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 애니송 열기를 펼치다. 시부야의 성지에서 벌일 마지막 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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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 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최종회 제24회에선 새로운 꿈을 밝힙니다.

회사에서 피아노를 연주 중인 이노우에 씨

- 애니송 해외전개에 힘을 쏟다.

 

7월 로스앤젤레스와 상하이에서 애니송 라이브 애니송 월드 축제를 개최했습니다. 로스앤젤레스는 3일간 마이크로소프트 극장에 17천명을 동원, 상하이 역시 1만장의 티켓이 당일 매진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러브라이브! 굿즈도 인기, 폭염으로 신용카드 리더가기 고장나는 문제도 있었지만, 많은 손님의 기뻐하는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계기는 2014. 노키아 시어터(현 마이크로소프트 극장)에서 보컬로이드 하츠네 미쿠의 라이브 감상회 때 회장의 열기에 압도되어 애니송으로 여기를 만석으로 하고 싶다라고. 그리고 2016년에 제1회를 개최했습니다. 올해 11월에는 뉴욕에서 첫 공연을 할 예정입니다. 경기장은 해머스타인 볼룸. 아레나 같은 대형 공간은 아니지만 노려라, 메디슨 스퀘어 가든의 기분입니다.

 

7월 두 공연에서 놀란 적이 있습니다. 출연자의 절반 이상이 현지어로 MC(연주간 토크)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티스트의 노력에 감동을 받았어요. JAM Project는 영어, 중국어, 포르투갈어, 힌디어와 각국의 언어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 다음 꿈, 시부야에 새로운 성지를 만드는 것

 

업계발전에 이 음악홀이 필요합니다. 한다면 시부야가 아니면 의미가 없습니다”. 2017년 봄 쯤, 술집에서 반다이 남코 홀딩스의 타구치 미츠아키 사장과 직접 담판을 지었습니다. 눈에 띄는 1000평짜리 땅을 보고서 여기밖에 없어요라고. ‘시부야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습니다.

 

마음에 둔 것은 시부야의 밤 풍경이었습니다. 라이브하우스인 시부야 eggman에서 나온 땀투성이의 젊은이들과, NHK홀에서 나와 공원거리를 미소를 띈 채 걸어가고 있는 부인의 모습. 시부야야말로 음악의 심볼이 되는 거리라고 실감했습니다.

 

최근에는 2000명 규모의 홀이 부족합니다. 수천명의 공연장을 만원으로 만드는 애니송 아티스트가 늘었습니다만, 실제로 거기에 다다르기까지가 매우 어렵습니다. 성공을 꿈꾸며 땀흘리는 분들이 노래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고 싶습니다. 레코딩 스튜디오도 설치되어 애니메이션 음악 뿐만 아니라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자립해나갈 장소입니다.

 

인생은 마지막에 결판이 난다고 생각합니다. LAZY가 해산한 1980년대부터 약 10년간, 저는 성과를 내지 못한 채 계속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란티스 창업 후에는 정신없이 일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인생을 돌아보면 그 10년도 포함하여 다양한 국면에서 만났던 사람들과의 인연이, 생각지도 못한 형태로 일로써 이어지고 있습니다. 신기한 느낌입니다.

 

시부야 프로젝트는 자세한 시설 상태를 포함해 검토 중입니다만, 연령적으로 제 마지막 큰일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회사에서 퇴직하면, 공연장에서 악기관리 스태프로 채용해주지 않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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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823)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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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에 애니송 문화를 발신, 정액제 청취 방송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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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 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23회에선 정액제 청취 서비스 시작에 회상합니다.

7월, 중국에서 개최한 라이브 '애니송 월드 축제'에서도 JAM Project가 등장(중국 상하이)

- 란티스 창업 후 얼마되지않았던 2000, 실력파 애니송 가수들이 모인 JAM Project의 프로듀서를 맡게된다.

 

애니송 타이업 곡이 늘어나면서 미즈키 이치로 씨나 카게아마 히로노부 씨는 다음 세대에 진정한 애니송을 전하고 싶다라는 마음이 피어납니다. “포켓몬은 해외에서 대인기에요”. 기쁜 듯이 이야기하던 것은 포켓몬스터의 주제가를 부른 마츠모토 리카 씨. 해외에 먼저 가서, 문을 여는 유닛이 있어도 괜찮겠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닛명은 재팬 애니메이션송 메이커즈의 약자. 슬로건은 “150킬로의 공을 던지는 선수들을 모으자였습니다. 초기멤버는 미즈키 씨, 카게아마 씨, 마츠모토 씨, 엔도 마사아키 씨, 사카모토 에이조 씨. 지금과 다르게 주목도는 낮았고, 발족 기자회견에 모였던 기자는 10명 정도였습니다.

