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성우의 노래를 지원해 미디어믹스의 출발점으로 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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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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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16회에선 일상계 애니메이션이나 심야 애니메이션이 떠오르던 시기를 회상합니다.

'아즈망가대왕'의 성공이 '일상계'라 불리우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이 늘어나는 계기로. 앨범 'Tribute to 아즈망가대왕'

- 란티스는 애니메이션 성우의 음악 프로듀스에도 힘을 쏟았다.

 

란티스의 기둥은 셋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가희(歌姬). 쿠리바야시 미나미 씨나 yozuca* , CooRie 씨입니다. 당시엔 PC게임 주제가의 일이 많았습니다. 두 번째는 모에()’가 아닌 불타오르는 계열() 가수. 카게야마 군 등이 결성한 JAM Project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신인 성우들. 노가와 사쿠라 씨, 치바 사에코 씨, 신타니 료코 씨들이었습니다.

 

2001년에 음악제작을 맡은 것이 애니메이션 갤럭시 앤젤’. 캐릭터송을 만들어 해당 등장인물을 연기한 성우들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음악을 축으로 한 미디어믹스의 원점입니다. 여주인공 밀푀유 사쿠라바 역을 맡은 신타니 씨는 솔로 데뷔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인기성우의 음악활동이 늘었지만 당시에는 애니메이션 성우가 노래하거나 이벤트에 출연하는 사례가 아직 드물었습니다.

 

- 후에 킹레코드 전무가 되는 애니메이션 프로듀서 오오츠키 토시미치 씨를 만난다.

 

미디어웍스(KADOKAWA)의 미디어믹스 작품 시스터 프린세스로 게임판 음악제작을 노렸습니다. 협상을 위해서 애니메이션 음악 제작이 확정된 킹레코드에 오오츠키 토시미치 씨를 찾아갔습니다.

 

그래, 자네가 란티스인가첫 대면부터 느닷없이 압도당했습니다. 동세대지만 박력이 대단했어요.

 

움찔거리면서 게임만이라도 맡겨주십시오라고 말을 꺼내니, “이노우에 씨 말야, 애니만드는데 돈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알아?”라는 오오츠키 씨. 여기에 더해 애니에 투자할 경우, 게임쪽 음악까지 담당하지 않으면 이쪽은 회수가 안된다고라고. 결국엔 그래도, 좋습니다. 좋은 곡을 만들어주세요라며 OK를 받았습니다. 그것이 오오츠키 씨와의 만남입니다.

 

2002, 만화 아즈망가대왕의 애니메이션화로 제작위원회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금액은 수천만엔. 창업한지 얼마되지 않은 벤처기업였기에, ‘목숨을 건출자였습니다.

 

판궈처인 미디어웍스는 란티스와 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았는데, 실은 오오츠키 씨의 추천이 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란티스가 아니면 안돼라며, 란티스의 출자를 인정해주셨습니다. 오오츠키 씨는 란티스에 재미있는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이란 인상이 심어져있었답니다. 남쪽으로 이주한 지금도 교제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즈망가대왕은 정겨운 일상생활을 그리는 일상계애니메이션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심야 애니메이션의 주목도가 높아지면서 라디오에선 관련 프로그램이 늘어났습니다. 그 무렵에는 현재 이사인 사쿠라이 유카 씨도 가세하면서 란티스의 동료도 늘어나갔습니다.

 

무언가가 터질 새벽녘. 그런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201889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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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보험을 해지하여 자본금으로. 직원 넷이서 창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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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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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15회에선 스스로 자금을 대어 음반회사를 설립한 당시를 되돌아 봅니다.

 

오기 부분에 씰을 붙여 발매한 앨범 'I'm in you' 라이너노트의 마지막 페이지

1999. 애니메이션 음악을 중심으로 하는 음반회사를 창업한다.

 

당시엔 주식회사 설립에 자본금 1000만엔이 필요했습니다. 저금만으로는 부족해 생명보험도 해약해서 돈을 모았습니다. 회사명에는 매직가든이나 솔리드 복스같은 여러 가지 안이 있었습니다. 고민 끝에 과거 아사미야 키아 선생님께서 이름 지어주신 란티스로 결정했습니다.

 

곡 제작은 창업멤버로 할수 있었습니다만 문제는 디스트리뷰션(판매)였습니다. 그렇기에 유통망을 가진 판매 파트너를 찾아 유니버설 뮤직 등 대기업을 차례로 돌았습니다. 설립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란티스와 계약을 맺어줄 리 없었고, 모조리 거절당했습니다.

 

방문할 기업이 점점 줄어들어, 마지막은 킹레코드였습니다. 애니메이션 전문 레이블 스타차일드가 있어 무리란걸 알고 있었지만, 연간 매출액 2억엔이라는 사업계획을 믿어주어 계약이 결정되었습니다. 책임자는 시게마츠 히데토시 씨. 80년대 네버랜드의 디렉터로 신세를 졌었는데, 당시 임원으로 승진했었습니다.

 

운도 따랐습니다. 킹레코드에선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프로듀서이기도 했던 실력자 오오츠키 토시미치 씨가 때마침 외부에서 일하셨던 시기. 나중에 오오츠키 씨가 돌아와 이런 얘기는 듣지 못했어!”라며 화내셨다고 합니다. 시게마츠 씨의 승진과 오오츠키 씨의 부재. 이 두 가지가 행운의 포인트였습니다.

