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 애니송 열기를 펼치다. 시부야의 성지에서 벌일 마지막 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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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 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최종회 제24회에선 새로운 꿈을 밝힙니다.

회사에서 피아노를 연주 중인 이노우에 씨

- 애니송 해외전개에 힘을 쏟다.

 

7월 로스앤젤레스와 상하이에서 애니송 라이브 애니송 월드 축제를 개최했습니다. 로스앤젤레스는 3일간 마이크로소프트 극장에 17천명을 동원, 상하이 역시 1만장의 티켓이 당일 매진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러브라이브! 굿즈도 인기, 폭염으로 신용카드 리더가기 고장나는 문제도 있었지만, 많은 손님의 기뻐하는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계기는 2014. 노키아 시어터(현 마이크로소프트 극장)에서 보컬로이드 하츠네 미쿠의 라이브 감상회 때 회장의 열기에 압도되어 애니송으로 여기를 만석으로 하고 싶다라고. 그리고 2016년에 제1회를 개최했습니다. 올해 11월에는 뉴욕에서 첫 공연을 할 예정입니다. 경기장은 해머스타인 볼룸. 아레나 같은 대형 공간은 아니지만 노려라, 메디슨 스퀘어 가든의 기분입니다.

 

7월 두 공연에서 놀란 적이 있습니다. 출연자의 절반 이상이 현지어로 MC(연주간 토크)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티스트의 노력에 감동을 받았어요. JAM Project는 영어, 중국어, 포르투갈어, 힌디어와 각국의 언어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 다음 꿈, 시부야에 새로운 성지를 만드는 것

 

업계발전에 이 음악홀이 필요합니다. 한다면 시부야가 아니면 의미가 없습니다”. 2017년 봄 쯤, 술집에서 반다이 남코 홀딩스의 타구치 미츠아키 사장과 직접 담판을 지었습니다. 눈에 띄는 1000평짜리 땅을 보고서 여기밖에 없어요라고. ‘시부야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습니다.

 

마음에 둔 것은 시부야의 밤 풍경이었습니다. 라이브하우스인 시부야 eggman에서 나온 땀투성이의 젊은이들과, NHK홀에서 나와 공원거리를 미소를 띈 채 걸어가고 있는 부인의 모습. 시부야야말로 음악의 심볼이 되는 거리라고 실감했습니다.

 

최근에는 2000명 규모의 홀이 부족합니다. 수천명의 공연장을 만원으로 만드는 애니송 아티스트가 늘었습니다만, 실제로 거기에 다다르기까지가 매우 어렵습니다. 성공을 꿈꾸며 땀흘리는 분들이 노래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고 싶습니다. 레코딩 스튜디오도 설치되어 애니메이션 음악 뿐만 아니라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자립해나갈 장소입니다.

 

인생은 마지막에 결판이 난다고 생각합니다. LAZY가 해산한 1980년대부터 약 10년간, 저는 성과를 내지 못한 채 계속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란티스 창업 후에는 정신없이 일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인생을 돌아보면 그 10년도 포함하여 다양한 국면에서 만났던 사람들과의 인연이, 생각지도 못한 형태로 일로써 이어지고 있습니다. 신기한 느낌입니다.

 

시부야 프로젝트는 자세한 시설 상태를 포함해 검토 중입니다만, 연령적으로 제 마지막 큰일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회사에서 퇴직하면, 공연장에서 악기관리 스태프로 채용해주지 않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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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823)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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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소에서 독립, 별안간 무급이 되어 밴드해체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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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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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12회에선 새로운 밴드의 해체로 인해 힘든 시기로 내몰렸던 시기를 되돌아 봅니다.

네버랜드 해체 후 결성한 휴먼네이처의 멤버들(오른쪽 끝이 본인)

- 1980년대 중반. LAZY 출신의 타카사키 아키라 씨와 히구치 무네타카 씨가 결성한 LOUDNESS는 미국 뉴욕에서 라이브 공연을 열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었다. 한편, 이노우에 씨가 타나카 히데유키 씨와 만든 Neverland는 용두사미로.

온천이나 호텔에서 디너쇼를 열거나 팬미팅을 여는 일이 늘어나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란 상황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무소에서 급료를 받고 있으니까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다’란 결론이 나면서 이시다 신고 씨와 설립했던 I.T.I. 하우스를 떠나기로 했습니다.

별안간 무급이 되었습니다. 네버랜드 보컬과 히데유키까지 셋이서 동거를 했습니다. 활동비를 확보하기 위해서 영상특전이 붙은 팬클럽을 만들고, 500개 정도의 비디오테이프 더빙을 나누어서 맡았습니다. 집에 전화를 걸어서 테이프에 녹음한 팬클럽 안내음성을 자동응답기로 틀었습니다. 테이프 재생 스위치가 눌릴 때 나는 ‘딸깍’소리가 계속 울려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라이브 공연장에도 직접 전화를 걸어서 부킹했습니다. 여섯 명이 탈 수 있는 차를 구입해, 악기를 싣고 전국각지를 돌아다녔습니다. 라이브 중에는 대기실에 아무도 없기 때문에 회계담당인 드러머는 돈을 넣은 가방을 허리에 찬 채로 연주했습니다. 지방 순회공연이 후반부에 다다르자 가방이 무거워져서 부릉부릉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분배하는 생활이었습니다.

당시, (전 LAZY의)카게야마 히로노부 군이 건축현장에서 일꾼 아르바이트를 하고, 경험도 쌓아 현장의 리더에 올랐었습니다. 네버랜드의 수입만으로는 먹고 살 수 없었기에 그에게 부탁해 일꾼으로 들어갔습니다.

아침 다섯시, 카게야마 군이 차로 데리러 와 주었습니다. 키보드를 치는 제 손가락을 배려해, 무거운 물건을 들지 않는 작업장에 배치해 주었습니다. 하루 작업이 끝나면 리더인 카게야마 군으로부터 일당 1만엔이 든 봉투를 받았습니다.

- 결국 네버랜드 해산을 결심한다.

음반사 어디든 사무소에 속해있지 않은 네버랜드와의 계약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든 계약을 해달라고, 음반사 앞에 숨어서 디렉터를 기다렸습니다. 나오자마자 “이 곡 들어봐주세요”라며 테이프를 건넵니다.

“그렇게 CD를 내고 싶다면 해체하면 되잖냐” 예전에 소속되어 있던 음반사 디렉터가 답했습니다. “해체CD”란 명목이 있다면 발매해 준다는 것입니다. 네버랜드의 이름을 버릴지 말지 멤버들과 미팅은 했지만 앞뒤 따질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예산이 없어서 스튜디오 녹음을 할 수 없었기에 요코하마 비브레에서 해체 라이브 공연을 녹음. 1990년, 최후의 CD를 발매하면서 네버랜드는 해체. 하지만 거의 같은 멤버들로 새로운 밴드를 결성했습니다.

(2018년 8월 3일)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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