 

마침 로봇계의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이 많던 시기. 카게야마 씨가 지명된 일이 몇 개 있었습니다만, 발족 초기엔 죄송스럽게도 전부 JAM으로 돌렸습니다. 당시 작업했던 일 중 하나인 슈퍼로봇대전시리즈의 주제가는, 20년이 넘도록 계속하고 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애니송 쪽의 일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각자의 경위가 있어, 애니송에 구원받아 지금의 생활을 할수 있었습니다. JAM의 활동은 그러한 애니송에 대한 보은의 마음이 담겨있기에 그 열량이 대단합니다. 멤버들은 평균 50세를 넘었습니다만 귀찮을 정도로 파워풀합니다. 개런티는 등분이 되기에 N분의 1이 되어버립니다만.

 

애니메이션은 따뜻한 사람들의 모임이야”. 카게야마 씨와 자주 이야기합니다. 둘 다 제2의 음악 인생을 애니송한테 구원받았습니다. 우리가 뛰어들었던 연예계는 20세의 젊은이가 은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세계. 반면에 TV 애니메이션은 1쿨이 3개월. 실패해도 차례차례 기회가 돌아옵니다. 거기에 실패경험을 쌓지 않으면 히트곡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 2017, 전문 애니메이션송 정액제 서비스 아뉴타출범을 주도했다.

 

회사의 경계를 넘어 애니송 업계에 공헌합시다”. 2015, 애니메이션 마크로스시리즈에서 프로듀서를 맡은 플라잉 독의 사사키 시로 사장과 시부야의 선술집에서 의기투합했습니다. 스포티파이 등 자유로운 청취의 파도가 일본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아뉴타 구상의 시작입니다.

 

플라잉 독의 작은 회의실. 거기가 아뉴타의 사무실이 되었습니다. 20172월 첫 임원회의를 열어 신회사를 설립. KADOKAWA , 토호 씨, 포니캐넌 씨 등 업계의 10개사가 단결했습니다.

 

중국에서도 송신을 시작했습니다. 영상전달 서비스 비리비리와의 제휴입니다. 비리비리는 일본보다 싼 월 6위안(100)을 주장했습니다. 고민했지만 “6위안의 너머엔 많은 중국인 팬들이 있습니다”. 이 말로 납득을 하게 됩니다.

 

(2018822)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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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40주년, 동경하던 음악가에게 의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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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 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22회에선 데뷔 40주년 기념 음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보물이라던 데이비드 포스터 씨와의 사진(왼쪽은 1987년 내일당시, 오른쪽은 2016년 산타모니카 스튜디오에서)

- 2017년에 데뷔 40주년을 맞이하는 카게야마 히로노부 씨와 기념앨범 제작을 시작했다.

 

카게야마 군은 이상한 사람으로, 무얼 하고 싶다고 말하지를 않습니다. 예전부터 그래왔기에 둘이서 식사를 하러 가면 맞는 게 없었습니다.

 

그런 카게야마 군한테 “40주년 앨범으로 이루고 싶은 꿈같은 건 있어?”라 물었더니 데이비드 포스터가 참가해주면 최고겠지라고. AOR(어덜트 오리엔티드 록) 장르로 우리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준 뮤지션. 1987년 내일시 찍어준 사진은 몸에서 떼지 않고 갖고 다니는 보물입니다.

 

처음엔 무리려나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20년 전 영어도 제대로 못 하면서 AOR에 대해 동경으로 애니메이션 기동신세기 건담 X’의 주제가를 로스앤젤레스에서 수록했을 당시에 신세를 졌던 분께서 데이비드 포스터 씨로 이어지는 인맥을 갖고 계셨던 겁니다. 그야말로 기적이었습니다.

 

그를 향한 마음을 전한 카게야마 군의 편지가 주효했을 겁니다. 카게야마 군이 직접 작곡한 데모 음원을 보내자, 자신이 그 곡을 어레인지하고 있는 모습이 동영상으로 보내졌습니다. ‘이건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라며 소름이 돋았습니다. 카게야마 군은 영어 작사에 도전했습니다. 다니고 있던 영어회화 선생님이 감수를 해주셨습니다.

