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재능들이 손댄 ‘하루히’가 대폭발, ‘럭키스타도 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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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18회에선 애니메이션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럭키스타의 연이은 히트에 대한 뒷이야기를 밝힙니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은 주제가 뿐 아니라 삽입곡도 인기였다

- 2006년 방송된 TV 애니메이션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은 사회현상으로 이어졌다.

 

과감하게 젊은이에게 프로듀스를 맡겼습니다. 그 전까진 사장인 저와 창립 멤버인 이토 요시유키 씨가 음악 프로듀서를 맡고 있었습니다. “너한테 전부 맡길테니까, 곤란해지면 물어봐라며 보냈던 것은 사이토 시게루 씨. 당시 란티스에 막 입사했던 30세 언저리의 젊은이였습니다.

 

BGM이나 삽입곡을 작곡한 코우사키 사토루 씨는 남코(현 반다이 남코 엔터테인먼트) 출신. 스즈미야 하루히에서 연출이나 각본을 담당했던 야마모토 유타카 씨하고는 교토대학에서 친구사이였습니다. 작사는 하타 아키 씨. 처음에는 란티스의 거래처에서 근무하는 아르바이트였습니다만, “분명 재밌는 가사를 써줄테니까라던 스태프의 보증으로 작사를 의뢰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CD 매출 톱클래스인 대인기 크리에이터입니다.

 

주인공인 스즈미야 하루히는 히라노 아야 씨가 연기했습니다. 첫만남은 2001년에 방송된 애니메이션 천사의 꼬리였습니다. 캐릭터송 녹음 중에 아직 중학생이던 그녀의 리듬감이나 감각은 성우진 중에서도 돋보였습니다. 급성장 중인 히라노 씨와 활발하고 에너지 넘치는 하루히의 캐릭터가 잘 어울렸습니다.

 

젊은 스탭이 대히트를 성공시키면서, 그때까지 소소하게 히트를 거듭했던 저는 새로운 시대의 바람을 느꼈습니다. 킹레코드의 오오츠키 토시미치 씨도 잘됐네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서라며 기뻐해주셨습니다.

 

제가 사운드 프로듀스를 하게 되면, 이것저것 참견을 하고 싶어집니다. 스즈미야 하루히를 성공으로 이끈 것은 젊은 크리에이터의 자유로운 아이디어였습니다. 이 작품 이후, 저는 프로듀서로서 전면에 나서는 일은 없어집니다. 스즈미야 하루히는 란티스의 터닝포인트가 되었습니다.

 

- 스즈미야 하루히의 엔딩곡 하레하레유카이에서 등장인물이 추는 댄스를 따라하는 팬들이 속출. 그 열기를 공유하며 증폭하기 시작한 것이 동시기에 나타난 유튜브니코니코동화’. 애니메이션의 인기가 제작자의 의도를 넘어서는 인터넷 시대에 돌입했다.

 

팬이 애니메이션 작품을 응원하는 트렌드가 생긴 것은 최근입니다. 2007년 방송한 럭키스타에서는 니코니코동화 등에서 주제가 가져가! 세라복을 오리콘 랭킹 1위로 만들자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당초, 초기출하량은 5만매로 정해져있었습니다. ‘이 매수라면 1위는 무리겠지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큰일이 일어났어요팬들의 심기에 민감한 스태프들이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팬과 제일 가까운 란티스가 품절을 일으켜선 안된다미팅을 열어 출하 매수를 2배인 10만매로 늘리기로 했습니다. 결과는 오리콘 2위였습니다. 스즈미야 하루히와 럭키스타의 히트가 애니송 씬(scene)을 바꿨다고 생각합니다.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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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사마'의 성공, 팬들의 강력한 일체감에 놀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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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직장인비록 셀렉션 이노우에 슌지편

 

시장규모가 커진 애니송’. 그 비즈니스의 주역 중 한사람이 바로 반다이 남코 아츠의 이노우에 슌지 부사장입니다. 1970년대에 록밴드 ‘LAZY’로 시대를 풍미한 바 있습니다. 17회에선 일상계 애니메이션이나 심야 애니메이션이 떠오르던 시기를 회상합니다.

2005년에 시작한 '애니멜로 섬머 라이브'에서 애니송의 열겨를 실감했다

- 2005, 휴대전화용 컨텐츠 송신의 드왕고가 애니송 라이브 이벤트 아니멜로 섬머 라이브(아니사마)를 개최. 프로듀서 오오타 토요키 씨(현재 드왕고 산하 메이지스 사장)는 란티스의 이노우에 씨에게 협력을 청했다.

 

아니사마 개최는 애니송을 둘러싼 분위기가 확하고 바뀐 순간이 아닐까요. 1회는 국립 요요기 경기장의 제1 체육관이 회장이었습니다. 아직 애니송 라이브가 그다지 많지 않던 시기. 정말 관객이 들어올까 걱정도 했습니다만, 오오타 씨는 반드시 요요기에서 성공시킨다라고. 최근의 아니사마에서는 생각도 못할 일입니다만 당시에는 출연자도 모이지 않아 곤란했었습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관중석은 90% 정도 찼습니다. 요요기 경기장에서의 콘서트 같은건 경험이 없기 때문에, 무대 위에서 출연자가 모두 감동해 울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계속 불러온 애니송에 이렇게나 많은 팬이 있냐며. 자기가 해온 일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거죠. 저나 스태프도 울고 있었습니다.

 

아니사마의 성공에 용기를 얻을 수 있었던 건 팬들도 마찬가지 였겠죠. 당시엔 펜라이트가 유행하던 시기였습니다. 8000~9000명이 일제히 펜라이트를 흔드는 모습을 보며 관객들도 애니송을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았구나하고 자신감을 가졌을 겁니다.

 

놀라운 점은 모든 노래를 다같이 응원하는 애니송 팬들의 일체감입니다. J-POP 음악 페스티벌에선 응원하는 아티스트가 노래를 마치고나면 관객들이 바뀝니다.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은 일입니다만, 애니송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같이 응원해줍니다. 이것은 애니송만의 독특한, 세계공통의 문화입니다. 애니송의 장르를 더욱 넓어질지도 모른다. 1회의 아니사마에서 5시간 동안 계속 응원해주시는 팬들을 눈앞에 두고, 그렇게 느꼈습니다.

 

- 아이돌그룹의 융성도 애니송에 혜택을 줬다고 한다.

 

2005년은 ’AKB48’이 활동을 시작하던 시기입니다. AKB48의 노래의 작사는 아키모토 야스시 씨입니다만, 작곡은 곡에 따라서 각각 다른 크리에이터들이 다뤘습니다. ‘모닝구무스메는 작사도 작곡도 모두 츤쿠씨가 다뤘습니다. AKB48의 등장은 크리에이터들에게 새로이 활약할 장소를 제공한 것입니다.

 

AKB48에서 그룹이나 멤버의 특징을 이해하고 작곡에 활용하는 경험을 했던 작곡가가 애니송 업계에서도 활약해주었습니다. 사실 아이돌업계와 애니송업계는 크리에이터를 통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프로작곡가가 맹활약하고 있다는 점에선 레이지의 현역시절과 분위기가 비슷합니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럭키스타’. 이후 애니송에 이끌려 온 젊고 재능있는 크리에이터들이 많은 히트 애니송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2018810)

 

Posted by M. Salg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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