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rby "High Voltage"

SOCCER 2014. 3. 4. 14:47
해외축구를 몇 년간 보다보면 경기 전 자기가 서포팅하는 구단의 정보를 얻기 위해 언론사이트에 접속하는 버릇이 생기고 만다. 나도 그렇다. 언제나 아스와 마르카의 문자 중계를 켜놓은 채 한눈으로는 경기를, 한눈으로는 알지도 못하는 스페인어를 바라보며 대강 현지의 아저씨들이 하고 싶어하는 말을 비록 뉘앙스만 이라지만 잡아내려 노력한다. 이럴 때 마다 두 눈 멀쩡하게 낳아주신 부모님께 감사한다.

어쨋든 이번 경기는 엘 데르비 마드릴레뇨, 마드리드 더비다. 리가 테이블 맨 꼭대기에서 라이벌을 맞는게 얼마만 일까. 하지만 레알 마드리드 경기를 수년 째 보다보니 상대가 꼴지든 더비 라이벌이든 느껴지는 감정은 별 차이 없었다. '이기면 좋은거고 지면 또 욕해야지'라는 안일한 마음만이 가슴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레알매니아에서 "응원합시다!", "이길 수 있습니다" 등 손발 오그라드는 이야기를 거리낌없이 꺼내며 마드리디스타를 자처하는 운영자라 하기엔 이중적일 수도 있겠다. 특히나 몇 시즌부턴 생중계로 경기를 보면서도 내가 느끼는 축구에 대한, 레알 마드리드에 대한 열정이 사그러든건 아닌지에 대한 물음을 계속하고 있다.

어쨌든 잡생각과 함께 마르카를 클릭하고 사이트 메인 화면을 보는 순간, 가슴 속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High Voltage Derby"

삽질왕 마르카의 기사를 수년간 봐왔지만 이번 만큼 내 마음에 불씨를 지핀 적은 없었다. 그야말로 전기 스파크가 팍팍 튀는 센스다. 그래 매스미디어는 이래야지. 어느 새 난 콘서트장에 온 기분이었다. 그것도 앰프 소리에 몸이 찌릿찌릿하게 울리는 하드락 콘서트장 말이다.


마르카가 어설픈 합성을 한 것 처럼 이번 더비전은 단연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디에구 코스타 두 프론트맨간의 맞대결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었다. 하지만 본 스콧엔 앵거스 영 아니겠는가? 경기를 달구는 기타리스트의 역할은 알바로 아르벨로아와 코케가 맡았다.

물론 둘의 포지션은 다르고 하는 역할도 다르며 그들의 전압의 방식마저 다르다. 알바로 아르벨로아는 디에구 코스타와 라울 가르시아를 슬슬 건들며 그들 스스로가 오버 히트해 방전되게 하거나 카드를 받게 소극적으로 만드는 전략을 사용했다. 사실 아르벨로아는 심판 눈에 보이지 않는 반칙을 참 잘하는 못된 친구라 이런 역할이 딱이었고 카를로 안첼로티 레알 마드리드 감독도 이를 노린 듯이 라모스와 페페 사이에 끼어있는 코스타를 아르벨로아를 이용해 슬슬 건드리는 작전으로 코파 델 레이 준결승전에서 디에구 코스타를 코스 아웃 시킨 바 있다.
반면 코케는 중원에서 스파크를 일으키는 타입이다. 적극적인 압박을 통해 상대의 중앙 미드필더를 말려죽이고 공을 탈취해 전방의 코스타에게 연결한다. 자칫보면 활동량만 뛰어난 선수로 보일 수도 있지만 내실이 꽉 찬 선수로 차기 스페인 대표팀의 중심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승부는 이 차이에서 갈렸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코케는 제 역할을 한 반면 아르벨로아는 제 역할을 해내지못했다. 심지어 레알 마드리드의 4백은 네 명 모두 아르벨로아 같았다! 간떨려 죽는 줄...

레알 마드리드의 4백은 디에구 코스타의 성질을 돋워놓는 것 까진 성공했다. 하긴 그거 하나는 세계에서 최고라 자부해도 좋은 선수들이니. 그리고 이른 선제골과 함께 모든 건 계획대로였다. 하지만 아틀레티가 제 정신을 차리면서 타이트한 전방 압박에 나섰고 레알 마드리드의 중원이 애를 먹자 4백도 덩달아 우왕좌왕했다. 게다가 코엔트랑은 아르다 투란 마킹에 정신이 팔려 자신의 본래 담당인 코케를 놓치고 말았다. 아르다 투란은 4백 앞에서 좌우로 움직이며 공간을 만들어 주는 역할을 자주 맡는 전방 플레이메이커인데 코엔트랑이 저런 뻔한 공격 루트에 속아 공간을 내주는 모습을 보며 나는 한숨밖에 쉴 수 없었다.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공격에 당할 때 만큼 가슴쓰린 경우가 있을까. 마치 간접 흡연에 당한 폐처럼 썩어들어갔다.