 

녹음은 산타모니카 스튜디오. 개방적으로 맞이해줘서 놀랐습니다. 기계로 음정을 고치지 않는 전통적인 방식. 피치나 영어 발음에도 신경을 써주어 카게야마 군한테 몇 번이나 다시 부를 것을 지시했습니다. 10살이나 연상인 그의 음악제작에 대한 열정에 감동. 그리하여 앨범 ‘A. O. R’은 완성되었습니다.

 

- 레이지도 데뷔 40주년을 맞았다

20173, 카마야츠 히로시(무슈 카마야츠) 씨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사카의 TV 방송에서 데뷔할 기회를 주셨던 은인입니다. 5월의 송별회에서 재회했던 작사가 모리 유키노죠 씨. 40년 전에 우리들의 데뷔곡을 작사해주셨습니다.

 

모리 씨는 카게야마 군의 대표곡인 드래곤볼 Z’의 주제가 ‘CHA-LA HEAD-CHA-LA’를 작사해주셨습니다. 함께 있던 카게야마 군에게 항상 노래해주어 고마워라며 말을 걸어주셨습니다. 이 재회로 인해 40주년 기념 싱글은 모리 씨에게 작사를 부탁하기로 했습니다.

 

201712월에 발매한 싱글에 수록한 ‘Wandering Soul’은 이노우에 씨가 작곡했다.

이 노래는 언제나 영원히라는 구절로 시작됩니다. 이 부분은 제 고집이 들어갔는데, 녹음이 시작된 11월에 란티스와 반다이 비주얼의 통합화가 이미 수면 밑에서 진행되고 있었고, 우리는 20184월에 란티스 법인이 소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을 앞두고 긍정적인 멜로디와 노랫말로 직원들이나 팬들에게 마음을 전하는 노래입니다. ‘란티스의 혼은 언제나 영원. 언제까지라도 계속될 거야라고.

 

(2018821)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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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친구의 죽음에 충격 'LAZY'의 동료들을 떠나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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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 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21회에선 LAZY 멤버들의 잇따른 죽음을 돌아봅니다.

LAZY는 17년 만에 재결성된다

- 1981LAZY 해산 후, 이노우에 씨와 타나카 히데유키 씨는 네버랜드를 결성했다. 타카사키 아키라 씨와 히구치 무네타카 씨의 LOUDNESS는 일본의 하드록 씬을 견인. 카게야마 히로노부는 애니송 가수가 됐다.

 

1997, TV 방송 울트라맨 다이나의 음악 감독을 맡게 되었습니다. LAZY 멤버들은 울트라맨 세대. 재결성해서 엔딩곡을 만들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카게야마 군은 바로 흔쾌히 승낙. 히로유키는 당연히 괜찮아했을 테니 넘어가고, 연장자인 히구치 씨를 설득하러 갔습니다. 그가 단골로 드나들던 도쿄 시모키타자와의 선술집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재밌겠다. 하지만 탓칸(타카사키 아키라)이 뭐라고 말할진 모르겠는걸당시 히구치 씨는 라우드니스를 탈퇴하고 탓칸과 거리를 두던 상태였습니다.

 

다음으로 나선 곳은 롯폰기 프린스호텔의 바. 탓칸에게 사정을 설명하니 히구치는 뭐라던?” 어째선지 반말이었습니다. 떠들썩한 분위기였지만 히구치가 좋다면 좋아” “잘됐다라고 안심하며 히로유키에게 전화했더니 뜻밖에 나는 싫어란 대답. 결국, 처음에는 4명으로 재결성하고 나중에 히로유키가 가세했습니다. 17년 만의 재결성이었습니다.

 

해체 후 계속 만나지 않던 멤버도 있었는데, 다섯 명이 모이고 보니 과거의 레이지가 있었습니다. 나이를 먹어도 그 시절의 기분으로 돌아갈 수 있다니, 학교의 동아리 같아서 신기했습니다.

 

- 20069, 타나카 씨가 급서했다.

 

825일이 그의 생일이라서 축하하자고 모두 함께 이야기하던 참이었습니다. 연락을 준 것은 카게야마 군.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돌연사였습니다.

 

히로유키는 상냥한 사람이었습니다. 레이지 시절부터 합숙소에서 함께 살았고, 후에도 아파트에서 이웃사촌. 가장 돈이 없던 네버랜드 시대에도 함께 살았습니다. 침대에 휴대용 TV를 갖고 와, 보는 것은 언제나 영화 ET. 항상 울어버리니까 ET만 몇 번이나 보는 건데라며 태클을 걸기도 했던 정말로 순수한 남자였습니다.

