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도마츠 토시키'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20.08.16 이노우에 슌지 (10) - LAZY 해체 후, ‘포키’에서 '이노우에'가 되다

“LAZY 해체 후, ‘포키’에서 이노우에가 되다”

https://style.nikkei.com/article/DGXZZO62215290T00C20A8000000?channel=DF180320167079
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

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10회에선 레이지 해체 후에 참여한 새로운 그룹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트라이앵글 프로덕션을 떠나고 새로운 사무소 I.T.I. House를 설립하다.

- 1981년, LAZY 해체 후에도 이노우에 씨는 트라이앵글 프로덕션에 잔류했다.

후지타 코이치 사장은 퀸시 존스가 프로듀싱해 히트했던 ‘아이노코리다(사랑의 코리다)’의 일본어판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거기서 3인조 그룹 트로와 합류해 새로운 유닛인 ‘빅뱅’을 결성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노코리다를 일본어로 부른다는 건 솔직히, 촌스러웠죠. 빅뱅에서의 활동은 그 한곡뿐이 되었습니다.

저와 함께할 보컬을 발굴하기 위해서 후지타 사장과 저는 많은 데모 테이프들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한사람, 빛나는 원석이 있었습니다. “그룹 짜기 전에 함께 생활해봐” 후지타 사장의 제안으로 도쿄 아오야마의 저택에서 1주일 정도 함께 살았습니다. 동갑인 그는 대학생. (닛산의) 빨간 블루버드를 탄 채 “포키(이노우에), 바다에 가자”. 음악에 대한 이야기보다 놀러가자고 하다니. 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밤, 롯폰기의 야키토리 가게에 있던 후지타 사장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와는 못하겠습니다.” 그렇게 호소한 바로 다음 순간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주먹으로 크게 맞고 만화 속 한 장면처럼 카운터에서 굴러 떨어졌습니다. 이젠 인내의 한계입니다. “때려치겠어!” 입에서 곧장 튀어나왔습니다.

이후 후지타 사장은 스기야마 키요타카 & 오메가 트라이브를 프로듀스. 유닛 결성을 포기한 대학생 카도마츠 토시키는 이후 싱어송라이터로 대성공했습니다. 분명 저와 짰으면 그리 팔리지 않았겠죠. 제가 사무소를 뛰쳐나온 탓에 서로가 행복해진거라 생각합니다.

- 레이지의 베이시스트 타나카 히데유키 씨와 합류하다.

레이지 해체 후, 히로유키(타나카 히로유키), 탓칸(타카사키 아키라), 그리고 히구치(히구치 무네타카) 씨와 함께 ‘LOUDNESS’에 참가할 예정이었습니다만 음악성의 차이로 탈퇴하고 맙니다. 그래서 알고 지내던 기타리스트나 히구치 씨의 제자였던 드러머를 불러 미국발 ‘어덜트 오리엔티드 록(AOR)’을 지향하는 ‘Neverland’를 결성합니다.

“너희들 같이 할래?”라며 말을 걸어준 사람은 트라이앵글 프로덕션에서 레이지의 라이브 담당이던 이시다 신고 씨였습니다. 후지타 사장에게 맞은 사건이 사무실에 널리 퍼졌기에 배려해준 것이겠죠. 이시다 씨를 사장으로 사무소를 차리게 됩니다. 이름은 ‘이노우에’ ‘타나카’ ‘이시다’의 앞글자를 딴 I.T.I. House입니다.

네버랜드에선 레이지의 영광에 기댈 생각이 없었습니다. 자기소개도 “키보드의 이노우에입니다.” 본명으로 승부했고, 포키란 이름은 쓰지 않았습니다. ‘빨간두건양 조심해’ 같은 레이지 시절의 히트곡도 연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강한척했어도 레이지의 ‘잔향’으로서 활동했다는 측면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걸 증명하듯이 네버랜드의 활동은 조금씩 시들어가고 있었습니다.

(2018년 8월 1일)

Posted by M. Salgad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