた疑問|出世ナビ|NIKKEI STYLE

市場規模が膨らんだ「アニメソング(アニソン)」ビジネスの立役者の一人がバンダイナムコアーツの井上俊次副社長です。1970年代にロックバンド「レイジー」で一世を風靡しました。井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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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함 투성이의 데뷔곡, 저조한 판매량에 침울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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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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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6회에선 실패가 거듭되던 데뷔당시의 일화를 밝힙니다.

'Hey! I Love You!'는 마카이노 코우지 작곡, 모리 유키노죠 작사의 곡이었다.


- 1977년 7월, 레이지는 데뷔곡 ‘Hey! I Love You!’를 발매했다.

데뷔 전부터 정보 프로그램인 ‘긴자 NOW!’에 출연하고 있었습니다. ‘오사카에 엄청난 밴드가 있다’란 분위기를 연출하는 영상도 제작했습니다. 우리가 무대에서 연주하고 있으면 관객들이 “와~” “꺄~”하며 열광하는 영상이었습니다.

이것엔 내막이 있는데, 소속사가 인기 아이돌 그룹 베이 시티 롤러스의 영상을 상영하는 필름 콘서트를 개최했습니다. 레이지는 스크린 반대편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콘서트의 마지막, 스크린을 올리며 레이지가 베이 시티 롤러스의 노래를 연주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이내 “무명 밴드가 멋대로 연주하지마!”라며 팬들이 격노합니다만, 앞부분만 찍으면 크게 환호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TV 출연 효과로 레이지는 나름대로 화제의 신인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리고 7월 24일, 유원지 ‘토시마엔’에서 데뷔 라이브 공연을 했습니다. 의기양양하게 무대에 올라섰습니다만 관중은 100명도 모이지 않았습니다. 음반도 통 팔리지 않았습니다. 그전까지 분위기가 좋았던 만큼 다들 실망하여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습니다.

데뷔곡이 전혀 팔리지 않았기에 두 번째 곡인 카무플라주는 조금 방향을 틀었습니다. 당시에 잘나가던 핑크 레이디의 히트곡을 쓰던 토쿠라 슌이치 씨에서 작곡을 부탁하고, 카마야츠 히로시(무슈 카마야츠) 씨의 세팅으로 작사는 마츠토야 유미 씨로 정해졌습니다. “이걸로도 안되면 어쩌지”라고 할 정도로 최고의 조합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대대로 흘러가진 않았습니다.

- 익숙지 않은 팝 곡조에 록밴드 지향이던 레이지는 당황했다.

당시에는 신곡을 연습해도 데모 테이프가 없었기에 손에는 악보만이 들려있었습니다. 악보를 보면 코드는 알 수 있다지만 팝의 ‘셔플’이란 리듬이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이제는 간단히 칠 수 있지만 록밴드로 활동해온 레이지가 연주하기엔 익숙하지 않은 리듬. 스튜디오에서 필사적으로 연습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데뷔곡은 레코딩을 하지 않았습니다. 녹음일 스튜디오에 가니 어째선지 스튜디오 뮤지션들도 불려왔더군요. 디렉터는 “너희들도 그들과 똑같은 곡을 녹음할거야”라며.

녹음 후에 곡을 비교해 들어보곤 “어느 쪽에 잘해보여?”라며 고르란 듯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셔플 리듬이 서툴렀기에 어쩔 수 없이 스튜디오 뮤지션의 녹음판을 쓰기로 했습니다.

악기는 겉모습뿐이고, 제대로 연주하지 않는 사례는 결코 드물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연주도 못하고, 레코딩도 못하며, 라이브를 열어도 팬이 오지 않았던 데뷔곡엔 억울한 추억만이 남아있습니다.

(2018년 7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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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퍼플의 충격, 카게야마 히로노부와의 만남”

https://style.nikkei.com/article/DGXZZO60089880Y0A600C2000000?channel=DF180320167079

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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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2회에서는 중학시절 경음악과의 만남을 되돌아봅니다.

중학생 야구부 시절

- 중학2학년 때 경음악과 만나다.

“이노우에 군, 피아노 치잖아? 키보드 좀 쳐줘.” 문화제에서 연주하기 위해서 동급생들이 말을 걸어준 것이 경음악과의 만남이었습니다.