 

- 2년 후, 히구치 씨가 간세포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등이 아프다라면서 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바로 입원. 고베의 큰 병원으로 갔어요. 투병 중에도 호쾌해서 문병하러 가면 신고베역에서 스테이크 도시락을 사줘치료로 머리가 빠지고, 몸이 야위어가도 평소의 쾌활한 히구치 씨였습니다. 침대 옆에는 자동차 잡지. 그때까진 스포츠카 밖에 타질 않았는데, “이제부턴 친환경이다. 퇴원하면 친환경 차량을 살까 생각해긍정적이었습니다.

 

떠나기 두, 세 달전, 둘이서 도쿄에 식사를 하러 갔습니다. 술도 담배도 끊었지만, 식욕은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조금 더 먹고 싶다라고 하여 세타가야 거리의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가게로. 한 손에 켄터키 치킨이 쥐어진 채 슌지, 고마워!”. 이게 마지막 모습이었어요.

 

(2018820)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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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다이 그룹에서 출자, 소속 아티스트도 40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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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20회에선 반다이 비주얼(현 반다이 남코 아츠)으로부터의 출자를 이야기합니다.

카와시로 씨(사진 왼쪽)의 말이, 반다이 남코 그룹 입성의 계기가 되었다

- 창업 2년째에 자본참가의 타진을 받았다.

 

다음에 사무실 가도 될까?” 전화의 상대방은 캐릭터 굿즈 등을 다루는 회사의 사장님이었습니다. 방문은 토요일. 창업 직후의 좁은 사무실을 둘러보며 아직 여섯자리 늘릴 수 있겠네. 우리가 출자할 테니 같이 해봄세

 

회사 멤버들에게 의견을 물었습니다. 당시의 란티스는 갓만들어진 벤처기업이었습니다. 산하에 들어감에 따라 회사가 어떻게 되어버릴지 잘 몰랐기에 불안이 앞섰습니다. 정말 고마우신 제안이셨습니다만 혼자만의 힘으로 자본금을 1000만엔에서 3000만엔으로 늘리는 길을 택했습니다.

 

이걸 어쩌지또 다른 불안도 있었습니다. 당시, 그 회사는 반다이 비주얼과 공동으로 사업에 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거절하면 반다이 비주얼과의 관계가 나빠지지 않을까하고 걱정했습니다.

 

불안을 불식하기 위해 반다이 비주얼을 방문했습니다. 그 자리에 나타난 것이 후에 사장으로 취임하는 카와시로 카즈미 씨.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라고 사정을 설명하자 카와시로 씨는 미소. “그건 말이죠, 이노우에 씨의 뜻을 제일 중요시 해도 괜찮습니다

 

몇 년 후, 란티스도 사업 확대의 전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자사의 레코딩 스튜디오를 만들기 위해 약 1억엔을 차입했습니다만, 사원들은 더 많은 애니메이션 작품에 투자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대로 단독 노선을 계속해도 자금 부족에 빠지는 것은 분명합니다. 상장도 선택지에 있었습니다만 주식공개로 고생하고 있는 회사도 알고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반다이 비주얼 카와시로 씨에게 물었습니다. “뜻을 소중히라는 말이 마음에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다이 비주얼도 음악 사업으로의 진출을 모색하고 있던 무렵이었습니다. 이때는 회사 멤버들의 의견도 일치했습니다. 2006, 51%의 출자를 받았습니다.

 

반다이 비주얼 산하에서, 란티스는 어른의 계단을 올랐습니다. 확실한 룰 아래 사원을 존중하는 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까진 규칙이 없는 상태였으니까요. 직원들한텐 좋은 결단이 아니었을까요.

 

- 출자를 받은 뒤에도 은 변하지 않았다.

 

2009년에 10년 동안 계속되어왔던 킹레코드와의 판매계약이 종료해, 반다이 비주얼로 계약처를 바꾸었습니다. 그때 건방지게도 우리는 새로운 레이블을 만들어 애니플렉스와 제네온 엔터테인먼트(당시)에 각각 판매 계약을 맺었습니다.

 

란티스에는 40팀의 아티스트가 있었습니다. 반다이 비주얼이 1쿨에 만드는 애니메이션은 2, 3. 그것만으로는 겨우 8팀 밖에 못 부릅니다. 아티스트가 노래할 장소를 확보하려면 자본 관계에 얽메이지 않고 애니메이션과의 접점을 가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아티스트가 노력해서 앨범을 만들고 라이브를 연다.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2018817)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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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고 노래하는 성우라이브, 애니송이벤트의 저변이 넓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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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19회에선 애니송라이브가 저변을 넓혀가던 시기를 돌아봅니다.

