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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3.25 카게야마 히로노부 –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

2017.03.23. 야후 재팬 인터뷰 번역.


‘드래곤볼 Z’(후지 테레비)의 주제가 ‘CHA-LA HEAD CHA-LA’, ‘전격전대 체인지맨’(테레비 아사히) 등 슈퍼전대 시리즈와 애니송의 제1선에서 활약해온 “애니송계의 프린스” 카게야마 히로노부가 올해로 데뷔 40주년을 맞는다.


40년간 카게야마는 아티스트로서, 애니송의 혼을 전해줌과 동시에 엔도 마사아키나 오쿠이 마사미 등과 함께 “JAM Project”로서도 활동해왔다. 또한 애니송계의 정보방송이라 할 수 있는 CS 키즈스테이션 방송 ‘애니파라음악관’에 2001년부터 출연 중이다(1999년부터 방송된 전신 ‘애니파라디이스’의 코너부터 출연). 올해 5월 7일에는 스페셜 라이브 “애니파라 음악관 ~KAGEYA-MATSURI~”도 개최하게 되었다.


카게야마의 메이저 데뷔는 1997년 록밴드 “LAZY”의 보컬리스트로 시작된다. 이후 40년이 지나도록 계속 달려올 수 있었던 이유를 알아보고자 인터뷰를 진행했다.


먼저 음악과의 첫 만남을 이야기하자면?

처음은 소학교 6학년입니다. 친구들, 타카사키 아키라(LAZY의 기타리스트. 이후 메탈밴드 “LOUDNESS“를 결성하여 세계적인 기타리스트가 된다)군과 함께 포크송을 했던 것이 시작이네요.


시작은 록이 아니라 포크였군요.

당시엔 포크가 유행했었습니다. 더해서 아이들에게 일렉기타를 구하는 건 힘든 일이었으니까요.


그렇군요. 포크기타는 갖고 계셨습니까?

아뇨. 없었습니다. 형이나 누나가 있어 집에 악기가 있었던 타카사키군 뿐이었죠. 저나 친구들은 아르바이트를 해서 1만엔 대의 어쿠스틱 기타를 샀었습니다.


6학년의 아르바이트라면 그 시절엔 무엇을 했었나요?

저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집 근처 청과점의 배달을 했었네요...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면 엄청나게 길어질겁니다~?


그렇군요. 조금 이야기를 넘어갑시다. 타카사키씨와 LAZY를 결성하고 스카우트되어 메이저 데뷔에 성공했지요.

고등학교 1학년 때 “헬로 영”(아사히 방송)이란 방송이었습니다. 그 방송에는 일주일에 한번, 아마추어가 나올 수 있는 코너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출연했을 때 회사를 운영 중이던 카마야츠 히로시씨가 “도쿄에서 해보지 않겠는가!!”라고 말을 걸어주시면서, 데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LAZY는 아이돌밴드라는 모습으로 기억되는데, 지금 회상 해봐도 역시 그러한 시대였던 걸까요.

카마야츠씨는 록을 하자는 느낌으로 도쿄에 호출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우리를 활동시켜주는 레코드 회사나 프로듀서는 “베이 시티 롤러즈(스코틀랜드 출신의 세계적인 아이돌밴드)”를 만들 생각이었던 거죠.


그건 우리가 생각하던 것과는 다른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오사카에서 막 상경하여 어떻게든 성공하지 않으면 시작은 없다는 우리의 이해도 있었습니다. 먼저 팔리는 것을 제일 처음으로 생각하였고 아이돌 스타일의 곡도 연주했었습니다.


처음부터 록을 하려는 생각이 강하셨던걸로 보입니다만 애니송을 부르게 된 경위는?

LAZY는 4년간의 활동 끝에 1980년에 해산했습니다. 이후 솔로로 활동했습니다만 파리만 날렸고... 레코드 회사나 프로덕션에서 조리돌림을 당하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런 시기를 겪고 겨우 안정되어가는 시기에 일본콜롬비아 학예부의 분으로부터 “전격전대 체인지맨”의 주제가를 불러달란 요청을 받았습니다.


어째서 제의를 받게 되었을까요?

그건 스스로 추측하건데 그간 애니송 가수라면 록 싱어가 아니었잖아요. 역시 미즈키 이치로씨라던가 사사키 이사오씨라던가 좀 더 느긋이 노래하는 스타일의 유명 가수들이 애니송을 불렀었습니다.


하지만 80년대 중반의 엔터테인먼트 씬은 변화를 맞이하여 젊은 사람들은 록 음악만 듣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애니송도 조금씩 록 스타일이라는 생각도 갖게 되어 제의를 받은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당시 일본의 애니메이션이나 특촬의 기술이 진보하여 리얼하고 박력있는 작품이 나오기 시작한 과도기 였습니다. 그러한 작품과 어울리는 건 질주감 좋은 록 밖에 없다고 생각된게 아닐까요.


솔로 활동하던 시기, 추구하던 음악이 애니송과 부합되었었나요?

솔로가 된 이후 저는 저 스스로도 고민하며 곡을 만들고 라이브 공연을 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애니송이 맘에 들든 아니든 가릴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오랜만에 날 필요로 해주는 사람이 일감을 의뢰해줬으니까 어떻게 해서든 그 사람의 기대에 응해주고 싶어! 오직 그 마음뿐이었습니다.