반면 코케는 이번 경기에서 디에구 코스타가 빛날 수 있도록 찌릿찌릿한 활약을 보여줬다. 뛰어난 기술에 활동량까지 겸비한 디 마리아를 악착같이 물어 뜯었다. 덕분에 호날두에게 적절한 볼배급을 못하게 막았으며 코엔트랑이 디 마리아 없이 외로운 오버래핑을 하게 강제했다.

이번 경기에서 아틀레티 중원이 보여준 팀워크와 압박은 진짜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세명의 레알 마드리드 미드필더를 둘러쌓아 원활한 공격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후반전 체력적인 한계에 닿으면서도 모드리치 주변을 아틀레티 중원이 감싸는 모습은 마치 모드리치의 하수인이 모드리치를 지키는 모습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도 모드리치는 패스를 정말 잘해서 그 압박을 잘 벗어났다.

후반전 교체 이전까지 레알 마드리드는 베일, 벤제마, 호날두가 각개격파를 당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야말로 소통의 단절이었다. 때문에 레알 마드리드는 수비진을 하프라인까지 올리는 모험수로 억지로 간격을 좁혔고, 세르히오 라모스는 디에구 코스타 스페셜을 만들어줄 뻔 했다.

그나마 후반전은 이스코와 마르셀루, 카르바할 세명의 교체 선수가 잘해주면서 숨구멍이 트였다. 이젠 월드클래스의 안정감을 보이는 마르셀루님과 원숙미를 더해가는 카르바할님, 그리고 아틀레티의 강한 압박을 드리블로 슝슝 피해내가는 이스코님의 활약은 우리가 후반전에 동점골 득점에 성공하고 손에 땀을 쥐면서 후반전을 보게 한 원동력이었다. 뭐 이런 활약을 모두가 알고 있을테니 더이상 언급은 안하는 걸로.


물론 메인 매치였던 호날두와 코스타의 대결도 각각 나름대로의 번쩍임을 보여줬다. 호날두는 고전 끝 천금같은 동점골이란 결과로, 코스타는 간담을 서늘케하는 공간 찢어내기로. 앞서 내가 포장을 많이 했지만 이에 관한 글은 레매에도 쉴 새 없이 쏟아졌으므로 패스! 사실 귀찮아서...

귀찮아졌으니 마치 파워블로거같던 시작을 용두사미 마무리로 끝내야겠다.
카를로 안첼로티의 레알 마드리드는 중원의 핵, 사미 '카이저' 케디라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잘 해내고 있다. 하지만 아틀레티와 같은 강한 전방 압박을 보여주는 팀을 상대로는 자칫하다간 전방의 공격수들이 미아가 되어버리고 디 마리아나 모드리치는 가을도 아닌데 고독을 느낄 수 밖에 없다. 물론 그렇다고 현재 레알 마드리드 포메이션에 수정을 가할 곳은 없다. 현재의 전술은 현재의 마드리드가 낼 수 있는 최적의 전술이다. 이번 마드리드 더비는 촐로 시메오네의 전술이 낫다기보단 베스트의 아틀레티를 상대로 케디라님이 없는 우리가 잘 해냈다는 것에 의미를 둬야할 것이다.

페페와 세르히오 라모스의 가세 이후 레알 마드리드는 수비를 못한다는 악명은 벗었지만 깨끗한 경기를 할 줄 모른다는 더 나쁜 수식어를 얻게 되었다. 덕분에 나는 레알 마드리드의 이름을 걸고 펼쳐지는 중요한 경기에서 팬으로서 고개를 못들 정도로 부끄러운, 지금 활동하는 선수들을 아이돌로 여기고 자라날 어린 친구들에 권해주기 힘든 경기도 많이 봤다.
하지만 이번 경기는 나름 현대 축구가 어디까지 발전했는지 잘 보여주는 경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강력한 더비 라이벌을 상대로 대담한 전방 압박과 그 사이에서 전방으로 공을 어떻게든 넘겨주려는 이스코와 마르셀루의 노력, 그리고 양 풀백의 중요성까지... 특히 이 경기는 틀에 박힌 축구 경기가 슬슬 지겨워져가는 어느 정도 축구 지식이 쌓인 축덕에게는 더욱이다. 필드 위의 모든 선수가 전술적 움직임과 기술을 겨루는 동시에 뜨거운 열정으로 그라운드를 팬들의 성화만큼이나 꽉 메운다. 게다가 각 팀의 팬이라면 자기가 응원하는 팀의 선수에 관한 이야기로 논문을 5장씩은 써낼 만 한 가치있는 경기다. 예를 들어 케디라의 도움만 받던 벤제마가 드디어 오프사이드를 어떻게 깨야하는지 슬슬 적응했다거나 등등...

응원하는 팀이 온몸이 저릴 정도로 재밌는 경기를 펼친다. 게다가 모든 대회에서 우승할 가능성도 유지하고 있다. 앞으로 3개월은 레알 마드리드 팬에 있어 숨가뿌게 돌아갈 것이다. 자칫하면 마음의 준비를 해야할지도?! 우리나라에서 AC/DC 공연이 열리는게 빠를까 레알 마드리드의 '그것'이 빠를까? 결론은 AC/DC 내한 좀 부탁드립니다.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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