등장인물을 맡은 9명의 성우가 실제 라이브에서도 노래하고 춤추는 프로젝트 러브라이브!

- 2010, 애니메이션과 음악을 융합한 러브라이브!’시리즈가 시작된다. 9명의 여고생이 아이돌 활동에 힘쓰는 내용으로, 출연 성우가 애니메이션과 똑같이 춤을 추고 노래를 하는 라이브로 도쿄돔 만원에 성공할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처음 프로젝트에 대해 들었던 것은 애니메이션 제작을 맡은 선라이즈의 히라야마 사토시 프로듀서로부터입니다. 인기 아이돌에, 애니메이션과 게임 요소를 하나로 묶는다. 그리고 애니메이션 뮤직비디오를 CD와 함께 전개하는 아이디어였습니다. ‘기동전사 건담시리즈 등을 다루던 선라이즈가 모에계열에 자신 있는 란티스와 조합한다는 것에 재미를 느꼈습니다.

 

하지만, 당초엔 CD를 발매해도 팔리는 건 1000장 정도. 그런데도 관계자는 정열을 쏟았기에 회사 측에서도 좋은 의미에서 방치를 했습니다. 거기서 누군가가 영감을 떠올렸죠. “캐스트에게 애니메이션과 똑같은 댄스를 추게하는건 어떨까요?” 요코하마 블릿츠에서의 라이브를 계획 중에 매력적인 제안이었습니다. 노래만큼은 만들어 낼 수 있었으므로, 공연을 결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요코하마에서의 공연을 거쳐 캐스트가 애니메이션과 싱크로하여 춤추고 노래한다는 라이브 스타일이 정착해갔습니다.

 

- 대규모 애니송 라이브 개최도 늘어갔다. 2005년에 애니멜로 섬머 라이브’, 2009년에 애니맥스 뮤직스’, 2010년에 리스아니! 라이브가 시작. 애니송은 음악 장르의 하나로서 정착한다.

 

혼자 즐기는 이벤트였던 애니송 라이브가 친구들과 함께 즐기는 이벤트가 되어갔습니다. 애니송의 이미지가 바뀌어서 친구를 끌어들이기 쉬워졌고, 인터넷의 보급으로 팬들간의 교류가 생겨났기 때문일까요.

 

4명의 여성그룹 스피어의 라이브 공연장에서 앙케이트로 그 외에 좋아하는 아티스트는?’라는 답변으로 제일 많았던 것이 카게야마 군이 결성했던 하드 계열 ‘JAM Project’. 타입이 정반대인 그룹입니다. 의외의 결과였지만 애니송의 인기란 이런거려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애니송은 모두가 응원하는 문화. 아티스트가 달라도 고객층까지 다른 건 아니죠.

 

- 창업 10주년을 맞은 2009, 소속 아티스트가 한자리에 모이는 란티스 마츠리를 열었다.

 

후지큐 하이랜드 코니퍼 포레스트에서 이틀간 야외 라이브를 했습니다. 아키하바라에서 야마나시까지 임시 직행열차를 달리게 했습니다. 이틀째는 억수같이 퍼붓는 비. 레이지도 청춘의 한곡인 ‘BURN’을 연주한 후, 마지막엔 불꽃놀이를 했습니다. 온몸이 흙투성이였지만 야외 괜찮네. 즐거워라고 사원들과 함께 분위기가 고조되었습니다.

 

(2018816)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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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재능들이 손댄 ‘하루히’가 대폭발, ‘럭키스타도 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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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18회에선 애니메이션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럭키스타의 연이은 히트에 대한 뒷이야기를 밝힙니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은 주제가 뿐 아니라 삽입곡도 인기였다

- 2006년 방송된 TV 애니메이션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은 사회현상으로 이어졌다.

 

과감하게 젊은이에게 프로듀스를 맡겼습니다. 그 전까진 사장인 저와 창립 멤버인 이토 요시유키 씨가 음악 프로듀서를 맡고 있었습니다. “너한테 전부 맡길테니까, 곤란해지면 물어봐라며 보냈던 것은 사이토 시게루 씨. 당시 란티스에 막 입사했던 30세 언저리의 젊은이였습니다.