 

창업초만 하여도 란티스는 직원 4명인 세계최소 음반사였다.

 

에비스에 위치한 맨션의 방 하나를 얻어 시작을 했습니다. 집세는 월 35만엔 정도. 신용이 없었기에 리스 회사도 의자나 책상을 빌려주진 않았습니다.

 

카펫위엔 집에서 가져온 전화기와 작은 복사기 하나 뿐. 킹레코드 분이 인사를 하러 오시면 몹시 허둥지둥했었습니다. “회사가 붐벼서라고 거짓말을 하곤 근처의 호텔 엑셀런트 에비스의 카페에서 회의를 가졌습니다.

 

란티스의 첫 작품은 고등학생 시절의 친구인 카게야마 히로노부시 씨의 CD.

 

그의 노래를 어쿠스틱 버전으로 편곡해 저도 몇 곡인가 피아노를 쳤습니다. 어쿠스틱으로 만든 것은 녹음하는 데에 돈이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재킷 촬영도 스튜디오 구석에서 끝냈습니다.

 

인쇄소에서 온 라이너 노트(음반에 붙이는 해설지)를 보고 깜짝놀랐습니다. ‘KAGEYAMA H’O’RONOBU“라고 오기. ”진짜야?“ 말문이 막혔습니다. 지금이라면 다시 찍습니다만 당시엔 돈이 없었습니다. ‘HIRONOBU’ 스티커를 만들어서 다같이 한장한장 붙였어요. 4000장정도 붙였을까요? 카게야마 군에게는 미안한 일을 했습니다만 본인은 재밌는 일 하고 있네~“라며 웃어 넘겨줬습니다.

 

(201888)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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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유 가사를 "싫습니다"며 거부, 애니송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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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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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제11회에선 독립 후 처음으로 애니송에 손을 대게 된 경위를 돌아봅니다.

아이돌 시절과는 달리 네버랜드에서는 음악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앞줄 왼쪽이 본인)

- 1981년, 사무소에서 독립하여 전 LAZY의 베이시스트인 타나카 히데유키 씨와 Neverland를 결성하다.

킹레코드의 시게마츠 히데토시 디렉터의 발안으로 아쿠유 씨가 가사를 써 주셨습니다. 완성된 가사는 “우리덜 오사카에서 왔어서예~” 같은. “절대로 싫습니다.”라며 퇴짜를 놓았지만 상대는 대선생님. “어떻게 거절하겠냐!”라며 혼이 났습니다.

당시 히트하던 여성 3인조 그룹 슈가의 프로듀서와 짜보는 아이디어도 나왔었습니다. 그러나 맞추러 온 프로듀서하고 맞지 않아 “이것도 싫습니다.”라며 거절. “그냥 네 맘대로 해라!”라며 내팽개쳐졌습니다.

네버랜드는 스스로 라이브하우스를 찾거나 연습장소를 확보하는 등 마치 밑바닥 시절로 돌아간 활동이었습니다. 라이브 공지 포스터는 멤버들과 렌터카를 타고 붙이러 나갔습니다. 500~600장 정도 붙였습니다. 괴한으로 오인당해 경찰관한테 불려 멈추는 일도 있었습니다.

매일을 음악 연습에 몰두했습니다. 보컬은 가입 당시 17세. 아버님으로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이노우에 씨와 동거할 것”이라는 조건으로 허가를 받아내어 참가했습니다. 문외한이었기에 마이크스탠드의 사용법부터 철저히 교육시켰습니다. 카와구치호에 있던 합숙 스튜디오의 오너로부터 “제일 많이 연습한 것은 네버랜드”라는 보증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네버랜드 활동은 즐거웠습니다. 악기를 유지보수하거나, 악곡을 연구하거나. 하고싶은 일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충실감이 있었습니다. 레이지 시절에는 음악 이외의 일이 많아 스튜디오에 1개월간 틀어박혀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시간 같은 건 없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레이지에서 버라이어티 방송의 콩트를 극한까지 끌어올려보는 것도 괜찮았을 거란 생각도 들긴 합니다만.

- 1983년, Neverland는 애니송에 처음으로 얽힌다.

“이노우에 군, 애니메이션과 타이업해보지 않을래?” 킹레코드 씨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 이쪽은 “하?”였습니다. 킹레코드 안에서도 업무 상대가 애니메이션 관계 부서였기에 항상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 분위기도 달랐습니다.

TV 애니메이션 ‘사이코아머 고바리안’의 오프닝곡과 엔딩곡을 담당했습니다. “인트로를 더 화려하게”라던가 “1코러스를 90초에“라는 등의 주문을 받아 ‘리퀘스트가 많아서 귀찮은 업계구나’라고. 이게 첫인상이었습니다. 아직 ‘애니송’이란 단어도 없이 ‘티비 만화 주제가’라고 불렸습니다.

솔직히 어릴 때 TV 애니메이션은 ‘타이거마스크’를 본 정도로, 만화나 애니메이션엔 흥미가 없었습니다. 카게야마 군은 만화를 엄청 좋아해서 LAZY 시절에도 합숙소엔 만화책이 가득했습니다. 고바리안이 인연이 되어 프로레슬링의 입장 테마곡을 작곡하는 일도 맡게 되었습니다.

(2018년 8월 2일)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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