그 동급생이 들려준 것이 영국의 록밴드인 딥 퍼플. 오르간이라면 보통 일렉톤(전자 오르간) 같은 맑은 소리가 연상되지만, 딥 퍼플의 키보디스트였던 존 로드는 뒤틀린 소리로 와앗!하며 연주. 세상에 이런 음악도 있었냐며 크게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이게 제 인생 첫 밴드활동입니다. 문화제니까 스테이지는 학교의 체육관. 밴드명도 없이 “다음은 2학년의 누구누구가 부릅니다.”하는 세계였어요. 피아노 발표회를 제외하곤 사람 앞에서 연주하는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연주한 것은 딥 퍼플의 ‘하이웨이 스타’였을까요. 문화제가 끝나고서 그대로 경음악 동호회에 가입했습니다. 연습은 가정학과실에서 했습니다. 가정과 선생님께서 흥미를 가져주셔서 “써도 된단다.”라며 허락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같은 시기에 야구부는 그만뒀습니다. 문화제에서 연주하니 야구부 선생님께서 “그런 짓하려면 그만둬라.”라며 야단치셨거든요. 당시의 록음악은 담배 냄새가 진하고, 좀 불량한 이미지였어요. 입부당시엔 기대받은 신인 투수였습니디만, 신장이 전혀 자라지 않아 “차라리 아래서부터 언더 스로로 던져라.”라고 지시받았었습니다. “좀 싫네. 꼴불견이야.”라고 생각해 퇴부했었습니다. 그때부터 음악 일직선으로 집중했습니다.

- 경음악을 시작할 당시엔 드럼지망이었다.

TV의 음악 프로그램에서 더 스파이더스라든지 더 타이거스라든지 그룹 사운드를 꽤나 시청했었습니다. 드럼을 정말 좋아했습니다. 잡지를 허벅지에 감고, 긴 젓가락을 두드리며 연습을 하곤 했습니다.

경음악 동호회에서도 키보드와 드럼 양 쪽을 담당했었습니다. 동호회의 멤버와 떨어져 고등학교에 통학하던 때도 밴드를 계속했었습니다. 그 외에도 두 개, 세 개씩 밴드를 겸임하고 있었고, 거기에선 드럼을 치고 있었습니다.

- 1976년 4월, 야마토가와 고등학교에 입학.

입학하자 친구들로부터 “경음악부에 들어가보자.”라는 권유를 받았어요. 저는 중학교 때부터 밴드를 해왔으니까 자신만만하게 처들어갔죠.

경음악부실에 들어가니 구석진 곳에 같은 신입생의 남자아이가 드럼을 치며 놀고있었습니다. 그걸 본 제가 다가서며 “비켜. 내가 쳐보게.”라고. 일어선 남자아이는 컬리 헤어 스타일에 새하얀 몸을 해 얌전한 분위기를 풍겼습니다.

이름은 카게야마 히로노부(景山浩宣)군.

후에 밴드 ‘LAZY’에서 동고동락하고, 인기 애니메이션 ‘드래곤볼Z’ 등의 테마송을 불러 인기 애니송 가수로 발돋움하는 ‘카게야마 히로노부’였습니다.

(닛케이산업신문 2018년 7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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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송은 붐을 넘어. 그 주도는 레이지"

https://style.nikkei.com/article/DGXZZO59810050R00C20A6000000

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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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이노우에 씨는 ‘직장인비록’의 제1회에서 스스로의 성장 동력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어린시절 집앞에서

- 1960년 5월 15일, 오사카에서 태어나다.

남부 스미요시구에서 태어났습니다. 스미요시대사라는 큰 신사 근처로, 정말로 주택뿐인 변두리였습니다. 아버지는 중소기업의 경리부에서 일하는 샐러리맨. 어머니는 뜨개질이 특기로, 어디한테서 부탁을 받아 돈벌이를 하셨습니다. 제 스웨터도 만들어주셨네요. 집에 욕실이 없었기에 가까운 목욕탕에 다녔습니다. 3살 위인 형은 대범한 타입. 둘째인 저는 할머니만 찾는 아이였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가정으로, 음악적인 요소는 전혀 없었습니다.

유치원 때는 자동차를 좋아해서 양철 미니카를 갖고 놀았습니다. 주무시고 계신 할머니의 등에 미니카를 달렸어요. 항상 할머니 방에 틀어박혀 느긋하게 살았죠. 이웃 친구들이 현관 앞에서 “슌짱 놀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조모께선 “슌지는 자고 있단다~”라며 멋대로 내쫓아버리시곤 하셨어요.

초등학생이 되면서 활발한 성격이 되었습니다. 집 앞 광장에서 야구를 하곤 했어요. 꽤나 몸집이 큰 아이로, 정렬하면 뒤에서 두 번째. 초등학생 6학년 때 신장이 162센티미터가 되었습니다. 믿지 못할 이야기지만 지금의 신장은 161.5센티미터로 당시의 키가 더 컸어요. 그래서 중학교 야구부에 들어가자마자 기대 받는 대형 루키 취급. 포지션은 투수였습니다.

당시, 매월 2000엔씩 돈을 모금하여 오르간을 사는 것이 근처의 어머님들 사이에서 유행했습니다. 어머니도 적립하고 계셨었습니다. 저는 음악은 완전 꽝으로 남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것도 잘 못했습니다. 통지표에선 다섯 등급 중 2. “얘야, 음악은 2등급이잖니”라며 혼났었습니다. 그때 마침 적립금이 만기가 되어 사게 된 오르간이 음악과의 만남이었습니다.