 

BGM이나 삽입곡을 작곡한 코우사키 사토루 씨는 남코(현 반다이 남코 엔터테인먼트) 출신. 스즈미야 하루히에서 연출이나 각본을 담당했던 야마모토 유타카 씨하고는 교토대학에서 친구사이였습니다. 작사는 하타 아키 씨. 처음에는 란티스의 거래처에서 근무하는 아르바이트였습니다만, “분명 재밌는 가사를 써줄테니까라던 스태프의 보증으로 작사를 의뢰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CD 매출 톱클래스인 대인기 크리에이터입니다.

 

주인공인 스즈미야 하루히는 히라노 아야 씨가 연기했습니다. 첫만남은 2001년에 방송된 애니메이션 천사의 꼬리였습니다. 캐릭터송 녹음 중에 아직 중학생이던 그녀의 리듬감이나 감각은 성우진 중에서도 돋보였습니다. 급성장 중인 히라노 씨와 활발하고 에너지 넘치는 하루히의 캐릭터가 잘 어울렸습니다.

 

젊은 스탭이 대히트를 성공시키면서, 그때까지 소소하게 히트를 거듭했던 저는 새로운 시대의 바람을 느꼈습니다. 킹레코드의 오오츠키 토시미치 씨도 잘됐네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서라며 기뻐해주셨습니다.

 

제가 사운드 프로듀스를 하게 되면, 이것저것 참견을 하고 싶어집니다. 스즈미야 하루히를 성공으로 이끈 것은 젊은 크리에이터의 자유로운 아이디어였습니다. 이 작품 이후, 저는 프로듀서로서 전면에 나서는 일은 없어집니다. 스즈미야 하루히는 란티스의 터닝포인트가 되었습니다.

 

- 스즈미야 하루히의 엔딩곡 하레하레유카이에서 등장인물이 추는 댄스를 따라하는 팬들이 속출. 그 열기를 공유하며 증폭하기 시작한 것이 동시기에 나타난 유튜브니코니코동화’. 애니메이션의 인기가 제작자의 의도를 넘어서는 인터넷 시대에 돌입했다.

 

팬이 애니메이션 작품을 응원하는 트렌드가 생긴 것은 최근입니다. 2007년 방송한 럭키스타에서는 니코니코동화 등에서 주제가 가져가! 세라복을 오리콘 랭킹 1위로 만들자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당초, 초기출하량은 5만매로 정해져있었습니다. ‘이 매수라면 1위는 무리겠지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큰일이 일어났어요팬들의 심기에 민감한 스태프들이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팬과 제일 가까운 란티스가 품절을 일으켜선 안된다미팅을 열어 출하 매수를 2배인 10만매로 늘리기로 했습니다. 결과는 오리콘 2위였습니다. 스즈미야 하루히와 럭키스타의 히트가 애니송 씬(scene)을 바꿨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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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성우의 노래를 지원해 미디어믹스의 출발점으로 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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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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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16회에선 일상계 애니메이션이나 심야 애니메이션이 떠오르던 시기를 회상합니다.

'아즈망가대왕'의 성공이 '일상계'라 불리우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이 늘어나는 계기로. 앨범 'Tribute to 아즈망가대왕'

- 란티스는 애니메이션 성우의 음악 프로듀스에도 힘을 쏟았다.

 

란티스의 기둥은 셋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가희(歌姬). 쿠리바야시 미나미 씨나 yozuca* , CooRie 씨입니다. 당시엔 PC게임 주제가의 일이 많았습니다. 두 번째는 모에()’가 아닌 불타오르는 계열() 가수. 카게야마 군 등이 결성한 JAM Project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신인 성우들. 노가와 사쿠라 씨, 치바 사에코 씨, 신타니 료코 씨들이었습니다.

 

2001년에 음악제작을 맡은 것이 애니메이션 갤럭시 앤젤’. 캐릭터송을 만들어 해당 등장인물을 연기한 성우들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음악을 축으로 한 미디어믹스의 원점입니다. 여주인공 밀푀유 사쿠라바 역을 맡은 신타니 씨는 솔로 데뷔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인기성우의 음악활동이 늘었지만 당시에는 애니메이션 성우가 노래하거나 이벤트에 출연하는 사례가 아직 드물었습니다.

 

- 후에 킹레코드 전무가 되는 애니메이션 프로듀서 오오츠키 토시미치 씨를 만난다.

 

미디어웍스(KADOKAWA)의 미디어믹스 작품 시스터 프린세스로 게임판 음악제작을 노렸습니다. 협상을 위해서 애니메이션 음악 제작이 확정된 킹레코드에 오오츠키 토시미치 씨를 찾아갔습니다.