40년간 활동하면서 인상에 남은 뮤지션은 있습니까?

먼저 카마야츠씨입니다. 카마야츠씨가 없었다면 데뷔할 수 없었을 겁니다.


다음은 마츠자키 시게루씨입니다. 마즈자키씨 댁에 3개월 정도 묵었던 적이 있었는데, 남자로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의 의미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스튜디오에 장시간 있는 것을 싫어하는 싱어도 많습니다. 창문도 없는데다 좁고 고통스런 공간이니까요. 그래도 마츠츠자키씨와 마음이 통하게 된 것은 서로 스튜디오에서 장시간 앉아있어도 평온하셨기 때문입니다.


스무살 무렵이었어요. “카게도 나도 스튜디오에 몇 시간이나 있어도 멀쩡한걸~”라고 마츠자키씨로부터 듣게 되어, 스스로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냐면 좁은 스튜디오에서 음악을 만드는 것이 즐거워. 계속 기타만 치고 있어도 즐거운걸. 그걸 계기로 저도 어른이 된다면 마츠자키씨처럼 당당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라이벌로서 의식한 뮤지션이 있었습니까?

젤 처음 충격을 받았던 것은 사잔 올스타즈였네요. 처음 방송에서 함께 있었을 때 “소리가 작은 데도 이렇게나 박력이 있다니”라고 생각했었습니다.


LAZY는 본디 하드록 색이 강하니 기타 앰프도 제대로 울리고 드럼도 굉장히 파워풀합니다. 그런데 사잔 올스타즈는 기타나 팬더의 앰프가 좋은 소리를 내지만 음량도 작고 드럼도 작아, 거기에 보컬도 샤우트하지 않아. 그런데도.. 대단한 박력이 있었어요! “...저건 진짜군”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때까지 록이라 하면 큰 소리로 쿵하고 부딪히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것 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말할 순 없지만, 이 사람들이 나보다 몇 배는 더 대단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의 목표가 되었단 말인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소리는 크지만 졌다”라고. 더욱 뿌리에서부터 록의 길을 찾지 못하면 나만의 스타일은 만들 수 없다. 그것이 LAZY가 아니라 솔로로서 활동하자는 생각의 한 가지 이유가 되었습니다.


카게야마씨는 후진 육성에도 적극적이신데, 후배 중에 놀랄만한 분은?

알면 알수록 대단한 것은 오쿠이 마사미네요. 오쿠이는 노래를 잘 부르는 가수들과 비교하자면 “보통”으로 보이기 쉽지만 그 부분이 무서운 점입니다. 기초적인 부분부터 레벨이 높아요. 말하자면 다른 누구보다도 잘 부른다고 생각합니다. 달리 말하지 않아도 무엇이든 부를 수 있는 보기 드문 싱어라고 생각합니다.


방금 전 사잔 올스타즈에 충격을 받은 것과 비슷한 인상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도 이러이러한 것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좀처럼 오쿠이처럼 하기엔 힘들어요.


싱어라면 음정이나 리듬감, 성량, 음역의 넓이 등 여러 가지 기초기술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걸 아는 사람이 듣는다면 오쿠이는 남녀 가릴 것 없이 가장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게 가능한 사람이 달리 없으니까요.


그렇게 40년을 해오셨습니다. 여기까지 계속할 수 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의외로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는 상냥함이, 저에게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역시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한 걸까요.

예를 들어 대단한 실력의 사람이 있어도 사무소와 잘 관계를 맺지 못하거나 스탭들이 떠나는 사람은 대성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의 스타일로 운영이 되고 15년. 그 전의 사무소에서도 25년 있었어요.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있었지만 그것도 포함해 25년간의 인간관계를(전 사무소) 만든 것이 오래 할 수 있었던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경력 중 “애니파라 음악관”도 올해로 17년째입니다. 당시엔 애니송 정보방송이란 것도 여명기였기에 꽤나 시초격인 느낌도 있습니다.

성우 쪽에서의 움직임과 당시 애니송이 유행이 되어가던 시절이기에 할 수 있는 것이 정말 많았습니다. 좋은 의미에서의 걸음마 느낌이었습니다.


무엇이든지 실험해볼 수 있는 자유로움이 매력적이라는 거겠죠?

그렇습니다. 아직 키즈스테이션도 작을 때고. 예를 들면 노가와 사쿠라가 가수로 데뷔할 때 제가 프로듀스해주던 때도 있었죠.


그게 나가노 선플라자에서 라이브 공연을 하던 시기엔 란티스와 함께 작곡을 하거나 지원을 해주는 그런 실험적인 걸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5월 7일에는 “애니파라 음악관”의 기념 콘서트도 예정되어있습니다. 어떤 내용인가요?

이번엔 제가 축하받는 자리라서.. 어떤 내용일지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평범한 콘서트로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키즈스테이션 방송도 포함해서 전국의 사람들에게 라이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애니파라 정신이 넘치도록, 저나 우리들이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 같은, 모두가 행복해지는 분위기가 넘치도록 하고 싶습니다.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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