“피아노도 배우렴.”이라는 말을 들어 근처의 ‘야마구치 피아노교실’에 다녔습니다. 남자아이가 적었기에 부끄럽기도 했지만 피아노 교실엔 만화책이 있었기에 일주일에 한번, 만화를 보기위해서 다녔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선생님의 교육방식이 능숙하셨던 거였네요. “슌짱은 제대로 연습했구나”라며 칭찬하고 치켜세워주셨었습니다.

때로는 아버지의 지인께서 집에 오셔서 “슌짱 한곡 연주해줘”라며. 당시에 인기 있던 엔카 등을 외워서 연주하면 “고맙구나!”라며 1000엔도 받았었습니다. 그렇게 TV에서 들리는 곡을 연습해 연주하는 것을 즐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스즈키 신이치씨가 개발한 ‘스즈키 메서드’라는 교육법으로 연습했었습니다. ‘초등과’나 ‘연구과’ 등 여러 단계의 시험이 있었고 과제곡은 클래식 명곡이었습니다. 과제 클리어를 위해 불태웠네요. 중학 1학년까지 계속해 ‘고등과’까진 땄습니다만 ‘연구과’에 들어갈 무렵엔 피아노에서 경음악으로 흥미가 옮겨갔습니다. 음악 성적은 ‘5등급’이 되었네요.

(닛케이산업신문 2018년 7월 19일)


- 이노우에 슌지.
1976년 록밴드 ‘LAZY’ 가입. 1977년 17세의 나이로 프로데뷔. 해체 후에도 음악활동을 계속해 90년대엔 프로듀서로서의 활약이 본격화. 1999년 애니메이션 음악을 중심으로 하는 레코드회사 란티스를 창업. 오사카 출신.

 

アニソンはブームを越えて 仕掛け人は元レイジー|出世ナビ|NIKKEI STYLE

市場規模が膨らんだ「アニメソング(アニソン)」ビジネスの立役者の一人がバンダイナムコアーツの井上俊次副社長です。1970年代にロックバンド「レイジー」で一世を風靡しました。井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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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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影山ヒロノブ - 青い風のHOPE


歌:影山ヒロノブ

作詞:佐藤 大

作曲:清岡 千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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危険な奴らがホラ接近遭遇

키켄나야츠라가호라셋킨소구

위험한 녀석들이 저거봐 접근조우


僕らの味方はそうさ無鉄砲

보쿠라노미카타와소오사무뎃포오

우리들의 아군은 그렇지 무대포


歴史なんて信じない

레키시난테신지나이

역사 따위 믿지 않아


だから バッチリ決めてくれよ

다카라팟치리키메테쿠레요

그러니 제대로 끝내주자고


イカス 笑顔で ピースサイン!

이카스에가오데 피-스사인!

멋진 미소로 피스사인!


青い風のHOPE

아오이카제노HOPE

푸른 하늘의 HOPE


走り始めた伝説を

하시리하지메타덴세츠오

달리기 시작한 전설을


その手で刻みつけろ

소노테데키자미츠케로

그 손으로 새겨라


青い風のHOPE

아오이카제노HOPE

푸른 하늘의 HOPE


信じられない世界が

신지라레나이세카이가

믿을 수 없는 세상이


君を待ってる

키미오맛테루

널 기다려



まだまだこれから過激な人生

마다마다코레카라카게키나 진세이

아직이야 지금부터가 과격한 인생이지


見上げてごらんよ青空快晴

미아게테 고란요 아오조라 카이세이

위를 바라보렴 쾌청한 푸른 하늘을


逃げるヒマなんてない

니게루히마난테나이

도망칠 시간따윈 없어


だから 翼広げてゆけ

다카라츠바사히로게테유케

그러니 날개를 펼쳐보렴


イカス カッコで ワンツーパンチ!

이카스캇코데 완츠-판치!

멋진 자세로 원투펀치!


青い風のHOPE

아오이카제노HOPE

푸른 하늘의 HOPE


つらい時こそ胸をはれ

츠라이토키코소무네오하레

괴로운 때야말로 가슴을 펴라


新しい波をおこせ

아타라시이 나미오 오코세

새로운 파도를 일으키는거야


青い風のHOPE

아오이카제노HOPE

푸른 하늘의 HOPE


見えない明日を照すのさ

미에나이아스오테라스노사

보이지 않는 내일을 밝히는 거야


君が希望…

키미가 키보오

그대가 희망…



青い風のHOPE

아오이카제노HOPE

푸른 하늘의 HOPE


走り始めた伝説を

하시리하지메타덴세츠오

달리기 시작한 전설을


その手で刻みつけろ

소노테데키자미츠케로

그 손으로 새기는거야


青い風のHOPE

아오이카제노HOPE

푸른 하늘의 HOPE


見えない明日を照すのさ

미에나이아스오테라스노사

보이지 않는 내일을 비춰라


君が希望…

키미가키보오…

그대가 희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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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볼 스페셜 중 꿈도 희망도 없는 미래 트랭크스편 엔딩곡이자 미래 트랭크스 테마송

꿈도 희망도 없는 속내용이지만 가사가 넘 힘이 나서 가끔씩 듣는다.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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