 

그래, 자네가 란티스인가첫 대면부터 느닷없이 압도당했습니다. 동세대지만 박력이 대단했어요.

 

움찔거리면서 게임만이라도 맡겨주십시오라고 말을 꺼내니, “이노우에 씨 말야, 애니만드는데 돈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알아?”라는 오오츠키 씨. 여기에 더해 애니에 투자할 경우, 게임쪽 음악까지 담당하지 않으면 이쪽은 회수가 안된다고라고. 결국엔 그래도, 좋습니다. 좋은 곡을 만들어주세요라며 OK를 받았습니다. 그것이 오오츠키 씨와의 만남입니다.

 

2002, 만화 아즈망가대왕의 애니메이션화로 제작위원회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금액은 수천만엔. 창업한지 얼마되지 않은 벤처기업였기에, ‘목숨을 건출자였습니다.

 

판궈처인 미디어웍스는 란티스와 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았는데, 실은 오오츠키 씨의 추천이 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란티스가 아니면 안돼라며, 란티스의 출자를 인정해주셨습니다. 오오츠키 씨는 란티스에 재미있는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이란 인상이 심어져있었답니다. 남쪽으로 이주한 지금도 교제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즈망가대왕은 정겨운 일상생활을 그리는 일상계애니메이션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심야 애니메이션의 주목도가 높아지면서 라디오에선 관련 프로그램이 늘어났습니다. 그 무렵에는 현재 이사인 사쿠라이 유카 씨도 가세하면서 란티스의 동료도 늘어나갔습니다.

 

무언가가 터질 새벽녘. 그런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201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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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보험을 해지하여 자본금으로. 직원 넷이서 창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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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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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15회에선 스스로 자금을 대어 음반회사를 설립한 당시를 되돌아 봅니다.

 

오기 부분에 씰을 붙여 발매한 앨범 'I'm in you' 라이너노트의 마지막 페이지

1999. 애니메이션 음악을 중심으로 하는 음반회사를 창업한다.

 

당시엔 주식회사 설립에 자본금 1000만엔이 필요했습니다. 저금만으로는 부족해 생명보험도 해약해서 돈을 모았습니다. 회사명에는 매직가든이나 솔리드 복스같은 여러 가지 안이 있었습니다. 고민 끝에 과거 아사미야 키아 선생님께서 이름 지어주신 란티스로 결정했습니다.

 

곡 제작은 창업멤버로 할수 있었습니다만 문제는 디스트리뷰션(판매)였습니다. 그렇기에 유통망을 가진 판매 파트너를 찾아 유니버설 뮤직 등 대기업을 차례로 돌았습니다. 설립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란티스와 계약을 맺어줄 리 없었고, 모조리 거절당했습니다.

 

방문할 기업이 점점 줄어들어, 마지막은 킹레코드였습니다. 애니메이션 전문 레이블 스타차일드가 있어 무리란걸 알고 있었지만, 연간 매출액 2억엔이라는 사업계획을 믿어주어 계약이 결정되었습니다. 책임자는 시게마츠 히데토시 씨. 80년대 네버랜드의 디렉터로 신세를 졌었는데, 당시 임원으로 승진했었습니다.

 

운도 따랐습니다. 킹레코드에선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프로듀서이기도 했던 실력자 오오츠키 토시미치 씨가 때마침 외부에서 일하셨던 시기. 나중에 오오츠키 씨가 돌아와 이런 얘기는 듣지 못했어!”라며 화내셨다고 합니다. 시게마츠 씨의 승진과 오오츠키 씨의 부재. 이 두 가지가 행운의 포인트였습니다.

 

창업초만 하여도 란티스는 직원 4명인 세계최소 음반사였다.

 

에비스에 위치한 맨션의 방 하나를 얻어 시작을 했습니다. 집세는 월 35만엔 정도. 신용이 없었기에 리스 회사도 의자나 책상을 빌려주진 않았습니다.

 

카펫위엔 집에서 가져온 전화기와 작은 복사기 하나 뿐. 킹레코드 분이 인사를 하러 오시면 몹시 허둥지둥했었습니다. “회사가 붐벼서라고 거짓말을 하곤 근처의 호텔 엑셀런트 에비스의 카페에서 회의를 가졌습니다.

 

란티스의 첫 작품은 고등학생 시절의 친구인 카게야마 히로노부시 씨의 CD.

 

그의 노래를 어쿠스틱 버전으로 편곡해 저도 몇 곡인가 피아노를 쳤습니다. 어쿠스틱으로 만든 것은 녹음하는 데에 돈이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재킷 촬영도 스튜디오 구석에서 끝냈습니다.

 

인쇄소에서 온 라이너 노트(음반에 붙이는 해설지)를 보고 깜짝놀랐습니다. ‘KAGEYAMA H’O’RONOBU“라고 오기. ”진짜야?“ 말문이 막혔습니다. 지금이라면 다시 찍습니다만 당시엔 돈이 없었습니다. ‘HIRONOBU’ 스티커를 만들어서 다같이 한장한장 붙였어요. 4000장정도 붙였을까요? 카게야마 군에게는 미안한 일을 했습니다만 본인은 재밌는 일 하고 있네~“라며 웃어 넘겨줬습니다.

 

(201888)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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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한 애니메이션에 어울리는 애니송을- 창업을 결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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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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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14회에선 애니송 음반회사 설립에 대해 밝힙니다.

'기동신세기 건담 X'의 엔딩곡 '휴먼터치'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녹음되었다

- 1995년, 식스티 뮤직 네트워크가 경영 부진으로.

“이노우에 군도 함께 하자” 식스티가 해산할 무렵, 반다이와 아뮤즈가 공동으로 신설한 음반 회사 에어즈에 권유 받았습니다. 그 밖에도 대형 오퍼들이 왔기에 망설였었습니다. 결정타는 식스티에서 친한 사이였던 경리 담당의 키카와 히토미 씨. 그녀가 에어즈로 입사하기로 정했다는 이야길 듣고 “키카와 씨가 간다면, 나도 가볼까”

- 에어즈는 ‘울트라맨 티가’ 등의 울트라맨 시리즈나 TV 애니메이션 ‘신기동세기 건담 X’의 엔딩곡을 담당헀다.

애니메이션 제작 담당인 선라이즈에서 프로듀서인 우에다 마스오 씨(애니플렉스 전 사장)을 만났습니다. “테마는 사랑. 외국인이 부르도록 합시다. 이노우에 군이 미국에서 녹음해와주세요” 동행한 사장의 지원도 있었기에 로스앤젤레스에서 녹음하기로 정해졌습니다.

‘작사, 작곡, 뮤지션까지 전부 외국인으로 구성해서 본격 서양음악을 만들어주지’ 레이지 시절 에어플레이의 음반을 들은 이래, 어덜트 오리엔티드 락(AOR) 장르를 항상 꿈꿔왔습니다. 키카와 씨한테서 건네받은 현금을 움켜쥔 채 단신으로 미국행. 영어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기에 고생했지만, 이 경험이 약 20년 후에 기적을 일으킵니다.

“반드시 하게 해주세요” 그렇게 부탁한 것은 만화 ‘사일런트 뫼비우스’의 TV 애니메이션이었습니다. 과거 이미지 송을 제작한 인연으로 ‘나 밖에 할 수 없잖아’라고 생각했습니다. 애니메이션의 기획제작을 맡은 반다이 비주얼을 방문하여 이미지 송의 실적이나 아사미야 키아 선생님과의 신뢰관계를 주장하여 음악 프로듀서를 맡았습니다.

- 1999년, 에어즈는 사업을 중지한다.

당시에는 아티스트와의 타이업이 급증하여, ‘진정한 애니송’이라 부를만한 작품은 적어지고 있었습니다. 세간에선 애니노래라면 ‘우주전함 야마토’의 사사키 이사오 씨 등의 베테랑 가수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드래곤볼Z’ 주제가를 부른 카게야마 군조차 라이브에선 충분한 관객을 모으지 못했습니다.

TV 애니메이션의 심야방송이 시작되면서, 제작현장에서도 박력과 스피드감 있는 영상표현이 실현되었습니다. 이러한 애니메이션의 진화에 애니송은 따라가지 못하는 인상이었습니다. 애니송 장르가 충분히 스며들지 못한 채, 재능 있는 뮤지션이나 크리에이터가 모이기 어려웠습니다.

‘지금 시대에 맞는 애니송을 만들고 싶다’-. 에어즈 퇴사 후, 애니메이션 음악을 중심으로 한 음반 회사를 차리기로 결심했습니다. 찬동하고 있던 것은 에어즈의 동료였던 이토 요시유키 씨와 마츠무라 키요코, 그리고 경리 담당의 키카와 씨까지 세 명. 드디어, 란티스의 창업입니다.

(2018년 8월 7일)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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